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사람들도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죽음이라는 건 어느 순간이든 충격이고, 가슴 한편이 무너지는 아픔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현실이다.
내게 시어머니의 죽음이 그랬고, 친정아버지의 죽음이 그랬다.
결혼해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죽음을 보았고, 많은 장례를 치렀다.
결혼하던 해에 55세로 시아버지가 돌아가셨고, 5년 뒤 55세라는 역시 젊은 나이인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고, 다시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그리고 친정아버지까지 참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냈는데 유난히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를 보낼 때는 꽤 힘이 들었다.
시가의 본가는 결혼 전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이었다.
그래서인지 시어머니는 유난히 시가의 집에 대한 애착이 많아 주방가구며, 붙박이 하나까지도 아주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구입하고 설치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시어머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로 오는 일정이 많아졌는데 그 틈을 타고 좀도둑이 드나들었다. 유난히 큰 집인데 며칠씩 불이 꺼져 있는 것에 좀도둑이 눈독을 들였는지 두 번이나 마주칠 정도로 도둑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런 일이 생기자 우리도 시어머니도 걱정도 되고, 염려도 되어 집을 팔고 합치는 걸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팔려고 내놓자마자 하필 내놓은 당일에 산다는 사람이 나오면서 시어머니는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하루도 안 되어 임자가 나올 정도로 모두가 탐을 내는 아까운 집이라는 생각에 다시 팔려는 마음을 접었다.
"봐라, 이 집이 얼마나 좋은지 내놓자마자 산다고 하지 않냐?"
하면서 팔기를 주저하고, 다시 좀도둑이 드나들다 맞닥뜨려서 위협하는 칼에 손을 베이고 나서야 결심을 했는데도 하루에 수도 없이 마음이 바뀌었다.
오늘은 판다 했다가 내일은 안 판다 했다가 결국 우리의 긴 설득으로 팔기로 마음을 굳히고 산다는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제야 우리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너무 몰라주었다는 생각에 자책을 했다. 비록 새로 지은 집이었지만 그전부터 그곳은 시아버지와 세 아들과의 수 십 년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곳이고 새로 지으면서 시아버지의 세밀한 손길이 남아있는 곳인데 그걸 그렇게 팔자고 보채는 바람에 표현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다가 결국 혈압이 터져서 혼자 있다가 어떤 처치도 받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얼마나 서운하고 아쉬웠을까를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무너졌었다.
말로 하지 않으면 헤아리지 못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지만 이리도 시어머니의 마음을 몰랐을까 싶어서 서럽게 정말 서럽게 울었었다.
그 집은 결국 사려던 사람이 사면서 시어머니를 언니라 부르며 집을 너무 아꼈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좀 찜찜하기는 하지만 그냥 사기로 했다고 하였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비가 유난히도 많이 오던 날이었는데 집의 전화가 잘 안 되어 공중전화라며 집을 팔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어 잘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시어머니와 마지막이었다.
결국 그 저녁에 자식들 마음 편하게 하려고 빗속에 밖에까지 나와서 그 소식을 전하고 혈압이 있던 당신은 밤새 그 일로 고민하다 혈압으로 죽은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았다면 그 즉시 병원으로 데려가 어떤 조치라도 취하여 살았을 텐데 밤새 혼자 몸부림치다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고통 속에서 돌아가셨다는 현실 앞에 자식으로서, 며느리로서 피를 토하고 싶었다.
시어머니가 서울에 오는 날은 정말 바빴다.
당뇨와 혈압의 지병으로 식이요법을 해야 해서 보리쌀을 두 번이나 삶아 무르게 익혀 놔야 하고, 여러 나물이나 생 야채들도 준비해 놓아야 하고, 두부며, 생선도 손질해 두어 바로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만삭인 몸에 하루 종일 서 있는 것으로 발이 퉁퉁 부어도 준비하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온다고 한 전 날도 시래기를 삶아 생 콩가루에 버무려 넣은 된장국까지 심심하게 끓여 놓고 만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아들인 남편은 무언가 느껴지고, 전해지는 게 있었을까?
서울에 왔다가 주말에 내려가서 다음날 계약하기로 했다던 금요일 아침에, 오후면 시어머니가 서울에 올 텐데 일어나자마자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며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시어머니를 수소문까지 했다.
'이렇게 이른 아침에 어딜 가셨겠냐, 장독대에 갔던지, 밖에서 무슨 일을 보나 보다'는 내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시가의 앞집에 묻고, 소식을 알만한 친구에게 전화해서 혹시 교회에서 보면 전화해 달라는 등 아침부터 밥도 먹지 않고 시어머니를 찾는 데만 집중하였다.
