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리포트

친정

by 바비줌마


여자들에게 특히 결혼한 여자들에게 친정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참 어려운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결혼 전까지는 '친정'이라는 말이 나하고는 무관한 남의 세계라고 생각했었는데 결혼과 동시에 피부로 느끼듯이 확 다가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친정은 딸의 허물이나 아픔 등의 모든 걸 덮어주고, 늘 하소연을 들어주고 그로 인해 딸이 위로를 받고, 무언가를 챙겨 오고, 맘껏 투정을 부리는 곳으로 나오지만 친정을 그런 곳이라 여기며 사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도 결혼 후다.

친정이 어느 사람에게는 안식처로, 또 어느 사람에게는 아픔으로, 그리움으로, 가깝고도 먼 나라로 인식이 되는 건 아마도 그 사람의 형편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시가의 모든 형편을 세밀하게 얼마 전에 산 그릇까지 다 아는 친정식구들이 있다면 딸이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가볍게 언제라도 즐겁게 들릴 수 있는 카페 같은 곳일 것이고, 어떤 경우에라도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가끔이라도 가서 맘껏 쉬다 올 수 있는 안식처 같은 곳일 것이다. 반면 어려운 형편이어서 결혼한 딸이 늘 보살펴야 하는 경우라면 친정이라도 어쩌면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상처일 것이다.
또한 가까이는 살지만 시가에서 눈치를 주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가까워도 갈 수 없는 말 그대로 가깝고도 먼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게도 친정은 늘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이제껏 늘 조심스러운 곳이었다.
달려가고 싶을 때도 맘먹은 대로 갈 수 없었고, 힘들 때 하소연도 할 수 없었고, 도리어 내가 섬기고 베풀어야 하는 대상이 된 것이 결혼과 동시에 내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 친정은 모든 걸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뭘 달라던, 누굴 흉보던, 원망하던, 울던, 뭘 하던 눈치 볼 것도, 누굴 배려할 것도 없는 나만의 무법지대였는데 결혼을 하면서 친정은 가장 조심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중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신앙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엄마와 둘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그렇지 않아도 다소 보수적인 집안인데 두 오빠들이 나와 같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아서 결혼 전에도 교회에 다니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트집들이 많았다. 그런데 믿는 집안에 남편의 신앙을 보고 결혼을 하였기에 결혼 후에는 그 어떤 일로도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아서 늘 조심을 하다 보니 어느새 삶 전체에서 가장 조심하고 배려해야 하는 곳이 친정이 되었다.
"신앙이 좋다며? 믿는 사람들 다 그렇지 뭐가 다르냐?"는 식의 말을 들을까 봐 늘 시가의 좋은 모습들만 노출시키고 혹여 조금이라도 책이 잡힐 만한 것들은 힘들더라도 혼자 삭히거나 아니면 차라리 시가 식구들에게 하소연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독였다.
남편과 시가의 신앙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고 추진했기에 다른 것도 아닌 신앙 있는 사람들이 어떤 불미스러운 일에 빌미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고 언젠가는 내 사는 모습을 통해 같은 신앙을 갖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최근 코로나가 여러 교회를 통해 전파되는 사례를 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나 역시 무척이나 안타깝다.
그로 인해 교회에 모이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마치 교회에 모이면 무조건 전염이 된다는 식의 보도를 보면 화도 난다.
물론 꼭 교회에 모여서 드려야만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예배는 정말 중요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해하고 정부의 요청에 따라야 하는 것이 그것이 나와 믿는 우리가 아닌,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에 모이기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교회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데 마치 교회가 핍박을 받는 것처럼 순교를 하겠다는 말까지 하며 방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사실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몇몇 교회들의 개인적인 행동들로 다소 모든 교회들이 지탄을 받기도 하고, 제재를 받기도 하는데 어쨌든 그런 빌미를 준 것이 교회라는 생각에 참 안타깝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는 모두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이단인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에 관심도 없고, 제대로 세워진 교회인지 아니면 개인이 세우고 하나님이 아닌 마치 자신이 신이 된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로 세워진 곳들도 많기에 이런 때일수록 더욱 말이며, 행동이며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교회라는 곳이 모두 동일한 곳이 아님에도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비슷한 지역의 어느 교회가, 어느 목사가, 어느 장로가 어땠더라는 뉴스만 나오면 오빠에게서 전화가 온다.

