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군대 이야기 하나만으로 긴 밤을 지새울 수 있다면 여자들은 출산 이야기 하나로 네버엔딩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여자들에게 출산은 단순히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출산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아가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라는 결혼생활의 긴 시간 속에서 유독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것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역시 임신과 출산을 통해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배워가며 임신과 출산이 있었던 시간의 과거로부터 이제는 다 성장한 아이들의 미래까지 넘나들 수 있는 환경과 한 여자의 역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나 역시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책으로 쓴다면 아마도 수십 권을 쓸 수 있는 분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 젊은이들은 잠시 서로를 관찰하며 상대방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썸'이라 부르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시절 20대였던 1980년대는 격동의 시대였다고 해야 하나, 1979년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하고, 계엄령이 선포된 상태로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삼청교육대, 언론통폐합 등 그 당시는 잘 알지도 못했던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대학생활을 했기에 학교에 가는 날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왜 그랬는지 그런 이유들조차 제대로 모르고 지나갔던 대학시절이지만 우리의 형편들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특히나 요즘 말로 '썸'을 타야 하는 20대는 늘 주머니가 가난해서 그 흔한 커피 한 잔을 맘 놓고 못 먹었고, 데이트라는 이름이라도 걸린 날은 만나기는 해야 하는데 어디라도 들어가려면 돈이 들기에 그저 두 손 맞잡고, 하루 종일 이리저리 걸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아마도 우리 세대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데이트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쩌다 둘이 식당엘 들어가도 주문하는 음식은 늘 하나뿐이고, 그것도 우동이나 칼국수, 수제비 등 가장 저렴하다면 저렴한 메뉴들만이 그때 우리 연인들의 주된 식사 대용품이었지만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그때의 그 맛을 잊을 수는 없는 듯하다.
지금은 식당이나 카페에서 아예 1인 1 주문이라 해 놓고 가격도 제법 있어서 주머니가 가벼운 연인들에게는 우리의 시절만큼이나 부담스러울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대부분 서로의 학교를 오가며 데이트를 하였고, 엄마에게 졸라 싸온 도시락이 그나마 만찬이라면 만찬이었다. 도시락의 맨 밑바닥엔 계란 프라이가 깔려있고, 그 위로 밥이 꾹꾹 눌려져 숟가락으로 살살 퍼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엿가락을 떼어내듯 떼내어 포크 하나를 가지고 서로 떠먹여 주고, 혹여 김치 국물이라도 새어 망신당할 까 봐 약병에 가득 담아온 멸치볶음에도 우린 그저 행복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 당시도 아르바이트 같은 것들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것을 할 생각을 못했을까 싶다.
지금의 20대는 어느 방송에서 들은 것 같기도 한데 가장 부유한 계층이라고 한다. 부모에게 용돈을 받아쓰는데 가장 비싼 식당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가장 비싼 물건들을 사는 사람들도 20대가 가장 많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다. 아마도 부모인 우리들이 그리 살지 못했기에 어쩌면 자녀들에겐 풍족하게 해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도 있으리라 싶지만 그래도 바라보는 눈은 곱지 않다.
지금은 형편이 좋아져 맘만 먹으면 무엇이든 살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에게는 늘 인색해지는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다.
얼마 전 방송에서 남편이 너무 짠돌이처럼 굴어서 속상하다는 말을 하는 아내를 보았다. 편하게 부부가 같은 메뉴를 주문해 먹어본 적이 없다는 말을 하며 자신이 볶음밥을 주문하면 거기에 딸려오는 짬뽕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자신이 먹고 남은 짬뽕국물을 보관하였다가 다시 먹는 과정에서 탈이 난 적도 있다는 말을 하였는데 방송을 보는 내내 저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남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음식을 버리는 건 나쁘다면서 이전에는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는데 이건 상한 것도 아니고, 훔친 것도 아니니 나중에 먹으면 되는데 왜 버리냐'라고 하는데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뜻 공감은 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절약이라고 하면서 하는 모습들이 어쩌면 자녀들에게는 내가 방송을 보면서 '저건 좀 심하네'라고 공감했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시대의 그런 노력과 절약으로 지금의 우리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안에 사랑도 있었고, 낭만도 있었고, 그런 시간들이 지나 결혼까지 했으니 말이다.
특별한 이벤트 하나 없이, 결혼하자는 말은 했던가 싶기도 하고, 그 흔한 꽃 한 송이 받은 적도 없지만 어찌어찌 결혼을 하고 지금 이 시간 그때의 20대를 돌아본다.
'연애 중'이라고 하면 언뜻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들 하는데 사실 연애라는 말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교차하는 상호적인 마음'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하는 중'이라고 하면 '서로를 사랑하는 사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요즘 말하는 '썸'이라는 말과는 사뭇 다른 느낌과 의미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어쩌다 만나게 된 사람들이 오래 만나는 사이가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이 그 당시 연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나 역시도 그렇게 대학시절 만나고, 제대로 ‘사귀자’라는 말조차 들은 듯, 안 들은 듯싶은데 자주 접촉하고, 자주 함께 있다 보니 편해지고, 그러면서 지금은 30대 중반도 결혼 적령기라 불리지만 80년대의 우리는 20대 중반이 결혼 적령기였기에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특별함 없이 교제하고 결혼했던 그 당시의 우리들은 신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그저 사귀었던 남자의 가족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결혼생활이라 여겨졌던 듯하다.
흔히 막장드라마라고 해서 나오는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들은 그렇게 순종적인 아내들의 모습과 반대되는 여자들과 만나는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주된 내용인 것을 보면 요즘 젊은이들이 '썸'을 타며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들은 어쩌면 중요한 듯하다. 심지어 '동거도 해 보고 결혼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만큼 결혼에 대한 생각들이 많이 바뀐 듯하다.
