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친정'이라는 말에는 대부분 친정엄마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친정엄마가 있는 곳이 '친정'이라는 의미로 부각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내게 친정은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엄마’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어렸을 때의 친정은 병원과 집이 함께 있던 구조였다.
친정아버지가 산부인과 의사였는데 큰길에 있는 쪽은 병원이었고, 반대편의 안쪽은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이었다. 그래서 늘 뒤쪽으로 돌아서 다녔고, 주로 내가 그랬지만 가끔 급하거나 돌아가려면 멀기에 바로 질러가기 위해 병원을 통과해서 갈 때는 조용하게 다녀야 해서 뒤꿈치를 들고 다녔다.
산부인과여서 늘 산모와 아기가 집에 있었고, 병원과 안채 사이에 있는 방에 여러 명의 산모와 아기들이 자고 있어서 큰소리로 다니면 혼났기에 늘 병원을 가로질러갈 때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다녔다.
그런 구조를 갖고 있다 보니 친정아버지를 도와 엄마는 간호사가 아님에도 늘 병원일로 바빴다. 집안일은 다른 사람이 하고, 아무래도 병원일은 조심스러워서 그런지 간호사가 있음에도 엄마의 역할은 정말 많아서 어린 눈에도 엄마가 편히 쉬는 것을 잘 보지 못했다.
하루 24시간 미역국이 끓고 있고, 지금처럼 일회용 기저귀가 없던 시기라 병원에 있는 동안은 그것까지 엄마가 삶아서 대주어야 하고, 병원의 기구들도 늘 소독을 해야 해서 다른 집보다 우리 집은 유난히 더 더웠고, 미역국 이 끓는 냄새로 음식 냄새가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유난히 미역국을 싫어했는데 식성도 다시 돌아가는지 지금은 또 미역국을 좋아한다.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있어서 아직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을 때도 난 일하는 할머니나 친할머니의 손에서 컸고, 간혹 칭얼거리면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하얀 가운을 입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있는 것이 그나마 부모에게서 받는 호강이라면 호강이었다.
우리 집은 산부인과 병원이었는데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우리를 부를 때 병원 집 딸, 아들이라고 불렀고, 엄마는 병원장 부인이라 늘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호칭과 무관하게 원래 병원을 하는 집은 가난한 줄 알았다.
산부인과라는 게 이전에는 조산원, 산파와 별 차이가 없던 시기였는데 그나마 순산이 어려운 산모들이 갑자기 병원으로 어쩔 수 없이 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병원 문 앞에 달려있는 비상벨은 밤만 되면 요란스럽게 울어대서 한밤중인데도 늘 한 번씩은 깨었다가 다시 잠들곤 하였다.
그렇게 오밤중이나 새벽에 갑자기 병원까지 와야 되는 사람들 역시 넉넉하지 못하다 보니 그들이 병원비로 내는 것은 현금이 아닌 농사지은 것들이라 마당 건너편에 있는 창고에는 사시사철 먹거리가 가득했다.
그것도 요즘처럼 쇼핑백이나 비닐봉지에 담겨오는 것이 아니라 세숫대야나 망태기에 담겨서 캐거나 딴 그대로 흙과 함께 담겨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늘 아버지는 미안하고, 염치없어하는 보호자들을 돌려보내고, 그런 모습을 늘 뒤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엄마의 한숨소리도 내 귀에는 늘 들렸다.
그런 이유들로 어린 시절을 엄마가 아닌 일하는 사람 손이나 친할머니와 함께 지내서인지 지금도 난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결혼 후에도 시할아버지, 시할머니가 좋았고,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와 같은 방을 썼던 할머니의 보살핌을 잊지 않고 있다.
반면 할머니와 늘 살아서 그런지 엄마에 대한 기억도 없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인한 애틋함도 내겐 없는 듯하다.
지난봄에 아버지의 추모일이어서 친정가족들이 함께 모였을 때 무슨 말 끝에 그런 말을 엄마에게 한 적이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많은데 엄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며 왜 내가 하는 것은 그렇게 다 반대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지나가는 말처럼 했지만 분명 서운함도 포함되었다.
그것에 대해 엄마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도 엄마는 오직 장남인 큰오빠만을 생각하는 것이 보인다.