"너네 교회 아니냐?"라고.
이제는 아버지의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해서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그런 전화는 오빠들이 하지 않는다.

또 하나 내가 선택한 사람과의 결혼인 만큼 책임을 다하고 싶었던 것도 친정이 조심스러운 대상이 되는데 한 조건이 되었다.
"네가 좋다고 결혼을 하고선 이제 와서 뭐가 힘드냐? 그러게 너에게 장손의 맏며느리가 말이 되냐?" 등등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남편과 같이 안 살 거라면 몰라도 잠깐의 힘듦으로 인해 서로에게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이다.
누구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시가에서도 아들인 남편이 우선이듯이 친정에서는 당연히 딸이 우선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평소에 들었던 사소한 이야깃거리에도 감정이 앞서고, 서운한 맘에 말이 앞서다 보면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건 순간이기에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시가나 남편의 흉을 친정에서 본 적이 없다.
그건 내 자존심이기도 하지만 결혼생활에서 지켜야 할 양가 집안의 규칙이라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정에서는 사위에게 잘해야 시가에서 좋아할 것이고, 시가에서는 며느리인 딸에게 잘해야 친정에서 좋아하는 건 당연하다.

결혼하고 몇 년 지나서일 것이다.
친구가 친정부모를 방문하면서 '내가 잘 살고 있냐, 아픈 데는 없냐'라고 물었더니 친정 큰 올케가

"우리 아가씨가 어떤 아가씨인데요? 어렵거나 힘들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아마 앞으로도 절대로 안 할 걸요"라고 대답하더라며 친구가 전화를 준 적이 있다.
그 말을 되씹으며 '그 말속에 아무 일도 없다는 내 모든 말을 그대로 다 믿지는 않는다는 뉘앙스'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나 반면 '그 말을 그대로 다 믿어주고 싶다'는 의미 또한 전달이 되어서 감사했다.
이렇듯 결혼은 양가 서로의 신뢰로 이어진다고 본다.
본인들과 상관없이 시가와 친정의 감정으로 인해 헤어지는 사례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시가도, 친정도, 그리고 결혼한 당사자들도 자기의 선택을 책임지고, 또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다하는 순간 시가도, 친정도 서로의 흉을 보기보다는 서로를 품어주기에 더 좋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친정이 사실 차로 이동하면 시가와 30분 정도의 거리여서 잠깐 일이 있어 들린 김에 어머니가 준 기름과 고춧가루를 가져온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시어머니가 화를 내었다.
"넌 염치도 좋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들고 오노? 그렇게 바리바리 싸오고 또 싸올 게 아직도 남았드노?"라고 하는데 이 말이 진심인지, 친정에서 물건을 들고 온 게 화를 낼 일인가 싶어 어찌할지 몰라 당황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시가에서는 뭔가 생기기만 하면 나한테 묻지도 않고 친정으로 보내서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도 있었기에 '어머니도 보내는데 친정에서도 매번 받을 수만은 없는 거 같아서 주는 것 같다'라고 했더니 '당신은 산 게 아니라 시골에서 농사지은 거고, 어디서 생긴 것이 많아서 나눠 먹는 거고, 친정에서는 사서 주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말은 맞지만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친정으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친정에서 가져오는데 화를 낸다면 그걸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시어머니는 그랬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친정엄마가 뭘 싸줘도 가져가면 혼난다고 말하며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고, 매번 보내주는 걸 친정에서 받으며 한 번은 큰오빠가 '얘는 시집을 잘 간 거 같아.'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다는 이야기를 올케에게서 들었다.