연애할 때는 몰랐던 남편, 아내들의 모습으로 유난히도 험난한 가정생활을 하는 모습들이 많은 것도 아마 그런 사소함까지는 모르고 '사랑하기 때문에' 혹은 '오래 사귀었기 때문에'라는 단순한 감정이나 생각만으로 결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결혼함과 동시에 남편과 살았던 것이 아니라 시가식구들과 살고, 남편은 다른 곳에서 직장생활을 했기에 주말부부였다. 신혼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던 결혼 초기, 연애 과정을 통해 더 알아야 할 것들을 결혼 후에라도 알아야 했지만 떨어져 살면서 남편과 내가 부부인지, 친구인지, 가족인지까지 헷갈렸던 신혼생활이었다. 남편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어야 하는데 시부모와 시동생들에게 집중된 일상과 매일매일 바쁜 시가 살이가 아마도 그런 생각까지 들게 했던 것 같다.
뒤늦게 60을 바라보면서 연애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해야 할까!
함께 여행을 다니고, 함께 생각을 나누고, 젊었을 때보다는 다소 목소리도 커진 나 자신을 보면서 젊은 시절엔 알지 못했던 많은 분노와 화가 잠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게 딱히 누구에게랄 것도 없고,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는데 억울하다는 생각, 분하다는 생각들이 드는 건 아마도 어느새 훌쩍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매 순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말이다.
다시 연애를 한다면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썸이던, 연애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여전히 잘할 자신은 없다.
다만 다시 연애를 한다면 좀 더 느리게, 천천히, 그리고 좀 더 나 자신을 위한 욕심을 담고 싶다.
결혼을 하면서 포기했던 미래, 하고 싶었던 일들에 대해 조금 더 욕심을 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시간과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자신을 위한 노력과 투자에 더 열심을 내고 싶다.
그런 과정까지 담는 연애, 썸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연애라는 과정도, 결혼 후 신혼이라는 과정도 있었을까 싶은데 임신이 되었다.
임신이 된 줄도 모르고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그 해가 다 가기 직전의 연말에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임신으로 인해 기쁘기보다 그토록 아기를 기다렸던 시아버지가 임신 사실을 모른 채 돌아가셨다는 것이 더 슬픈 일이 되어서 이 시기에 임신한 것이 도리어 잘못한 것처럼 잠시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어머니의 넘치는 사랑과 배려 가운데서도 입덧이 너무 심해 무엇을 먹을 수도, 임신에 대해 기뻐할 수도 없었다.
임신의 기간을 통해서는 다시는 아이를 갖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결혼 초기에는 시아버지와 친정어머니의 교통사고에 이어 시아버지의 죽음까지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인지 남편과 있었을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기억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편은 직장이 있는 서울에, 난 시가에서 살면서 연이은 양가의 교통사고와 시아버지의 병원생활, 그리고 장례까지 치르면서 그냥 그 순간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상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결혼을 했는지 그것조차 헷갈릴 정도로 서로의 존재조차도 잊혀질 정도였다.
신혼 초부터 별거 아닌 별거를 했고, 분가하면서는 시동생을 몇 년 동안 계속 데리고 살았기에 신혼은커녕 작은 아파트에 젊은 세 사람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같이 사는 것처럼 동거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거기에 입덧까지 심했으니 남편과의 추억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 전 남편과 같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입덧하는 아내에게 이것저것 사다 주는 남편을 보면서 '내가 입덧을 할 때 무얼 사다 준 적이 있냐'라고 물었더니 많았단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열심히 사다 날랐다고 하는데 난 무얼 요구했는지, 그리고 무얼 받아먹었는지 입덧에 대한 남편의 기억이 없다. 그저 먹지 못하고 이웃에서 나는 음식 냄새에도 하루 종일 토했던 기억과 헛구역질로 화장실에서 아예 변기를 안고 살았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한 번은 남편이 출근하고 미처 현관문도 잠그지 못한 채 화장실에서 토하다 쓰러진 것을 아래층의 아주머니가 임신한 내가 잘 먹지 못하는 것을 알고 무엇이라도 먹여보려고 음식을 들고 올라왔다가 화장실에 쓰러진 날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그 후로 현관문을 잠그지 못하게 하고 수시로 나를 들여다보다가 시어머니가 오자 바로 나를 데리고 가라고 당부한 적도 있다.
시동생과 살고 있기 때문에 친정엄마는 마음은 하루에도 수 십 번 입덧하는 딸에게 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늘 안타까워했다. 혹시라도 사돈으로 인해 시동생이 불편해할까 봐 친정식구들은 우리 집에 온 적이 거의 없다.
이제껏 평생 한 번도 안 와 본 큰오빠 내외, 출장길에 왔다가 아무도 없을 낮 시간에 잠깐 들렸던 작은오빠, 그리고 아버지는 집들이라던 지, 아이들의 백일이나 돌에 초대했을 때만 왔고, 엄마는 남편의 입원으로 내가 병원에 있어야 할 경우 아이들을 봐주기 위해서 등의 도움을 요청할 때만 왔다.
그만큼 왕래를 하지 않았고, 늘 나만 친정엘 들락거렸는데 왜 그때는 그렇게 힘들게 입덧을 하면서도 친정에 가서 있을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결혼 초이기 때문에 친정에 들락거리는 것이 은연중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평소 시가에서는 시골에서 올라오는 쌀이며 해산물들을 자주 친정으로 보냈는데 그러면 친정엄마도 부담스러우니 직접 짠 기름이나 과일, 고기 등을 사서 주어 들고 가면 시어머니는 정색을 했다.