결국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없고 대문과 현관문이 굳게 잠겼다고 하여 문을 부수고 집에 들어가 보는 걸로 합의했는데 이미 시어머니는 이 세상과 작별한 상태였다.
마지막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듯 혈압으로 답답했는지 위에 입었던 블라우스의 윗부분을 잡아 뜯은 흔적과 금요일 오전에 교회에 가서 함께 나눌 성경말씀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는지 구겨지고 찢어진 성경책 위에 엎어진 채 혼자 그렇게 외롭게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만약 살았어도 본인도 자식들도 엄청 힘들었을 거라고... 자식들 고생 안 시키려 편하게 간 거'라는 말들을 수없이 하며 우리를 다독였지만 그런 말들이 위로가 될 리가 없었다.
그저 함께 있지 못해서, 그 맘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눈물은 하염없이 흐르는데 뭐라 어떤 변명도, 핑계도 댈 수가 없었다.
둘째 아이 출산일을 3일 남겨 놓은 만삭의 상태였지만 금요일에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4일장을 몸을 아끼지 않고 정성스럽게 치르는 걸로 이미 늦었지만 마지막 효를 다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친정아버지의 말기 암 소식은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10여 년 전 혈압으로 쓰러져 한쪽 몸이 불편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곤 말하는 거나 생각하는 거나 모든 것 하나 불편함 없이 멀쩡했는데 갑자기 며칠 동안 변을 보지 못해서 관장하러 병원에 갔다가 위암 말기 판정에 대부분 다른 곳으로까지 다 전이가 되어서 치료의 방법이 없다는 엄청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석 달여 남짓 친정아버지의 암투병과 함께 나의 일상이 이어졌다.
하나밖에 없는 막내딸을 유난히 예뻐했고, 아버지의 자상함으로 엄마보다 아버지를 더 따랐던 나였는데 그런 아버지가 평생 내 옆에 있을 거라고 믿고 살던 내게 얼마 후엔 어찌 될지 모른다는 것은 생각조차도 무서워 눈물로 날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아버지의 간병을 시작했다.
엄마가 늘 옆에 있었지만 얼마나 내가 더 옆에 있어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간도, 돈도 아끼지 않았다. 좋은 병실에 있게 해 드리고 싶었고, 그동안 결혼하여 내 생활에만 집중하고 무심했던 시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무슨 보상이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내려가서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올라오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아버지 당신이 의사였기에 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혹여 삶을 포기할까 봐 알리지도 못하고, 곧 나아서 나갈 테니 염려 말라는 말로 위로하며 병원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느 날 유난히 진통제가 든 링거 주사액을 자세히 보던 아버지가 뭔가 눈치를 챘는지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며 조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바나나우유가 먹고 싶다고...... 마지막 아버지를 보내드리는 순간 그걸 해 주지 못한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왕 돌아가실 거였으면 그렇게 먹고 싶다던 바나나우유를 먹게 할 걸 하는 안타까움과 그동안 잘해 주지 못한 미안함은 환자의 가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것 같다. 그러나 위출혈로 물도 마실 수 없던 상황이라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도 그게 두고두고 마음이 아프다.
통증으로 끙끙 앓다가도 순간 정신이 잠시 들어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환히 웃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미 모든 생명이 끝나고 오직 진통만 살아있어 온전히 그 통증을 다 감수하고 있다던 의사의 말에 가슴이 미어졌는데 호스피스 간호사가 무언가 걱정되는 게 있는 것 같으니 아버지를 편안히 보내드리라는 말에 내가 악역을 맡았다.
모두가 잠든 시간 아버지는 의식도 없이 잘 들리지도 않는 신음소리만이 간간히 들리는데 마음을 가다듬고 가장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지만 이미 내 목소리는 울부짖고 있었고, 가슴을 찢어내는 고통의 흐느낌만이 내 귀에는 들렸다.