나 역시 결혼한 이후 명절에 한 번도 친정에 간 적이 없다.
물론 명절인데 부모와 함께 할 형제가 없다면 어떻게든 갔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자리는 시부모가 없는 시가에서 대신 부모가 되어주어야 하는 맏며느리 자리이기에 뭘 하던, 안 하던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가끔은 갈 수 있는 여건이 생겨도 굳이 가지 않았다. 그건 갈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욕심이 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그런 일들로 서로 불편해질까 봐 아예 명절에는 시간의 여유가 생겨도 무조건 시가에 있고, 다른 평일이나 생일에 찾아가는 걸로 스스로 결정을 했다. 누가 시켜서도 요구해서도 아니라 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 이후에는 이제껏 그걸 지켜왔다.
그리고 친정에 갈 일이 생기면 늘 당당히 갔다. 내가 할 역할들을 충실히 했기에 당당히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친정아버지가 병원에 있을 때도 시부모의 병상을 잘 지키었기에 당당히 모든 여건을 다해 섬길 수 있었던 것이고, 남편 역시 최선을 다해 도왔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친정이나 시가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대상이 되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한 가정에 아이를 하나, 둘 낳는 상황이 되어 아들이기 때문에, 딸이기 때문에 보살펴야 하고 보살피지 않아도 되는 시대는 지났다는 말이다. 이제는 양쪽이 다 같이 서로를 챙기고, 서로를 돌보아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고, 위로처가 되고, 힘이 되는 대상이면 좋겠다.
여전히 방송이나 주변에서는 명절에 친정에 가느냐, 마느냐, 친정부모도 섬겨야 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는데 그건 내 또래 우리 시대의 일인 것 같다.
이제는 친정이라서 시가라서가 아니라 '어느 쪽의 형편이 어때서'라는 게 가장 큰 의미가 될 것 같다.

이전에 어느 강의에서 우리나라의 남자들에게서 가장 고쳐야 하는 잘못된 것의 3가지가 '외도와 술 문화, 그리고 폭언'이라고 들었다. '그것이 오래전 과거의 습관에서 여전히 이어지는데 다른 건 몰라도 이 세 가지는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는 말에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가와 처가에 대한 생각도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했던 것을 그대로 아이들에게 고집하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형편에 따라 그리고 그 집안의 상황에 맞게 변화되고, 새롭게 구축되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내게 친정은 안타까움이고 조심스러운 대상이다.
이제 친정아버지도 없고, 홀로 있는 엄마와 여전히 같은 신앙을 갖지 못해 오빠들과는 문화적인 갈등이 있지만 그래도 그런 상황이 있을지라도 '친정'이라는 존재만으로도 늘 든든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어린아이에게 어머니의 품 속처럼 결혼한 여자들에게 친정은 아마도 그런 곳일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도 친정과 시가라는 곳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바람도 막아주고, 아늑하게 쉴 수 있는 마치 아이에게 엄마의 품 속 같은 곳으로 여기며 살길 소망해 본다.




'친정'이라는 말에는 대부분 친정엄마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친정엄마가 있는 곳이 '친정'이라는 의미로 부각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내게 친정은 엄마보다 아버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엄마’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면서 가장 먼저 익히는 말이 대부분 ‘엄마’라는 말일 것이다. 그것에서 ‘맘마’라는 단어를 익히게 되고 또 그런 말들이 아마도 아이들에게는 세상의 전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기본 욕구는 먹는 것부터일 텐데 그걸 제공해 주고, 또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옆에서 지켜주고, 보호해 주기 때문에 아이들은 울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면 늘 “엄마”라고 부르며 우는 것 같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넘어지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혹은 기쁘거나 슬픈 일을 당할 때도 무의식 중에 나오는 말이 바로 ‘엄마’라는 말인 것 같다.

그러다 딸이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엄마는 결혼하기 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듯 친정의 중심이 되며 친정엄마로, 새롭게 시작하는 딸의 보호자로, 대변인으로서의 역할을 다시 또 하게 되는 것 같다.

도움이 필요할 때도 친정엄마를 찾고,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도 역시 친정엄마이기에 딸에게 친정엄마는 어려서부터 결혼 후 친정엄마가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존재인 듯하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조금은 다를 수 있는데 내 경우가 그런 것 같다.