"넌 어찌 그리 염치가 없노, 시집오면서 그리 바리바리 들고 오고 또 들고 올 것이 있드나. 이거이 다 돈 주고 사셨을 낀데 우리는 있는 걸 보낸 기다. 그러니 담부터 들고 오지 마래이. 이제 보니 딸들이 도둑이구나." 이러면서 구박 아닌 구박을 하였는데 그런 모습에서도 그렇고 대놓고 친정에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난 그리 해야 할 것 같아 용건이 없으면 절대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수 십 년이 지나도록 명절이라고 친정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처음에는 시부모가 다 돌아가셔서 시동생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나중에는 시동생들이 본가라고 들려야 하는 곳이 우리 집 밖에 없어서 음식을 해 놓고 기다렸고, 지금은 이제 그만 왔으면 하는 마음으로 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도 친정엘 가지 않게 된다.
어느새 친정이 도리어 시가보다 낯설게 느껴지는 건 세월 탓만은 아닐 텐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인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은 맘만 먹으면 자유롭게 갈 수도 있는데 잘 가지지도 않고, 친정이 도리어 불편하다는 생각도 든다.
마치 여행객이 잠시 들리는 정거장처럼 잠시 머물며 엉거주춤 있다가 밥 한 끼 먹으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재촉했다. 더구나 이제 아버지도 없는 집이라 생각하면 더 발길이 가지지 않는데 그만큼 친정은 아버지의 빈자리가 유난히 나에게 큰 것 같다. 그러면서도 돌아오는 길은 늘 좀 더 있을 걸 그랬나 하는 마음과 함께 늘 채우지 못한 허기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입덧을 하면서 무엇이 먹고 싶었다, 남편이 뭘 사다 주었다고 말들을 하는데 난 왜 기억이 없는지 모르겠다. 임신을 하고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남편이 먼저가 아니고 시어머니가 먼저였고, 출산을 할 때도 늘 시어머니가 옆에 있었다.
남편이 항상 가족들 중에 가장 나중에 알고, 가장 나중에 나를 만났던 것 같다.
첫 아이를 출산할 때는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 준다고 해서 역시나 시가에 와서 있었다.
생리가 불규칙하다 보니 출산일도 정확히 맞출 수 없어 출산 예정일보다 너무 늦어지는 바람에 촉진제를 맞고 출산을 하게 되었다.
친정아버지 친구가 있는 종합병원에서 촉진제를 맞다가 저녁이 되니 담당의사가 퇴근을 하는데 그대로 맞겠느냐 아니면 내일 다시 맞겠느냐고 물어서 내일 다시 맞겠다고 했더니 분만대기실에 있던 내 옷과 신발을 간호사가 치웠다. 밤 사이에 산모인 내가 도망갈 수 있어서 치워야 한다는 것이다.
분만하러 온 산모가 왜 도망을 간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침대에 누워있다가 스르르 잠이 들려고 하는데 밤사이 응급으로 들어온 산모들이 소리소리 지르며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너무 무서워 정말 신발이 있었으면 분명 도망갔을 거라 생각하며 그 간호사가 왜 내 신발을 치웠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슬리퍼를 신고 산부인과 병동이 아닌 다른 병동의 복도 의자에 앉아 있다가 아침이 되어서 다시 촉진제를 맞으며 어젯밤에 봤던 산모들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참아야지, 저렇게 날뛰지는 말아야지' 하면서 진통이 오는데도 입술이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나중에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소리를 지르자 간호사가 야단을 쳤다. 산모가 미련스럽게 너무 진통을 참아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다.
너무 진통을 참다 보니 분만을 기다리던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는 한참 있어야 되는 줄 알고 둘이 나란히 점심을 먹으러 가고 남편은 서울에 있고, 혼자서 출산을 하고 보호자를 찾아도 없다며 간호사가 여러 말로 위로를 하더니 병실로 데려다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두 어머니가 와서는 소리 없이 출산을 했다고 칭찬을 하였다. 그러면서 입술이 왜 터졌냐고 의아해하였다. 그런 진통 속에서 혼자 싸우고 있었던 딸과 며느리를 알 수가 없었으니 하는 말이다.
출산 후 첫 식사가 나왔는데 닭이 반 마리 들은 삼계탕이 나왔다. 도저히 먹을 수 없겠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침대 옆에 앉더니 닭살을 가늘게 찢어서 밥숟가락에 얹더니 먹어야 젖이 나온다며 아이 생각해서 먹으라고 하였다. 친정엄마라면 분명 먹기 싫다고 물렸겠지만 시어머니라서 눈치를 보다가 할 수 없이 수저를 들고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시어머니 앞에서 어떤 며느리가 대놓고 싫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 역시도 그랬다.
그리고 8월 한여름에 출산을 했는데도 병원에서 시가로 돌아오자 시어머니는 방에 불을 넣고, 아사로 만든 긴 원피스의 잠옷을 입히고 양말은 발목을 조이기에 안 좋다며 버선을 신기고 잠옷 속으로 바람이 들면 안 된다며 인견으로 만든 속바지까지 입혔다.
가만있어도 더운 한여름에 불 땐 방에서 그렇게까지 입고, 두꺼운 요에 누워있는 건 지옥이지 싶었지만 그것 역시 마다할 수 없는 시가의 시어머니 앞이었기에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한 번은 화장실에 간 김에 찬물을 틀어 손을 씻다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 주었는데 나중에 여기저기 쑤시고, 바람 들면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잘못해 주어서 그렇다고 다들 날 욕할 텐데 며칠을 못 참느냐고 얼마나 서럽게 이야기하는지 그다음부터는 찬물이 앞에 있어도 스스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를 씻길 때는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었다.
