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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Lee May 28. 2020

살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안녕 나의, 우리의 체스키크롬로프 _ #17

  체스키크롬로프(이하 체스키)는 체코어 단어인 '췌스끼Cesky[체코를 대표하는, 체코의]'와 '끄뤔뤄브Krumlov[말발굽 모양의 지형]'의 합성어이다. 눈이 닿는 곳마다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곳을 랑금과 내가 선택한 이유는, 물론 동화와 같은 마을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한국인이 없는 곳, 사람이(여행객이 아닌 거주자가) 많지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이 반대로 힘든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힘든 일이 있기 마련이니.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날이면 랑금과 함께 마을을 거닐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마법의 문처럼, 펜션 현관문을 열기만 하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법한 건물들과 돌로 덮인 중세 시대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좋은 기운 가득 품은 여행자들과 뒤섞여 조금 걷다 보면 기분이 금세 나아진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엔 자동차에 몸을 싣고 길이 이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때론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드라이브를 나간다.

  상담가는 테이블을 중심으로 내담자와 90도에 위치할 수 있게끔 자리를 만든다. 사람이 마주 보면 무의식 적으로 방어, 회피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계와 같이 내담자의 마음을 쫓기게 할만한 물건은 주변에 두지 않는다. 사람 간 대화하기 가장 좋은 자세를 뽑으라면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있는 것이다. 사람이 나란히 있다면 같이 바라보는 것들을 주제로 자연스레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또 상대방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가리켜 알려주며 시야를 넓힐 수 있게 한다.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400년의 시간이 멈춰있는 체스키는 랑금과 함께 걷기 안성맞춤의 공간이며, 한국말을 이해하는 거주민이 없기에 맘 편히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참 좋았다. 그렇게 이어진 대화는 좀 더 깊은 이야기로 가는 마중물이 되기도 했다. 

  "아, 날 진짜 좋다! Zyon이랑 이 날씨에 오스트리아로 소풍 갔었는데."

  "그게 이맘때였나?"

  "그치, 그때 소풍 바구니에 커피랑 커피잔이랑 돗자리까지 챙겨서 갔잖아."

  "아, 맞네! 이야, 그게 벌써 몇 년 전이야?"

  "그게 아마, 그렇지. 2년 전 이맘때네."

  "어휴, Zyon이가 여기 오래 머물긴 했구나. 겨울에 와서 봄까지 있었으니."

  "그치그치."


  차를 타고 조금만 벗어나면 드넓은 들판과 숲이 주변에 가득하다. 운전대를 잡고 서로 말없이 자연을 감상하며 한참을 달리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며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날씨, 계절, 장소, 기온 등등, 5년 이란 시간이 만들어준 추억은 우리가 걷거나 달리는 모든 곳에 남아있었다.

  여기서 살면서 만나게 되는 여행자들, 또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참 좋은 곳에서 사시네요', '이런 곳에서 살면 어떤 기분이세요' 같은 질문을 많이 한다. 그럴 때면 한 문장으로 이렇게 답을 해주곤 했다.

  "한국은 낙원이고 여긴 천국이에요."


  이곳은 모든 게 평화롭다.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일 년에 세 번이나 들을까 싶을 정도로 조용하며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경계를 지키며 서로 간섭하지 않고 평안한 삶을 즐긴다. 동네 공원이나 걷기 좋은 길에서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볕 좋은 날 테라스나 집 마당에 자리를 잡고 여유 있게 책을. 체스키 근교에 리프노라는 거대한 호수가 있는데, 여름이면 물놀이하기 그렇게 좋은 장소이다. 겨울이면 슈마바 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산이 스키장으로 변해 사람들이 스키를 타러 몰려온다(거대한 호수는 꽝꽝 얼어, 스케이트장으로 변해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이렇게 자연과 어우러져 삶을 누리기 참 좋은 곳이다.

  반면, 한국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즐길 거리들은 이 동네에서 찾아볼 수 없다. 동일한 메뉴의 식당과 동일한 모양의 카페,  동일한 양식의 건물들, 잔잔한 밤거리. 자극과는 거리가 멀다. 가장 가까운, 제법 도시 같은 곳은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체스케 부데요비체인데, 맥도날드나 KFC가 그리우면 이곳까지 나가야 했다. 공무원들은 늘어지게 여유 있어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일을 처리하고, 그마저도 간혹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두 번 세 번 사람을 오게 만든다. 가끔 이 촌 동네를 벗어나 제대로 된 도시의 느낌을 느끼고 싶을 때에는 일부러 약속을 잡아 두 시간 반 거리의 프라하까지 가서 스타벅스의 시원한 프라프치노 한 잔을 마셨다. 간간이 도시 사람일 때가 그리워서. 그만큼 일상이 단조롭고 심심한 곳이긴 하다.

  "부인, 한국에 살 때는 뭘 할까 고민했었는데 여기선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같아."

  "맞아. 한국은 진짜 할게 많은데. 여긴 참 무료한 편이긴 해. 그치?"

  "그러니깐. 먹을 것도 참, 다 똑같고."

  "으앙! 남편, 나 갑자기 해산물 먹고 싶어졌어.. 으앙..."


  한국이었다면 어느 식당으로 갈까, 포장해서 집에서 먹을까라는 고민을 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륙으로 둘러싸인 체코에서 귀하디 귀한 해산물을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살 때는 아침을 건너뛰고 점심은 밖에서, 야근할 때면 저녁마저 밖에서 해결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다 이곳에서 매일 삼시 세끼를 만들어 먹는다는 건 매일 숙제를 푸는 것과 같았다. 아마 주부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 밥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설거지 정도는 반드시 하길 바란다. 이런 탓에 전화 한 번에, 아니 터치 몇 번에 집까지 따끈한 음식을 배달해 주는 한국은 이곳과 비교해 당연히 낙원에 가까웠다.

  그나마 타운 내에 위치한 유일한 중식당 '북경반점'이 우리의 고민을 많이 덜어주었고, 한국이 그리울 때면 이 식당의 음식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러다 2019년, '북경반점'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돌리게 만든 'My Saigon 레스토랑'이 펜션 근처에 오픈하게 되었고, 이곳의 쌀국수와 롤은 지친 입맛을 달래주는데 최고의 음식이었다. 가끔 '북경반점'에게 왠지 모를 미안함이 느껴졌지만 많은 중국 단체 관광객이 우리의 빈자리를 메꿔주었다. 

  가끔 생일이나 결혼기념일과 같은 특별한 날이면 30분 거리의 근교 체스케부데요비체까지 가서 체스키에는 없는 음식들을 '특식'처럼 먹고 기분 좋게 돌아오기도 했다.

  삶은 점점 단순해졌지만, 우리의 입맛은 여전히 다양한 맛을 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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