어렸을 때의 친정은 병원과 집이 함께 있던 구조였다.

친정아버지가 산부인과 의사였는데 큰길에 있는 쪽은 병원이었고, 반대편의 안쪽은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이었다. 그래서 늘 뒤쪽으로 돌아서 다녔고, 주로 내가 그랬지만 가끔 급하거나 돌아가려면 멀기에 바로 질러가기 위해 병원을 통과해서 갈 때는 조용하게 다녀야 해서 뒤꿈치를 들고 다녔다.

산부인과여서 늘 산모와 아기가 집에 있었고, 병원과 안채 사이에 있는 방에 여러 명의 산모와 아기들이 자고 있어서 큰소리로 다니면 혼났기에 늘 병원을 가로질러갈 때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다녔다.

그런 구조를 갖고 있다 보니 친정아버지를 도와 엄마는 간호사가 아님에도 늘 병원일로 바빴다. 집안일은 다른 사람이 하고, 아무래도 병원일은 조심스러워서 그런지 간호사가 있음에도 엄마의 역할은 정말 많아서 어린 눈에도 엄마가 편히 쉬는 것을 잘 보지 못했다.

하루 24시간 미역국이 끓고 있고, 지금처럼 일회용 기저귀가 없던 시기라 병원에 있는 동안은 그것까지 엄마가 삶아서 대주어야 하고, 병원의 기구들도 늘 소독을 해야 해서 다른 집보다 우리 집은 유난히 더 더웠고, 미역국 이 끓는 냄새로 음식 냄새가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유난히 미역국을 싫어했는데 식성도 다시 돌아가는지 지금은 또 미역국을 좋아한다.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있어서 아직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을 때도 난 일하는 할머니나 친할머니의 손에서 컸고, 간혹 칭얼거리면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하얀 가운을 입은 아버지의 등에 업혀있는 것이 그나마 부모에게서 받는 호강이라면 호강이었다.


우리 집은 산부인과 병원이었는데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우리를 부를 때 병원 집 딸, 아들이라고 불렀고, 엄마는 병원장 부인이라 늘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호칭과 무관하게 원래 병원을 하는 집은 가난한 줄 알았다.

산부인과라는 게 이전에는 조산원, 산파와 별 차이가 없던 시기였는데 그나마 순산이 어려운 산모들이 갑자기 병원으로 어쩔 수 없이 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병원 문 앞에 달려있는 비상벨은 밤만 되면 요란스럽게 울어대서 한밤중인데도 늘 한 번씩은 깨었다가 다시 잠들곤 하였다.

그렇게 오밤중이나 새벽에 갑자기 병원까지 와야 되는 사람들 역시 넉넉하지 못하다 보니 그들이 병원비로 내는 것은 현금이 아닌 농사지은 것들이라 마당 건너편에 있는 창고에는 사시사철 먹거리가 가득했다.

그것도 요즘처럼 쇼핑백이나 비닐봉지에 담겨오는 것이 아니라 세숫대야나 망태기에 담겨서 캐거나 딴 그대로 흙과 함께 담겨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늘 아버지는 미안하고, 염치없어하는 보호자들을 돌려보내고, 그런 모습을 늘 뒤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엄마의 한숨소리도 내 귀에는 늘 들렸다.

그런 이유들로 어린 시절을 엄마가 아닌 일하는 사람 손이나 친할머니와 함께 지내서인지 지금도 난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결혼 후에도 시할아버지, 시할머니가 좋았고,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와 같은 방을 썼던 할머니의 보살핌을 잊지 않고 있다.

반면 할머니와 늘 살아서 그런지 엄마에 대한 기억도 없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인한 애틋함도 내겐 없는 듯하다.

지난봄에 아버지의 추모일이어서 친정가족들이 함께 모였을 때 무슨 말 끝에 그런 말을 엄마에게 한 적이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렇게 많은데 엄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며 왜 내가 하는 것은 그렇게 다 반대를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지나가는 말처럼 했지만 분명 서운함도 포함되었다.