방은 늘 소독제로 시어머니가 들어오는 문지방부터 소독하고 입에는 마스크, 머리에는 하얀 수건 두르고, 팔에는 하얀 팔 토시까지 하고선 아이 욕조를 들고 들어와서 조심조심이 목욕을 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방안을 소독제로 소독을 하는 통에 분명 방 안에 있는데도 늘 병원에 있는 것처럼 소독 냄새가 진동을 했다.
주말에 남편이 오면 손을 씻지 않는다거나 옷을 갈아입지 않고는 절대로 나와 아이가 있는 방엘 들어서지도 못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이 뜨끈뜨끈한 안방에 그냥 들어가라고 해도 들어갈까 말까 망설였을 텐데 손 씻고, 옷까지 갈아입고 들어가라는데 선뜻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 테니 시가에 오고 나서도 문지방 건너편에서 인사를 하고는 한참이나 있다가 나와 아이를 가까이 보러 방에 들어오곤 했다.
둘째 아이는 출산일을 3일 남겨 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시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셨기에 만삭이 된 상태에서 장례를 치르느라 시가에 도착하자마자 교회 장로님들로부터 안수기도부터 받았다.
맏며느리가 장례가 난 상태에서 아이까지 출산을 하면 정말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모든 장례를 다 마치고 아이를 출산했지만 산후조리는 너무나 비교가 되었다.
똑같은 시가에서 했지만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라 친정엄마가 와서 했는데 5월임에도 불구하고 뜨끈한 방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늘 거실에 나와 앉아있었다.
미역국도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좋아하지 않기에 잘 먹이려고 된장 미역국, 조개 미역국, 들깨 미역국 등등 매번 다르게 끓여서 입맛에 맞도록 신경을 썼는데 친정엄마와 있으니 무얼 해 주어도 먹기 싫다고 안 먹고, 제대로 누워있지도 않고, 뭐라고 하면 알았어, 알았어하면서 건성으로 듣고 건성으로 대답을 하였다.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 준다고 할 때는 '친정 집에 가서 친정엄마에게 받게 두지 무슨 정성인지 모르겠다’며 불평을 하였는데 막상 시어머니가 없어서 친정엄마에게 받게 되자 아쉽고, 시어머니가 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살던 집도 정리해야 하고, 살림들도 정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코 앞에 있다 보니 산후조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주중에는 서울에 가 있는 남편과 주말에만 만나서 이런저런 일을 상의를 하려니 일도 더디 진행이 되고, 저녁이면 겁이 많은 친정엄마와 나는 온 집의 불이란 불은 다 켜 두고 방문이라는 방문은 다 열어둔 채 마치 망을 보듯 밤잠을 설치는 날들이 지속되고 있었기에 더욱 몸조리가 잘 되지 않았다.
요즘 산모들은 산후조리를 대부분 산후조리원이나 친정어머니에게 받지만 시어머니에게 받는 것이 산모에게 좋다는 생각도 든다. 어렵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하라는 대로 하게 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기에 몸조리가 제대로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잘해서인지 여태껏 몸의 어디가 산후조리의 후유증으로 안 좋다거나 시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산후조리와 신생아를 돌보아주는 데에 있어서 해 준다면 시어머니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첫 아이가 5살이 되던 해까지 시어머니가 있었는데 첫아이는 그 어린 나이였음에도 할머니를 잘 기억하고 있다.
하루에 생밤 다섯 개씩, 호도 두 알씩을 꼬박꼬박 먹이고, 돌나물을 꽃이라며 같이 앉아서 먹었던 모습을 아이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할머니에 대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어린아이였음에도 자기에게 지극하던 할머니의 사랑을 아는 것 같다.
큰아이가 다섯 살 때까지는 거의 시어머니가 키우다시피 했으니 그 사랑을 모른다면 그것도 이상하긴 하겠지만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큰 아이를 보면서 작은아이도 할머니가 있었으면 엄청 예뻐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들만 있었던 시어머니가 첫 손녀를 보고 사온 옷이 연분홍 원피스였는데 너무 촌스러워서 웃음이 난 적이 있다. 여자라는 것에만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무조건 분홍색에 공주 같은 스타일을 사 와서 도저히 입힐 수가 없었다. 2년이 지나고 나서야 어떤 옷을 사야 하는지 감을 조금은 잡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색깔은 빨간색이지만 늘 남자아이들처럼 멜빵바지를 사 왔었다.
그래도 그런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좋은 것 같다.
친정엄마도 있었지만 친정엄마는 오빠들의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우리 아이들에게까지는 늘 여력이 미치지 못했다. 도리어 친정아버지가 아이들을 많이 예뻐해 줘서 얼마 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생전에 용돈을 넣어 봉투에 자기 이름을 적어주었던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작은아이를 보면서 작은아이는 그나마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충격이며, 평생 기억하고 살아가는 힘이며, 추억이다.
오죽하면 남편들이 아내가 임신했을 때와 출산할 때 잘못하면 평생을 욕먹고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 비하면 예전에는 남편들이 지금처럼 분만실에 함께 들어가 그 분만 현장을 지켜보거나 옆에서 힘이 되어주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함께 있어주지 않은 것에는 서운한 맘이 있다.
직장의 형편상, 시가가 지방인 점도 있었지만 늘 나보다 직장이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던 남편이었기에 또 그러려니 하면서도 여전히 '그래도 함께 있어주지' 하는 맘이 들 때가 많았다.