가장 어려운 형편이기도 하고, 첫째라고 너무 감싸 안아 키운 탓에 늘 자립심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전히 엄마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뭔가 사고 싶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내게 전화를 하지만 반대로 뭐라도 생기면 큰오빠만 생각을 한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 엄마의 그런 맘을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로서 엄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없다는 것이 늘 아쉽다.
오빠들과 터울이 있어 뒤늦게 낳은 딸이 아버지는 그저 예쁘고 함께해 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던지 환자만 없으면 나와 놀아주고, 재워주고 해서 아버지와는 많은 기억을 가진 반면에 엄마와는 무엇 하나 같이 해 본 기억이 없다.
다 커서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딸이기에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명절 음식이나, 바느질, 김장 같은 것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지 학교 수업과 상관없이 일을 시키지는 않지만 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곁에 앉혀놓고 하나하나 설명을 하며 가르치려 하였는데 그것도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다.
학교에 다니는 사람에게 수업이 더 중요한 것이라 대부분 학교에 결석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부모들의 마음일 텐데 엄마는 그것보다 김장이나 명절에 먹을 음식들이 더 중했던 듯하다.
사실 엄마는 학교엘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말로는 좀 우습지만 99칸 귀한 양반집의 딸이어서 서당훈장이 집으로 와서 가르쳤기에 한문과 언문만 익혔고, 대신에 바느질이며, 요리하는 거며, 떡이나 술 만드는 것 등 양반 규수가 갖추어야 할 규수로서의 모습만 익히다 결혼을 했다고 한다.
곧 90세를 바라보지만 그래도 그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도 많은데 어느 시대 이야기인지 싶지만 엄한 외할아버지로 인해 그렇게 자랐다고 하니 이미 없는 외할아버지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누구에게 대신 따질 수도 없어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처녀시절 엄마 사진을 보면 곱게 한복을 입고 머리를 두 갈래, 혹은 하나로 땋은 모습을 한 사진뿐이어서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내가 갓난아기 때 돌아가셔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피부가 하얀 두 오빠와 달리 까만 피부에 눈은 왕방울만 하게 크고, 너무도 야윈 작은 아기가 너무 못생겼다고 엄마에게 내가 키울 테니 시가에는 태어나다 죽었다고 하라고 하여 엄마가 엄청 울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금껏 두 분이 살아있다면 한 번 따져보겠지만 아무리 못 생겼어도 손녀딸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싶지만 자라면서 조금씩 내 얼굴이 변했는지 ‘지 아버지가 의사라 아이 얼굴이 많이 바뀌었네. 수술을 한 건가?’ 하는 말을 시골 큰집에 갈 때마다 얼핏 얼핏 들은 걸 생각하면 정말 그랬겠다 싶기도 하다.
또 작은오빠랑 싸울 때면 ‘넌 안 태어나려다 태어난 거야’라고 놀리는 걸 보면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분위기에서 엄마가 자란 걸 생각하면 한 편 내게 대했던 엄마의 모습들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중학교 때는 어깨선이랑 몸동작의 선이 너무 예뻐서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싶다고 무용선생님이 우리 집엘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지만 엄마는 늘 단번에 거절을 했고, 친구들이 피아노를 배우기에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걸 배워 뭐에 쓰냐며 대학조차 보내지 않으려던 엄마를 기억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그랬다면 또 이해를 했겠지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환경인데 엄마는 내가 하고자 하던 것에 대해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단번에 거절을 하였다.
뒤늦게 대학에 가서 피아노에 대한 한을 풀고자 체르니 30번까지 배웠었는데 사실 그 후로 피아노를 치지도 않고 늦게 배운 탓에 말 그대로 쓸모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한은 풀었지 싶다.
얼마 전 집에 있던 아이들이 치던 피아노를 처분하며 이렇게 있는데도 치지 않으면서 그때는 왜 그렇게 아쉽고, 하지 못하게 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는지 모르겠다.
대학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도 엄마의 반대로 밀어주지 않아서 고등학교 성적을 잘 받아 특채로라도 가려고 혼자 몸부림치며 공부하여 겨우 대학에 붙고 나니 어쩔 수 없이 대학엘 보내준 엄마다. 과외까지는 아니어도 입시에 대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엄마는 그냥 여자는 시집가기 위해 모든 걸 배우고, 갖추어야 하지만 대학은 엄마의 그 계획에 없었던 듯하다.