그것에 대해 엄마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도 엄마는 오직 장남인 큰오빠만을 생각하는 것이 보인다.

가장 어려운 형편이기도 하고, 첫째라고 너무 감싸 안아 키운 탓에 늘 자립심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전히 엄마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뭔가 사고 싶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내게 전화를 하지만 반대로 뭐라도 생기면 큰오빠만 생각을 한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 엄마의 그런 맘을 충분히 이해를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로서 엄마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없다는 것이 늘 아쉽다.

오빠들과 터울이 있어 뒤늦게 낳은 딸이 아버지는 그저 예쁘고 함께해 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던지 환자만 없으면 나와 놀아주고, 재워주고 해서 아버지와는 많은 기억을 가진 반면에 엄마와는 무엇 하나 같이 해 본 기억이 없다.

다 커서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딸이기에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명절 음식이나, 바느질, 김장 같은 것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지 학교 수업과 상관없이 일을 시키지는 않지만 늘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곁에 앉혀놓고 하나하나 설명을 하며 가르치려 하였는데 그것도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다.

학교에 다니는 사람에게 수업이 더 중요한 것이라 대부분 학교에 결석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부모들의 마음일 텐데 엄마는 그것보다 김장이나 명절에 먹을 음식들이 더 중했던 듯하다.


사실 엄마는 학교엘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말로는 좀 우습지만 99칸 귀한 양반집의 딸이어서 서당훈장이 집으로 와서 가르쳤기에 한문과 언문만 익혔고, 대신에 바느질이며, 요리하는 거며, 떡이나 술 만드는 것 등 양반 규수가 갖추어야 할 규수로서의 모습만 익히다 결혼을 했다고 한다.

곧 90세를 바라보지만 그래도 그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도 많은데 어느 시대 이야기인지 싶지만 엄한 외할아버지로 인해 그렇게 자랐다고 하니 이미 없는 외할아버지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누구에게 대신 따질 수도 없어 사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래서 처녀시절 엄마 사진을 보면 곱게 한복을 입고 머리를 두 갈래, 혹은 하나로 땋은 모습을 한 사진뿐이어서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내가 갓난아기 때 돌아가셔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피부가 하얀 두 오빠와 달리 까만 피부에 눈은 왕방울만 하게 크고, 너무도 야윈 작은 아기가 너무 못생겼다고 엄마에게 내가 키울 테니 시가에는 태어나다 죽었다고 하라고 하여 엄마가 엄청 울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금껏 두 분이 살아있다면 한 번 따져보겠지만 아무리 못 생겼어도 손녀딸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싶지만 자라면서 조금씩 내 얼굴이 변했는지 ‘지 아버지가 의사라 아이 얼굴이 많이 바뀌었네. 수술을 한 건가?’ 하는 말을 시골 큰집에 갈 때마다 얼핏 얼핏 들은 걸 생각하면 정말 그랬겠다 싶기도 하다.

또 작은오빠랑 싸울 때면 ‘넌 안 태어나려다 태어난 거야’라고 놀리는 걸 보면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분위기에서 엄마가 자란 걸 생각하면 한 편 내게 대했던 엄마의 모습들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할머니 손에서 커서 그런지 유난히 잡기에 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와 늘 함께 있다 보니 듣는 것이 할머니 위주로 틀어놓은 전축에서 들리는 배뱅이굿과 민요가 전무였다. 그것을 나도 모르게 익히게 되고, 곧잘 따라 하여 할머니 따라 어디 마실이라도 가게 되면 완전 내 세상이었다. 꽃타령을 비롯하여 새타령, 창부타령, 매화타령 등 웬만한 민요는 줄줄이 읊고 있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앞에서의 재롱잔치로 무척이나 사랑을 받았었다.