"아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 계신 곳에 먼저 가 있어. 우리도 곧 갈 거야. 아빠 혼자 가는 것이 아니고 천사들이 호위해 줄 거야. 거기로 따라가면 돼. 무섭지 않아. 우리 거기서 다시 만나. 아빠! 엄마도 걱정하지 말고, 나도, 오빠들도 걱정하지 마, 아빠. 우리 잘 지낼게. 엄마한테도 더 잘할 거고. 오빠가 더 잘 모실 거야. 만약에 엄마 맘고생시키면 내가 가만 안 둘게. 그리고 아빠가 하늘에서 지켜주면 되잖아. 그렇지? 아빠. 미안해. 이렇게 아빠를 보내서 정말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리고 아빠 사랑해! 아빠 사랑해! 알지? 아빠 알지?......"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그렇게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통증만으로 일그러져 있고 의식조차 없던 아버지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를 껴안고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밤새 아버지 옆에서 옛날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더듬고, 미안하다 했다가, 고맙다고 했다가, 사랑한다 했다가 두서없이 혼자서 중얼거리다 아침을 맞았다.
천둥과 번개가 치는 요란한 밤을 둘이 보내고 퉁퉁 부은 눈으로 다소 편안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간호사에게 '혹여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난 서울에서 와야 하니 새벽이라도 미리 알려달라'라고 부탁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처음 며칠은 차를 가지고 다녔는데 워낙 비위도 약하고, 입맛도 없어 병원에서는 율무차나 미숫가루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한 번은 운전을 하며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순간 핑 돌더니 앞이 깜깜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아 급히 길가에 차를 두 번이나 세우고는 그다음부터는 기차를 이용하여 다녔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올라오면 또 며칠 식구들이 먹을 반찬을 준비하기 위해 장을 보고 저녁을 마치면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게 된다.
그날도 밤새 울다가 기차 안에서 죽은 듯이 잠을 자고 도착하여 저녁을 준비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새벽 3시쯤 간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오늘을 못 넘길 것 같아 임종실로 옮길 거라고 한다.
그럴 거라고 짐작도 했고, 가는 길 편하도록 안부까지 전했지만 막상 그 전화에 또 전화기를 붙들고 펑펑 울었다. 어찌할 방법이 없는데 그래도 이렇게 보내드려야 하는 상황이 너무 힘들었다.
남편에게는 출근해서 정리하고 오라고 하고 먼저 병원으로 갔다. 어제보다 더 힘들게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를 보면서 마지막 기도를 했다.
"아빠 이제 안 아플 거야, 아빠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천국에 갈 거고, 거기에 가면 고통도 없고, 통증도 없고, 바나나우유도 있고...... 그거 먹고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행복하게 잘 지내야 해. 혹시 다른 사람이 불러도 뒤 돌아보지 말고 아빠 내 목소리 따라 빛이 있는 곳으로 가면 돼. 아빠 너무너무 사랑해. 그리고 내 아빠여서 너무 좋았어, 나중에 다시 만나도 나 잊지 말고 또 우리 아빠 해야 해 알았지? 아빠 사랑해..."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얼굴을 덮고, 입으로 수 없이 짠물이 들어오는데도 닦지도 않고, 끝없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옆에 있던 작은오빠가
"야 아버지가 웃으신다. 네가 말한 대로 좋은 데로 가시나 봐, 형 봤어? 우리 아버지 진짜 미남이시네" 하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임종을 지켜보던 의사와 간호사도 정말 할아버지 잘생기셨다며 어쩜 저렇게 웃으시냐고 눈물을 닦으며 다들 한 마디씩 하였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 잇몸이 다 보이도록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동안 통증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은 간 데 없고 빛이 나던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찬송가를 들으며 딸의 안내를 받으며 거짓말처럼 그렇게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 정말 천국에 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그렇다면 오빠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결혼해서 이제껏 친정에서 단 한 번도 시가나 남편의 흉을 본 적이 없는데 그것은 이런 날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바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 혼자 그렇게 몸부림쳤는데 아버지가 나에게 기회를 준 것 같아 울다가 부리나케 엄마를 끌고 나가 빨리 교회에 연락을 하라고 하였다. 우느라 정신없어하는 엄마에게 정신 차리라고 하고선 올케에게도 부탁을 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언니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꼭 들어달라며 아버지의 장례를 기독교식으로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먼저 장례식장으로 갈 테니 오빠를 좀 붙들고 시간을 벌어달라고도 하였다. 그때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병원 옆에 있던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장례일정을 말하니 장남이 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기다리다 오빠들이 사무실로 들어오길래 4일장을 이야기했더니 말도 안 된다며 펄펄 뛰었다. 더구나 그때까지도 제기를 준비해 두었던 큰오빠를 아는데 대뜸 기독교식으로 할 거라서 주일은 발인이 안 되나 월요일에 발인을 해야 한다고 우기는 동생을 어이없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천국 환송 잔치를 해 주고 싶은데 일요일은 모두가 예배를 드려야 해서 안 되기에 월요일에 발인을 해야 한다는 내 말에 정말 기가 막힌 지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그러자고 사정을 했다가 협박 아닌 협박도 하였다.