두 아이를 출산하면서 한 번도 옆에 있어주지도 않았고, 입덧할 때 무얼 해 주었는지 남편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대신에 늘 그 자리에 시어머니가 있었던 것도 신기하다면 신기하다.
출산하기 직전에도 돼지고기 부위 중에 어느 부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어머니 말로 쫄대기 살이 출산하기 좋은 음식이라며 국물을 싫어하는 날 위해 고추장에 달달 볶아 매 끼니마다 지키고 앉아서 밥 위에 올려주었던 시어머니가 남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시어머니가 있었기에 그나마 여태껏 무던하게 살았던 것 같다.
부부는 결혼한 한 쌍의 남녀로 남편과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부부’라는 말이 들리기에는 같은 단어로 들리지만 한문을 보면 지아비 부(夫)에 며느리 부(婦) 자를 쓰는데 구어체에서 며느리 부(婦) 자는 아내라는 뜻을 갖고 있고, 우리의 정서에는 부부라는 것이 ‘남편과 아내’라는 이 표현 이상의 뜻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남편 옆에 다소곳하게 있으면서 하라는 대로 순종을 하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모습이면 그것이 가장 좋은 현모양처인 아내의 모습인 것처럼 보았고, 또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함께 무엇을 하거나 반대로 아내가 하는 일에 대해 남편이 뭔가 돕는다는 것은 남자의 할 일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던 기성세대들이다.
물론 지금은 시대도 많이 바뀌어 남녀의 구분 없이 일을 하고, 또 남편이라서 아내라서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많이 적어졌지만 여전히 고정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부부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는 어쩌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삶에서 어떤 위기를 한 번도 맞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건 진실된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건강이나 경제적으로나 아니면 부부간의 갈등이나 외도, 혹은 아이들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해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위기를 겪으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잠깐의 위기나 갈등으로 인해 삶이 더욱 견고해지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서는 그런 순간들을 잘 극복하지 못해 파탄에 이르기도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자신의 삶에서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최악의 순간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최악일 거라고 생각되는데 정작 본인은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 어쩌면 위기는 그 사람의 생각이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느냐에 따라서 많이 다른 것 같다.
누구에게나 있었듯이 내게도 삶의 위기들이 많았지만 그중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바로 ‘남편’이었다.
분명 사랑해서 남은 앞으로의 삶을 함께 하자고 결혼했는데 같은 곳을 바라봐야 할 부부가 어느 순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건 평생의 선택에서 오는 불안이기에 분명 위기가 된다.
결혼하고 짧은 시간 안에 미처 서로에 대해 다 알기도 전에 시부모는 죽고 시부모와 함께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남편과 나는 형이나 형수로서가 아니라 부모로서 각자 스스로 감당하며 묵묵히 견뎌온 시간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내게 남편이 가장 필요했던 출산이나 양가의 교통사고로 병원을 오가며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일들이나 시동생들과의 동거로 인해 불편하고, 속상했을 때 어느 순간에도 남편은 함께 하지 못했다.
직장일로, 혹은 형이라서, 늘 순간마다 분명한 사정과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건 남편의 생각이고, 내 입장에서는 가장 힘들고, 가장 남편이 필요했을 때 늘 다른 곳에 있었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던 남편이었기에 더는 함께할 수 없겠다는 막다른 곳에 왔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한계가 시부모가 다 죽고 난 뒤였다. 사실 시부모에 대해 뭔가를 다 알기도 전에 이미 곁에 없어서 불평도, 감사도, 뭐라고 하기에도 근거가 없다는 말이 맞는 것처럼 사실 시부모와의 만남은 순간이었는데 시부모가 없다면 더 편하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내 경우는 달랐던 모양이다.
시부모가 없는 상태에서 두 시동생들 뒷바라지해서 대학 졸업시키고, 군대 보내고, 취직하여 결혼시키기 전까지는 책임감만 있었다. 잘하고 잘 못하고는 그다음이고, 서로에게 맡겨진 일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잘하려고 노력만 했기에 나이에 맞지 않게 일찍 조숙해 버린 것도 어쩌면 그런 환경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20대와 30대를 오가며 장례 3건, 결혼 2건을 오로지 내 손에서 치르었다. 지금 친구들을 보면 50~60을 오가는 나이에 치를 일들을 난 가장 젊은 청춘시절에 다 감당했고, 그렇게 시동생들이 다 분가하고 나니 어느새 10년 가까이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신혼도 없이, 남편도 없이 오롯이 혼자만의 전쟁을 치른 듯한 시가 식구들과 부딪히며 산 시간들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에서 생각하면 분명 좋아하고, 사랑해서 남편과 결혼했는데 결혼생활이 뭔지, 서로 좋아는 했는지, 내가 누구와 결혼을 하고 사는 건지도 모르면서 살았던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살아가면서 무언가에 늘 쫓기듯이 살 때는 주변도, 자신도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 자신에 대해 생각이라는 걸 해 보지 않았다.