아직도 난 그때 불렀던 타령들을 대부분 외우고 있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어디 봉사라도 가면 여전히 한, 두 곡의 타령으로 노인정의 어르신들을 즐겁게 한 기억이 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공부는 그리 잘한 것 같지 않은데 무용선생님이 무용을 시키고 싶다고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것도 그렇고, 글씨를 잘 써서 내가 쓴 노트는 늘 전시가 되어 많은 아이들에게 본을 보였고, 학교 환경정리 역시 글씨를 잘 쓰고, 남의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도 잘해서 만화의 여주인공을 그대로 그려내는 나를 친구들이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재봉틀 없이 손으로 웬만한 것은 다 수선하고, 수선뿐만 아니라 유행이 지나거나 혹은 작아진 옷은 바로 버리지 않고 일단 리폼을 하여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손으로 하여 주변에서 가끔은 놀라기도 한다.

우연히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에 미용을 배우려고 하였는데 재료만 전부 구입한 후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그대로 주저앉았는데 기초만 배운 걸 가지고 내 머리를 자르며 익혀서 사실 미용실은 언제 갔는지 기억이 없다. 그 후로는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염색을 하고, 펌을 하고 있다.

블로그를 운영하며 여행사진을 찍다 보니 프로들처럼 잘 찍지는 못하지만 그런 훈련들로 다른 곳에서 일을 할 때는 어떤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알게 되어 가끔 프리랜서로 일을 하게 되면 어느 정도는 합격점에 이르는 것 같다.

여전히 어떤 ‘끼’와 ‘능력’이 내 안에 있는지 몰라 노력하는 타입이다. 나이가 들다 보니 다소 웅크려지는 점도 있지만 그래도 기회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한다.

또 다른 ‘끼’와 ‘재능’을 찾아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내일을 위해!


중학교 때는 어깨선이랑 몸동작의 선이 너무 예뻐서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싶다고 무용선생님이 우리 집엘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지만 엄마는 늘 단번에 거절을 했고, 친구들이 피아노를 배우기에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걸 배워 뭐에 쓰냐며 대학조차 보내지 않으려던 엄마를 기억한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그랬다면 또 이해를 했겠지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환경인데 엄마는 내가 하고자 하던 것에 대해 고민조차 하지 않고 단번에 거절을 하였다.

뒤늦게 대학에 가서 피아노에 대한 한을 풀고자 체르니 30번까지 배웠었는데 사실 그 후로 피아노를 치지도 않고 늦게 배운 탓에 말 그대로 쓸모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혼자만의 한은 풀었지 싶다.

얼마 전 집에 있던 아이들이 치던 피아노를 처분하며 이렇게 있는데도 치지 않으면서 그때는 왜 그렇게 아쉽고, 하지 못하게 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는지 모르겠다.

대학에 진학한다고 했을 때도 엄마의 반대로 밀어주지 않아서 고등학교 성적을 잘 받아 특채로라도 가려고 혼자 몸부림치며 공부하여 겨우 대학에 붙고 나니 어쩔 수 없이 대학엘 보내준 엄마다. 과외까지는 아니어도 입시에 대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엄마는 그냥 여자는 시집가기 위해 모든 걸 배우고, 갖추어야 하지만 대학은 엄마의 그 계획에 없었던 듯하다.

한 번도 먼저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 하지 않았고, 늘 과거에 매여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면 그게 여자의 인생이라던 엄마, 그게 내가 기억하는 친정엄마다.

수년 전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어 그냥 놀러 왔다며 친정엘 간 적이 있다.

내가 선택한 결혼이어서 힘들다는 내색은 하지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갈 곳이 친정 밖에 없었나 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여전히 당신만의 생각으로 이런저런 불평을 하여서 엄마에게 심하게 막 퍼부은 적이 있다.

“그렇게 아쉬울 때마다 날 찾으면서 왜 한 번도 다른 집 딸처럼, 아니 오빠들처럼 뒷바라지를 안 해 주었냐고, 그때 내게도 오빠들만큼만 해 주었으면 지금 더 좋은 모습으로 엄마에게도 더 잘할 텐데 왜 그랬냐고” 따진 적이 있다.

