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터Lee May 19. 2020

사대주의가 무너진 순간

안녕 나의, 우리의 체스키크롬로프_ #11

  "남편은 사대주의 기질이 좀 있어, 그치?"

  "응! 인정!"

  한국에서부터 이어져온 성향이었다. 뭔가, 서양인이 나보다 우월할 것 같고 한국의 물건보다 서양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생각하는 사대주의 기질이. 장을 보러 간다거나 가끔 쇼핑을 하러 나갈 때면 뭔가 다 이뻐 보이고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랑금이 정신을 차리도록 옆에서 잘 잡아줬다. 그런데 막상 생활을 조금씩 이어가다 보니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직 해외뽕(?)에 취해 하루하루 기쁨이 더 큰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날, 2박을 예약한 외국인 여행자를 받게 되었다.


  아달베르트 펜션은 외국인 예약도 받는다. 주인만 한국인일 뿐 운영은 호텔식으로 운영을 하였다. 개별 객실은 독립되어 있으며 여느 민박처럼 손님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있지는 않다. 여느 민박을 기대하고 이런 부분을 불편해하는 한국 여행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럼에도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는 멍 때리기 좋은 다국적 여행자들에게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부킹닷컴 기준 현재는 9.0/호텔스닷컴은 9.4의 높은 평점을 기록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외국인 여행자를 받았다. 


  젊은 남녀 커플, 나이스해 보이는 남자와 첫인상부터 시크해 보이는 여자. 사전에 연락 없이 일찍 도착하였지만, 다행히 청소가 일찍 끝나 이른 체크인을 제공할 수 있었다. 간단한 체크인을 마치고 예약한 객실로 입실 시켜주었다. 따뜻하게 대해주는 남자와는 다르게 입실하는 순간까지 여자는 눈을 마주치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뒤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이십분쯤 지났을까, 사무실 문을 똑똑하며 입실했던 외국인 남자가 문밖에서 기다린다. 편하게 들어오라며 얘기를 하고 주저주저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방의 모든 건 참 좋습니다. 하나 부탁을 할 수 있을까요? 내 여자친구가 방 청소를 다시 한번 체크해 주길 바라거든요. 미안합니다."

  "물론이죠, 이른 체크인을 했으니 원한다면 체크인 시간에 돌아와도 좋습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청소를 체크하고 부족한 부분은 다시 치우겠습니다."

  뭐가 맘에 안 들었나? 뭐 그럴 수도 있지 생각하며 남자를 뒤따라 간다. 객실 문이 열리고 그의 여자 친구가 팔짱을 끼고 창문 밖만 쳐다보고 있다. 역시 쳐다도 보지 않았다. 남자 친구는 침대 밑을 가리키며 여자친구가 저 먼지를 치워주길 바란다고 공손히 말을 해줬다. 침대 밑 손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 먼지 뭉치가 하나 보였다. 흔쾌히 걱정하지 말라 답변을 해주는 순간,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그의 여자 친구가 내게 분노를 쏟아 냈다.


  "당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왔는지 알아? 내가 이 휴가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쉬러 왔는지 아냐고!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어. 나는 이 여행을 위해 정말 고생을 하며 일을 했다고! 내가 당신한테 돈을 지불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준비를 할 수가 있지! 당신은 내 휴가를 망쳤어!"

  "... ???"

  "그리고 이 가구들, 이건 앤티크 가구가 아니고 그냥 오래된 가구들이야! 이게 뭐야!"

  머릿속이 순간 하얗게 되었다가 스위치가 바뀌듯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옆에서 남자친구는 안절부절하며 여자친구를 달랬다. 이 상황은 뭐지 싶었고 왜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짧은 순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답변했다.

  "우리는 다시 청소를 해줄 수 있습니다. 객실을 잠시 비워준다면 침대 아래를 잘 치워놓겠습니다."

  "아니! 너는 내 휴가를 이미 망쳤어!"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변해서 나를 비난한다. 나의 목이 붉게 변하는 게 느껴졌다. 감정은 배제하고 다시 한번 차분히 얘기해 줬다.

  "우리는 청소를 다시 해줄 수 있습니다. 잠시 객실을 비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다시, 거들떠도 안 보고 다시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바라보는, 처음 본 그 모습으로 돌아갔다. 남자친구는 애써 웃음 지으며 고맙다 얘기를 한 후 준비되면 나가다가 돌아오겠다고 대신 이야기를 해줬다. 괜찮다는 답변을 해주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불과 10분 남짓의 시간, 폭풍이 지나간 듯했다. 커플이 객실을 나간 뒤 다른 방 청소를 하고 있는 베라를 불렀다. 청소를 도와주는 현지 체코인 직원 베라, 우리가 이일을 시작하며 함께 일을 하게 된 동료다. 체코 사람이지만 흔치 않게 영어를 곧 잘해서 우리가 필요한 많은 부분을 도와줬다. 랑금과 내가 많이 의지하며 가족과 같이 생각하였다(나중에는 우리에게 쓰라린 아픔을 주었지만. 이 부분도 나중에 적어보겠다). 베라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깜짝 놀라며 짜증 섞인 말투로 말도 안 된다 얘기를 한다. 나도 이해는 하지만, 손님이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으니 해당 객실의 먼지를 가리키며 다시 한번 청소를 해달라 부탁했다. 손으로 가구를 쓰다듬으며 이건 오래된 가구가 맞지만 결코 나쁜 가구가 아니라며, 훌륭한 앤티크 가구인데 그녀는 뭔가 잘못 알고 있다 얘기한다. 그리고 순간 아, 2박이구나라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속은 쓰리고 머리는 아프고, 마치 기둥에 묶인 채, 아니 손과 발을 사용하지 않고 권투를 해야 하는 것 같은 답답함이 찾아왔다. 요리를 준비 중이었던 랑금이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 붉으락푸르락 표정이 좋지 않은 나를 보며 무슨 일이냐 물었고 상황을 설명해 줬다. 나보다 더 분노하는 랑금, 다른 것에는 잘 분노하지 않지만 공정과 정의, 평화를 사랑하는 랑금에게 지금의 상황은 크게 분노할 만한 상황이었으리. 옆 사람이 더 흥분을 하니 내가 더 흥분할 수가 없었다. 좀 더 감정을 풀고 싶었으나 내가 랑금을 위로하고 있는 그림이 돼 뭔가 좀 억울한 느낌이 들기도. 그래도 그렇게 위로를 해주니 금세 감정이 풀렸다.


  그날 오후, 펜션 밖에 나갈 일이 있어 로비를 지나다 펜션으로 들어오는 커플과 마주치게 되었다. 다시 청소한 뒤 깨끗한 상태를 확인한 나는 자신 있게 먼저 인사와 함께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방 상태는 괜찮나요?"

  "네, 고맙습니다. 괜찮습니다."

  남자친구는 따뜻하게 대답해 주는 반면 여자친구는 쌩하니 지나간다. 아무 대답 않고 지나갔으니 문제는 해결되었나 보다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8시 즈음으로 기억되는데 늦은 체크인을 요청한 한국 여행자가 있어 시간에 맞춰 체크인을 진행한 뒤, 위층에 있는 방을 안내하고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다른 손님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잘 돌아보았냐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현관문이 잘 안 닫혀 있다. 현관문을 닫을 겸 문밖을 잠깐 쳐다보려 문을 잠깐 여는 순간 외국인 남자 친구가 경사가 있는 문밖 길가 아래에서 천천히 담배를 물고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혼자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내뱉는데 눈이 마주쳤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살짝 끄덕이는 서로의 고갯짓,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순간, 오리온 초코파이 CM송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