매일의 삶이 늘 바빴고, 무언가 늘 할 일이 있어서 매일 오늘 내가 해야 할 일들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시부모와 시동생들이 모두 다 떠나고 나니 갑자기 할 일을 잊은 듯 조금의 여유가 생기자 삶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이제껏 뭘 하고 살았는지, 갑자기 팍 늙어버린 듯한 일상과 전혀 생각하지 않은 모습으로 변해 버린 자신에 대한 불만과 잘 나가고 있는 주변 친구들과의 비교로 심한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부른 소리 한다며 '자식 키워 놓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살면 되지 무슨 소리냐'라고 하겠지만 그것이 순간 삶의 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중심이었던 시가의 모든 사람들이 죽거나 결혼해서 모두 떠나고 나만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이젠 거칠 것 없으니 맘 편히 즐기면서 살면 될 텐데 삶이라는 게 막상 모든 걸 갖게 된다고 해서 만족이라는 답으로 꼭 보답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부부로서 서로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주변의 환경에 집중하며 살아서인지 남편과 나는 시동생들과 같이 그냥 형제처럼, 남매 같은 모습으로 살았던 것 같다. 서로에 대해 애틋해하거나 떨어져 지내도 서로를 그리워하는 모습도 없었고, 늘 주어진 환경에 수긍하며 대처하기 바빴다.
그런데 그런 환경이 없어지니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어진 거라고 생각했을까?
서로에게 소홀해지고, 말도 없어지고, 다툼은 새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많아지자 그런 모습들을 서로 보이지 않으려 남편은 회사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밖으로 돌기 시작했고, 난 내 일에만 집중하였다.
그 당시 아이들의 논술을 가르치고 있던 터라 그 일과 집안일로, 남편은 회사 일로 그러면서 보이지 않게 우리의 틈은 점점 벌어졌다.
분명 부부로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에게 간섭도 하지 않고 각자의 역할에는 충실했지만 그런 틈 사이로 남편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서 위기를 느꼈다.
그러나 이제껏 살면서 나 자신보다는 시가를 위하고, 시가식구들을 우선으로 살았는데 그것에 대한 어떤 보상은커녕 갑자기 변한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시부모가 있었더라면 바로 달려가 어떻게든 해결을 보았을 텐데 시부모는 없고, 친정에는 이제껏 보여준 삶의 모습들이 있어 혹여 낙심할까 봐 차마 말할 수 없고, 혼자서 고민을 하다 내색하지 않고 어영부영 참고 넘긴 일이 더 큰 일을 내고 말았다.
무언가 생각을 하고 옳다고 결정을 하면 주저 없이 바로 실행해 버리는 내 성격 탓에 이렇게 살 거라면 굳이 같이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뭐 하러 같이 살면서 미워하고 서로 으르렁거려야 하는지, 그럴 바엔 헤어져서 서로 자유롭게 살면 되고,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남편보다는 시가식구들과 산 세월이 이제껏 더 많았기에 남편이 없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말도 안 된다고 펄펄 뛰는 남편과 달리 사실 결정해 버리고 나니 그렇게 흥분될 것도 없고 어린 마음인데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자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그냥 이 복잡한 상황을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시부모 대신 집안의 어른이기에 시 작은집에 찾아가서 먼저 말했더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더 이상은 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생길 때까지 모른 채 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며 조카인 남편이 아닌 내 편을 들면서
"무조건 이해한다. 얼마나 수고가 많았느냐, 그런 네 맘을 우리가 모르면 안 되지. 네가 그리 속상했구나. 우리는 무조건 네 편이다. 쟈가 잘못했지." 하는 여러 가지의 말들로 진심으로 위로를 해 주었다.
그러나 이미 닫아버린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런 격려와 이해에도 아무런 동요 없이 결정을 했기에 말씀드리러 왔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걱정이라서 그 문제부터 해결을 보고 싶었으나 남편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하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자신도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주변의 상황에 끌려다니다 보니 지치고,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하였다.
그럼에도 이미 마음을 비워서일까. 그런 말이나 일들이 그 전에는 화도 나고, 기도 차고, 억울하기도 했을 텐데 그런 남편의 말이 도리어 이해도 되고, 수긍도 되었다. 나와 같은 상황이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남과 장손이라는 자리 때문에 남편 역시 무조건 모든 걸 책임져야 하고, 감싸 안아야 했을 것이다.
동생들과 불과 2살과 4살이라는 나이 차 밖에 안 나지만 모든 걸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건 남편 몫이었기 때문에 동생들을 다 출가시키고 나니 긴장도 떨어지고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에 홀가분하기도 했을 테고, 뭔가 허전한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내가 느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빈자리를 서로에게서 채움 받길 바랐지만 우린 정작 남편과 아내인 서로에게는 나눠줄 것이 없었다. 도리어 보상만을 원했을 것이다.
서로 너무 지쳐 있었기에 그동안 차마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건드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풀어놓으면서 감당하지 못해 도리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자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내 심장에 이상이 생겨 흥분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 병원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게 되고,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뒤돌아보니 내 잘못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주변에만 집중하고 열심을 내었지, 정작 남편에게는 내 편이라는 이유로 맘을 써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연약함 속에서 가지게 된 이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용납되었다. 서로의 입장과 환경을 이해하니 그 사람이 이해되었고, 이해가 되니 또 용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 위기의 시간들을 보내면서 이제는 제 나이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였다.
이제껏 20대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50~60대쯤에서 겪어야 할 일들을 겪었기에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보이지 않게 힘들어서 우리 자신들도 많은 상처를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안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다시 신혼이라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물론 남편의 노력이 더 많았지만 이제껏 알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새로 처음 알아가는 사람들처럼 서로의 상처들을 보듬고, 격려하며, 이해하려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 서로 함께하는 시간도 많이 갖고, 서로에게 집중하면서 주변보다는 서로에게 더 관심과 사랑을 주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의식적으로라도 부모나 형제, 자식이 아닌 본인 스스로의 삶에 더 충실하였다.