아마도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지치다 보니 그게 다 엄마 탓이라 생각하여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혼할 때도 엄마 친구의 아들이 의사라는 직업 하나로 결혼을 밀어붙이려 한 엄마, 대학에서 교수 추천으로 대학원의 조교로 가면서 더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조건임에도 결혼하기로 했으면 결혼이나 하라고 해서 포기해야 했던 일, 정말 인생 가운데 성장하거나 좋은 기회가 왔을 때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찬성하고 밀어준 것이 없다.

그나마 작은오빠나 아빠가 힘이 되어줄 테니 하고 싶은 것 해 보라고 했지만 엄마의 반대로 늘 내가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 같아 최종에는 포기했었던 수많은 기회들에 대해 이 나이가 되었는데도 해 보지 않은 거라 그런지 늘 아쉽고, 억울한 마음이 한쪽에 남아있다.


이제 엄마도 지난날의 모습에 대해 많이 미안해하고, 차라리 딸을 하나 더 낳아 나에게 힘을 주었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말을 하면 난 우스갯소리로

“그나마 딸이 나 하나니 다행이지 둘이나 낳아 나에게처럼 그랬다면 엄마,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거야. 나 하나니 그냥 봐주지, 딸 하나 더 있었어봐” 라며 웃어넘긴다.

이제는 엄마가 무엇이 필요하다고 안 해도 알아서 이것저것 챙기며 늙어가는 엄마를 안쓰러워한다.

더구나 아버지가 없다 보니 혹여 기가 죽을까 봐 큰오빠와 같이 사는데 마음에 불편함이 있을까 봐 수시로 들락거리며 큰오빠와 올케에게도 더 잘하면서 엄마를 부탁한다.

당연히 오빠들이 더 잘하겠지만 딸이 바라보는 엄마는 또 다르기에 딸로서, 같은 여자로서 살피려 노력하는데 딸인 내가 엄마에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보호자로서의 역할만 하는 것 같아 내심 나 스스로 서운하기도 하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엄마를 탓할 것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한 번 시도해 보지 왜 그렇게 매번 수많은 기회들을 포기했는지 후회스럽다.

원래 사람들은 지나간 일에 대해서 후회를 하고, 50이라는 나이 앞에서 내가 30대이면 이리 할 텐 데라고 후회하듯이 쓸모없는 후회이지만 그래도 늘 지나간 기회들이 아쉽기만 하다.

꼭 명문대를 나오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 기회가 많은 것은 사실이기에 그렇게 노력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안타까운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유난히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었던 시어머니와 시 작은 부모가 좋았던 것 같다.

어찌 되었던 내 편을 들어주는 것은 늘 힘이 되고, 또 의지가 되기에 무얼 하던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고, 또 용기를 주기 때문에 실패를 하더라도 상처가 되기보다 높아진 자존감으로 스스로 잘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지만 아이들이 결혼을 하게 되면 친정엄마가 된다.

그래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지금, 친정엄마가 내게 했던 과거의 아쉬운 기억들로 가득 차지 않길 바라서 아이들이 무엇을 한다 하면 반대는 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무조건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밀어는 주되 최선을 다하도록 책임감은 갖게 한다.

반대를 하기보다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최대한의 조언을 해 주고, 대신에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갖게 하지만 설사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책망은 하지 않는다. 부모인 우리가 있으니 걱정 말고 다시 하면 된다는 말로 또 도전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능력이 안 되더라도 무한 밀어줄 수 있으니 용기를 잃지 않도록 충분한 디딤돌이 되어주려고 한다.

그래서 난 우리 아이들이 엄마를 좋은 후원자이면서 영원히 같은 편으로 아이들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한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같은 여자로서 어리던, 나이가 많던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엄마이길 바란다. 먼 훗날 아이들이 엄마를 기억할 때 슬프고, 아팠던 기억들이 아니라 설사 아이들의 곁에 없더라도 기억되는 그 날들은 웃음부터 나고, 즐거웠던 시간들이 먼저 떠오를 수 있었으면 한다.