'만약에 오빠는 유교 식으로, 나는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기 위해 혹시라도 오빠와 다투게 된다면 난 다투지 않고, 아버지 영정사진 하나만 들고 서울로 갈 거고, 마지막까지 우리 걱정에 그 큰 고통을 참았던 아버지를 생각해서 절대로 다투지도 않을 거고, 여기서 실랑이도 하지 않을 테니 오빠가 결정하라면서 아버지가 내가 없는 장례식을 좋아하실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막내딸은 특별한 존재였다.
아버지에게서 딸인 나는 안 되는 것도, 못 해 줄 것도 없던 딸이었다. 그걸 오빠들도 잘 알기에 뭐라 말도 못 하고 아이구, 아이구 소리만 몇 번 지르다가 사인도 하지 않은 체 그대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정말로 유교 식으로 장례식이 진행되면 철없는 막내는 진짜로 서울로 갈 거라는 것을 오빠들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주장하지 못한 오빠들을 뒤로하고, 오빠들이 포기했으니 딸인 내가 결정해도 되지 않냐고 물은 후 금요일에 돌아가셔서 월요일에 발인하는 4일장으로 정하였다.
아무리 아버지가 생전 아프기 전에 교회에 다녔어도 아픈 이후로 못 나간 것이 10년 가까이 되고, 엄마가 교회에 다닌다 해도 정작 두 아들들이 믿지 않으면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침묵으로 그리 허락을 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마음을 오빠들도 알았고, 또 임종 시 직접 눈으로 본 사실을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일로 큰오빠와는 몇 년 불편하였다. 그러나 매년 추모예배는 드려야 하기에 양보해 준 만큼 나는 뭐든 아끼지 않고 베풀면서 최선을 다해 지금은 오빠도 예배에 자연스럽게 참석을 하고, 명절에는 우리가 없어도 추모예배를 알아서 드린다.
어쨌든 그리 결정을 하고 나니 내 책임이 무척이나 커졌다.
나중에 장남으로서 가졌을 큰오빠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작은오빠와 둘이 나누어서 장례비용을 부담하였지만 고맙게도 남편이 먼저 이리되었으니 장례비용을 우리가 다 부담하자는 말로 나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모든 장례일정을 기독교인의 장례보다 더 기독교인답게 치렀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아무리 힘들어도 한 시도 앉아 있지 않았고, 오빠들을 찾아오는 조문객들까지 살뜰히 챙기며 기독교인의 본을 보이고자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무사히 4일장을 마치고 매년 돌아오는 아버지의 추모일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날과 같아서 한쪽이 양보를 해야 하는데 그때도 남편이 먼저 자기네 형제들은 다 기독교인들이어서 아무 때나 해도 되니 아버님은 제 날짜에 하자는 말에 유교사상이 강한 큰오빠가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아무리 장인어른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어머니가 우선일 테고, 또 다른 형제들의 의견도 있을 텐데 장인어른을 먼저 챙기는 모습에 윗사람으로써 미안하기도 하고, 염치없기도 했는지 잘 따라주어 어느새 7년이 지났다.
이 세상을 꼭 나이 순으로 떠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부모든 누구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린 떠나보내야 한다.
그런데 보내고 나서 많은 미련이 남기보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동안에 그 모든 아쉬움들을 하나씩 해결하고 서로에게 평안과 위로가 되는 이별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나 역시도 아버지를 보내고 나서 들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해도 아쉽고, 서운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런 마음 뒤 켠에 죄스런 마음만은 남기지 않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또 앞으로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낼지, 혹은 내가 먼저 그들 곁을 떠날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내일의 일을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떠나던, 남던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보다 위로가 되고, 부담이 되기보다, 힘이 되는 서로였으면 한다.
비록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는 이미 내 곁에 없지만 아직 내 마음에는 늘 함께 있다.
그래서 힘이 들 때, 또는 좋은 일이 있을 때 난 마음속으로나마 그들을 찾으며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아파하는 걸 느끼며 산다.
죽음이 서로의 삶은 갈라놓을지라도 절대 나누지 못하는 건 함께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진심으로 전했던 사랑과 섬김, 나눔, 배려가 있었기에 오늘도 두 분을 추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