내가 있어야 자식도, 부모도 있는 것이고, 형제도 있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것은 아예 생각조차도, 의견도 내어보지 못하고 그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에 수긍하고, 따라주는 게 잘하는 거라 생각하고 달려가다 보니 삶에 대한 열정도 의욕도 없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시부모가 지금껏 살아있다면 상황은 또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시부모에게서 보충되는 에너지가 있었을 테니 어쩌면 이런 위기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위기가 없었으면 더 좋았을 순간이지만 어쩌면 그런 위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삶에 더 열심을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데 앞만 보고 달린 시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했기에 지쳐버렸고, 결승점인 것 같은데 손에 쥔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막다른 생각을 한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지만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주변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걸 이 위기로 또한 알게 되었다.
힘든 시간들을 시부모와 시동생들과 부딪히며 살 때는 넘길 수 있었는데 정작 힘들게 하던 사람들이 없어졌을 때 그걸 견뎌낼 에너지도 사라졌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껏 부모처럼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시 작은 집도 어쩌면 이런 위기들을 잘 극복하게 해 주었다.
결코 시가나 시가의 주변이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울타리가 되고, 언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부에게 시가의 주변은 싸움터의 방패막이였고, 어쩌다 몰아치는 태풍에도 견고하게 울타리가 되어주는 방파제였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위기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의 케이스가 좋은 예가 되었으면 한다.
평화를 누리려면 먼저 위기와 갈등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아이러니한 말처럼 어떤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 또한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 마지막은 아무 순간에나 가능하다. 포기하는 것 또한 누구에게나 가장 힘든 순간이지만 또한 가장 값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이 만약 위기의 순간이라면 그 위기가 우리의 삶에서는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2017년 3월에 The Huffington Post(Kelsey Borresen)에 실린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부들의 9가지 습관’을 보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부부로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예가 되는 것 같아 옮겨와 보았다.
첫째, 다른 사람 앞에서 배우자를 칭찬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족의 칭찬에 대해 인색해서 아내나 자식에 대한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어색하고, 쑥스러워한다.
특히나 자녀들 앞에서도 잘하지 않지만 자신의 형제나 부모가 있는 곳에서는 더욱 배우자에 대해 인색해야만 된다고 믿는지, 아님 역설적으로 표현을 해도 다 알기에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칭찬은커녕 말 한마디도 따뜻하게 전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은데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칭찬하는 거'라고 한다.
둘째, 아무리 바쁠 때라도 함께 할 시간을 만든다.
남편들이 직장에 다닐 때는 직장일로 늘 바빠서 집안일이나 아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당연했던 시대를 살아서 그런지 지금의 젊은 부부들을 지나가다 보게 되면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남편들이 스스로 아내와 아이들을 자상하게 챙기는 모습이 아마도 낯설어서인 것 같다.
남편이 퇴직을 한 후에야 시간이 되어 무엇이라도 아내와 함께 도모하려면 오랜 시간 각자의 스타일로 살아왔기에 뒤늦은 불화가 많아지는 것 역시 함께한 시간들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 새로운 신조어 '졸혼'이라는 말까지 나온 것 같다.
친구 남편들이 이제는 대부분 퇴직을 하여 집에 있으면서 회사에서 했던 습관대로 아내를 회사 직원처럼 이것저것 시키는 통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래서 갱년기를 겪는 친구들이 더 힘들어 집에 있기 싫다고 하는데 심지어 TV 시청 프로그램까지도 서로의 취향이 달라 리모컨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도 하게 된다고 한다.
좀 더 일찍 젊었을 때부터 함께 보조를 맞추었다면 나이가 들어도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는 부딪힐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런 시간조차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셋째, 자주 마음껏 웃는다.
부부가 함께 앉아 하루의 일과를 나누며 즐거웠던 일, 속상했던 일을 주고받는 것은 정말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아이들까지 함께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함께 웃고, 위로하는 시간은 무엇보다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웃음이라는 것이 누구나 동일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서로의 코드도 맞아야 하고, 또 상대방이 즐겁다면 함께 웃어줄 수 있는 마음도 필요하기 때문에 부부라면 더욱 그런 시간이 필요하겠다.
좋은 예로 가정예배를 들 수가 있는데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거실에 모이는 시간차를 두고 각자 있었던 일들을 나누고, 교제하다가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돌아가면서 기도를 하다 보면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가장 좋은 예인 것 같다.
넷째, 상대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기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감사한다.
부부 사이를 떠나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굳이 지적을 하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어도 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에 대해 쉽게 받아들여지기보다 일단 반대라는 생각에 반감부터 갖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장 가까운 부부라면 더욱 내 편이려니 했다가 반대를 하게 하면 그것이 서운하여 기억에 남게 되고, 다른 상황에서 그 일을 끄집어내어 전혀 상관없음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단지 다르다고 부정했던 것 때문에 그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누군가를 바꾸려 할 때 진실은 상대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이 바뀌게 된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결국 상대방은 동일한데 상대방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변하게 되고 그것으로 상대방이 바뀌었다고 보게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다섯째, 늘 상대에게 공감하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한다.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하기 어려운 일을 더구나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이런 모습으로 대한다면 아마도 평생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설사 지금은 이해가 안 되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라도 한다면 누구든 더 이상 화를 내거나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을 텐데 우리는 그런 표현을 하지 못해 더 큰 오래를 만든 경우가 많다.
아마도 첫째 습관인 서로를 칭찬하지 못하는 습관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아야 하는데 우리는 늘 내 시선, 내 입장, 내 생각을 주장하기에도 급급해서 상대방의 입장은 나와 다르면 일단 틀리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대화를 끝까지 진행할 수 없기에 오해는 쌓여가고, 불신은 늘어가는 것 같다.