한 번도 먼저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 하지 않았고, 늘 과거에 매여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면 그게 여자의 인생이라던 엄마, 그게 내가 기억하는 친정엄마다.
수년 전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어 그냥 놀러 왔다며 친정엘 간 적이 있다.
내가 선택한 결혼이어서 힘들다는 내색은 하지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갈 곳이 친정 밖에 없었나 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여전히 당신만의 생각으로 이런저런 불평을 하여서 엄마에게 심하게 막 퍼부은 적이 있다.
“그렇게 아쉬울 때마다 날 찾으면서 왜 한 번도 다른 집 딸처럼, 아니 오빠들처럼 뒷바라지를 안 해 주었냐고, 그때 내게도 오빠들만큼만 해 주었으면 지금 더 좋은 모습으로 엄마에게도 더 잘할 텐데 왜 그랬냐고” 따진 적이 있다.
아마도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지치다 보니 그게 다 엄마 탓이라 생각하여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혼할 때도 엄마 친구의 아들이 의사라는 직업 하나로 결혼을 밀어붙이려 한 엄마, 대학에서 교수 추천으로 대학원의 조교로 가면서 더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조건임에도 결혼하기로 했으면 결혼이나 하라고 해서 포기해야 했던 일, 정말 인생 가운데 성장하거나 좋은 기회가 왔을 때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찬성하고 밀어준 것이 없다.
그나마 작은오빠나 아빠가 힘이 되어줄 테니 하고 싶은 것 해 보라고 했지만 엄마의 반대로 늘 내가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 같아 최종에는 포기했었던 수많은 기회들에 대해 이 나이가 되었는데도 해 보지 않은 거라 그런지 늘 아쉽고, 억울한 마음이 한쪽에 남아있다.
이제 엄마도 지난날의 모습에 대해 많이 미안해하고, 차라리 딸을 하나 더 낳아 나에게 힘을 주었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말을 하면 난 우스갯소리로
“그나마 딸이 나 하나니 다행이지 둘이나 낳아 나에게처럼 그랬다면 엄마,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거야. 나 하나니 그냥 봐주지, 딸 하나 더 있었어봐” 라며 웃어넘긴다.
이제는 엄마가 무엇이 필요하다고 안 해도 알아서 이것저것 챙기며 늙어가는 엄마를 안쓰러워한다.
더구나 아버지가 없다 보니 혹여 기가 죽을까 봐 큰오빠와 같이 사는데 마음에 불편함이 있을까 봐 수시로 들락거리며 큰오빠와 올케에게도 더 잘하면서 엄마를 부탁한다.
당연히 오빠들이 더 잘하겠지만 딸이 바라보는 엄마는 또 다르기에 딸로서, 같은 여자로서 살피려 노력하는데 딸인 내가 엄마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보호자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 같아 내심 나 스스로 서운하기도 하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엄마를 탓할 것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한 번 시도해 보지 왜 그렇게 매번 수많은 기회들을 포기했는지 후회스럽다.
원래 사람들은 지나간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50이라는 나이 앞에서 내가 30대이면 이리 할 텐 데라고 후회하듯이 쓸모없는 후회이지만 그래도 늘 지나간 기회들이 아쉽기만 하다.
꼭 명문대를 나오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 기회가 많은 것은 사실이기에 그렇게 노력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안타까운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유난히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었던 시어머니와 시 작은 부모가 좋았던 것 같다.
어찌 되었던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은 늘 힘이 되고, 또 의지가 되기에 무얼 하던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고, 또 용기를 주기 때문에 실패를 하더라도 상처가 되기보다 높아진 자존감으로 스스로 잘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지만 아이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친정엄마가 된다.
그래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지금, 친정엄마가 내게 했던 과거의 아쉬운 기억들로 가득 차지 않길 바라서 아이들이 무엇을 한다 하면 반대는 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밀어는 주되 최선을 다하도록 책임감은 갖게 한다.
반대를 하기보다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최대한의 조언을 해 주고, 대신에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갖게 하지만 설사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책망은 하지 않는다. 부모인 우리가 있으니 걱정 말고 다시 하면 된다는 말로 또 도전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능력이 안 되더라도 무한 밀어줄 수 있으니 용기를 잃지 않도록 충분한 디딤돌이 되어주려고 한다.