친정아버지가 지금 내 곁에 없어 그리움만 가득하더라도 늘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 바쁜 중에도 함께 낚시하러 다니고, 자전거 앞에 태워 휘파람 불며 강둑길을 달렸던 일, 잘하지도 못하면서 남자인 오빠들과만 노느라 인형놀이 대신 구슬치기부터 배웠던 딸에게 공기놀이를 가르쳐 주겠다며 손을 이리저리 꼬던 아버지의 모습은 오래오래 내 기억 속에 즐거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 병상에서 통증으로 암 투병하던 모습이 마지막 모습이어서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돌아가시는 순간 보여준 환한 미소로 덧칠이 되어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모습은 온통 예쁘고, 좋은 모습만 남아있다.


시가의 어른들이 많고, 장손 맏며느리이다 보니 직장이 없던 내가 혼자 운전을 하여 시골 시할아버지 집에 음식을 해서 4시간 이상이 걸리던 곳을 새벽부터 다니던 엄마의 모습이 안 좋았는지 큰아이는 운전을 안 배우겠다고 하였다.

‘엄마가 운전을 하니 그렇게 맨날 여기저기 다니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자기는 운전을 안 배울 거라 ‘는 말을 자주 해서 내심 그런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이유야 어찌 되었던 외국에서 지내게 되면서 뒤늦게 운전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반 농담 삼아 ’ 자기는 자기만을 위해 꼭 필요할 때만 운전을 할 거라 ‘고 해서 되도록이면 즐겁고, 행복했던 엄마의 모습만 더 많이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다.


친정엄마라는 이름은 딸들에겐 부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이다.

특히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보면 친정엄마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여, ‘너도 자식 낳아 길러봐라. 그럼 내 마음을 알 테니’라는 말은 친정엄마들의 고정 멘트가 된 것처럼 대부분의 딸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가장 먼저 친정엄마가 떠오르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게 된다고 한다.

반면 친정엄마라는 말만 들으면 다른 감정으로 슬프고, 상처가 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처럼 상처라기보다는 아쉬움과 미련이 더 많아서일 수도 있고, 아님 일찍 죽거나 오랜 시간 병중에 있어서 그 이름만 들어도 안타깝거나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또는 어려운 시가살이로 친정에 잘하지 못해서 늘 그리워하는 부모로 인해 여러 가지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딸에게 친정엄마는 그리움의 대상이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연약해지는 모습에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이 먼저 드는 아픈 새끼손가락 같은 존재다. 어릴 적 엄마들이 자식들을 향해 가졌던 마음처럼.


부모를 떠나 산 지 30여 년이 훌쩍 넘어버린 시간, 이제는 원망도 후회도 없지만 친정엄마를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것은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엄마의 마음도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병원일이 많고, 힘들어서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없어서 오빠 둘만 낳고 그만 낳으려 했는데 어쩌다 생긴 날 낳으면서 아마도 맘 적으로 더 힘들었을 것 같다.

두 아이도 남의 손에 키우며 제대로 못 돌봐 주는데 또 하나가 생겼으니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힘들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면 먼저 딸을 찾아 하소연하는 엄마를 보며 그렇게 아들을 위해 살았고, 또 늘 아들 곁에 있는데도 정작 마음으로 의지가 되는 것은 딸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걸 보면 친정엄마와 딸은 서로를 애틋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가장 만만한 상대인 것 같다. 걱정되고, 속상함에도 불구하고, 타박하는 말투로 서로를 응대하고, 잘 먹고, 잘 지내라는 말도 예쁘게 하지 않고, 꼭 면박을 주듯이 던지는 말투지만 서로는 아마 알 것이다. 딸과 엄마들만이 할 수 있는 멘트라는 것을.

오늘도 딸들은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한다.

언제까지 살던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살다, 하루도 아프지 말고 잠을 자듯 편안하게 아버지 곁으로 가길.

아버지의 투병을 힘들게 지켜봤기에 엄마는 부디 마지막까지 평안하시길!

그렇게 친정엄마에 대한 간절함만 남아있는 곳이 이제 친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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