그래서 난 우리 아이들이 엄마를 좋은 후원자이면서 영원히 같은 편으로 아이들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같은 여자로서 어리던, 나이가 많던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엄마이길 바란다. 먼 훗날 아이들이 엄마를 기억할 때 슬프고, 아팠던 기억들이 아니라 설사 아이들의 곁에 없더라도 기억되는 그 날들은 웃음부터 나고, 즐거웠던 시간들이 먼저 떠오를 수 있었으면 한다.
친정아버지가 지금 내 곁에 없어 그리움만 가득하더라도 늘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 바쁜 중에도 함께 낚시하러 다니고, 자전거 앞에 태워 휘파람 불며 강둑길을 달렸던 일, 잘하지도 못하면서 남자인 오빠들과만 노느라 인형놀이 대신 구슬치기부터 배웠던 딸에게 공기놀이를 가르쳐 주겠다며 손을 이리저리 꼬던 아버지의 모습은 오래오래 내 기억 속에 즐거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 병상에서 통증으로 암 투병하던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어서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돌아가시는 순간 보여준 환한 미소로 덧칠이 되어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모습은 온통 예쁘고, 좋은 모습만 남아있다.
시가의 어른들이 많고, 장손 맏며느리이다 보니 직장이 없던 내가 혼자 운전을 하여 시골 시할아버지 집에 음식을 해서 4시간 이상이 걸리던 곳을 새벽부터 다니던 엄마의 모습이 안 좋았는지 큰아이는 운전을 안 배우겠다고 하였다.
‘엄마가 운전을 하니 그렇게 맨날 여기저기 다니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자기는 운전을 안 배울 거라 ‘는 말을 자주 해서 내심 그런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유야 어찌 되었던 외국에서 지내게 되면서 뒤늦게 운전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반 농담 삼아 ’ 자기는 자기만을 위해 꼭 필요할 때만 운전을 할 거라 ‘고 해서 되도록이면 즐겁고, 행복했던 엄마의 모습만 더 많이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다.
친정엄마라는 이름은 딸들에겐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이다.
특히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보면 친정엄마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여, ‘너도 자식 낳아 길러봐라. 그럼 내 마음을 알 테니’라는 말은 친정엄마들의 고정 멘트가 된 것처럼 대부분의 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가장 먼저 친정엄마가 떠오르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게 된다고 한다.
반면 친정엄마라는 말만 들으면 다른 감정으로 슬프고, 상처가 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처럼 상처라기보다는 아쉬움과 미련이 더 많아서일 수도 있고, 아님 일찍 죽거나 오랜 시간 병중에 있어서 그 이름만 들어도 안타깝거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또는 어려운 시가살이로 친정에 잘하지 못해서 늘 그리워하는 부모로 인해 여러 가지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딸에게 친정엄마는 그리움의 대상이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연약해지는 모습에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이 먼저 드는 아픈 새끼손가락 같은 존재다. 어릴 적 엄마들이 자식들을 향해 가졌던 마음처럼.
부모를 떠나 산 지 30여 년이 훌쩍 넘어버린 시간, 이제는 원망도 후회도 없지만 친정엄마를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엄마의 마음도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병원일이 많고, 힘들어서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없어서 오빠 둘만 낳고 그만 낳으려 했는데 어쩌다 생긴 날 낳으면서 아마도 맘 적으로 더 힘들었을 것 같다.
두 아이도 남의 손에 키우며 제대로 못 돌봐 주는데 또 하나가 생겼으니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면 먼저 딸을 찾아 하소연하는 엄마를 보며 그렇게 아들을 위해 살았고, 또 늘 아들 곁에 있는데도 정작 마음으로 의지가 되는 것은 딸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걸 보면 친정엄마와 딸은 서로를 애틋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가장 만만한 상대인 것 같다. 걱정되고, 속상함에도 불구하고, 타박하는 말투로 서로를 응대하고, 잘 먹고, 잘 지내라는 말도 예쁘게 하지 않고, 꼭 면박을 주듯이 던지는 말투지만 서로는 아마 알 것이다. 딸과 엄마들만이 할 수 있는 멘트라는 것을.
오늘도 딸들은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한다.
언제까지 살던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살다, 하루도 아프지 말고 잠을 자듯 편안하게 아버지 곁으로 가길.
아버지의 투병을 힘들게 지켜봤기에 엄마는 부디 마지막까지 평안하시길!
그렇게 친정엄마에 대한 간절함만 남아있는 곳이 이제 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