여섯째, 집에 언제 들어갈지 늘 알린다.
어찌 생각하면 가장 쉬운 방법인데 이런 걸 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남편은 항상 퇴근 전에 전화를 한다. 이제 출발하려고 한다거나, 가는 길에 어딜 들렀다 간다고 알려주는데 그러면 도착시간쯤 되어 식사 준비를 하기 때문에 서로가 편한 것 같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가 9가지 중에 그래도 하나는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일곱째, 늘 서로에게 추파를 던진다.
'추파'라는 말이 이렇게 쓰이니 좀 어색한데 서로를 유혹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유혹이라고 해서 드라마에서 보이듯이 이상한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데이트 신청도 하고, 또 서로 사랑한다는 말도 자주 하고, 출근 시나 퇴근 시에 가벼운 입맞춤도 좋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우리 부부는 잘하지 싶다.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이 출근할 때마다 배웅하는 내게 입구에서 가볍게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일상이 되어있다. 그런 것들이 별 것은 아니지만 나이가 들면서 막연한 부부의 모습에 그나마 애정표현이라면 애정표현이 될 수 있는데 실제로 아침에 출근하면서 키스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과의 비교분석을 한 통계도 있다.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서 배우자와 키스를 한 사람이 연봉도 훨씬 높다고 한다. 그만큼 일도 잘한다는 의미일 테고, 일상에 활력도 준다는 의미일 테니 시도해 보면 좋을 듯하다.
여덟째, 싸워도 깨끗하게 싸운다.
싸우더라도 서로에게 두고두고 상처가 되는 말은 삼가라는 뜻일 것이다.
싸움은 끝났는데 싸울 때 주고받은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남아 싸우지 않을 때도 그 말 때문에 힘들다면 그것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향이 다르다 보니 남편은 싸웠더라도 바로 “미안해. 화 풀어. 풀렸지?”라고 말하며 툭툭 털려고 하는데 난 풀어내려면 시간이 걸려서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뭐야, 장난하는 거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말하면 도리어 화가 났다.
남편은 남편의 스타일로 푼다지만 난 아직도 화가 났는데 화가 난 이유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까지 맞추어야 하나 하는 억울함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싸움은 어쩌면 각자의 스타일로 풀어야 하기에 그런 시간까지 맘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기다려주고, 또 한 번 사과했으니 다 되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따라 어르고 달래는 시간까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아홉째, 원한을 품지 않고 용서하며 넘어간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한쪽의 잘못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서로를 용서해야 함에도 누군가 용서를 구해 오면 도리어 상대방의 잘못으로만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용서는 일방이 아닌 쌍방 서로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말 중에 ‘그 날의 화는 그날 하루를 넘기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상대방이 아닌 자신을 위한 말인 것 같다.
화는 우리 몸에도 좋지 않기 때문에 품고 있지 말고 그 날의 화는 그날 풀어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더욱이 부부라면 한 방, 한 침구에서 자야 하는데 화를 풀어내지 못하면 서로 잠을 못 이룰 것은 뻔하고 풀지 못한 화로 그 이후의 남은 모든 시간은 쓸데없이 허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9가지의 습관을 잘 유지하다 보면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실천하다 보면 그것이 일상이 되어 어느 날부터인가 그래도 조금씩은 변해 있는 서로를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의 원인이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갈등이나 위기, 싸움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고린도전서 7장 3절)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의무라는 것에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으나 그중 우리가 결혼할 때 서약했던 것처럼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아플 때나, 그렇지 않은 모든 일상에서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이 모든 것을 항상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 수 있고,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가장 잘 모르는 사이가 부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촌수조차도 따질 수 없는 '무촌'인 것처럼 세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평생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함께하는 것이 또 부부라 생각한다.
결혼해서 마흔이 다 될 때까지 남편은 자신의 삶과 학업으로 늘 바쁘고 나를 비롯하여 집안의 일에 대해서는 등한시했기에 남편하고 좋았던 일은 사실 거의 기억에 없다.
그리고 무슨 일을 기억하려고 하면 늘 그 자리에 시어머니가 있었던 것이 먼저 기억난다.
비록 결혼해서 시아버지와는 7개월 정도, 시어머니 하고는 5년 정도밖에 함께 살지 않았지만 남편보다 더 많은 걸 공유하고 기억하며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아이들이 이렇게 잘 자라 있는 모습을 보면 시부모가 얼마나 기뻐했을까를 가끔은 생각하게 된다.
유난히도 아이들을 예뻐해서 텔레비전도 필요 없다고 했던 시아버지이고, 아이들을 보면 사는 재미가 있다던 시어머니였는데 아마도 지금까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살아있다면 나는 아이를 더 낳았을지도 모른다.
두 아이를 낳고도 시골 시할아버지 집에 가면 시할아버지가 늘 아이를 더 낳게 해 달라고 내 머리에 안수기도를 했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시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난 늘 '아멘'을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면 시할아버지가
"어여 아멘 해라"라고 재촉을 하여 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겨우 ‘아멘’이라고 말했던 기억도 있다.
아이가 많다고 해서 출산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여자로 태어나 평생 처음 겪는 몸의 이상과 고통, 그리고 아이의 탄생으로 인한 말로 다 표현 못할 여러 가지의 감격을 지울 수가 없기에 여자들은 출산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은 것이다.
다 비슷한 경험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이야기는 좀 더 드라마틱하고 좀 더 스페셜하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각자의 경험이 더 소중하고 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통해 한 생명의 신비감과 귀중함을 알게 되고, 또한 아이를 키우며 겪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 여자는 성숙해가고, 몸과 마음도 넉넉해지는 것 같다.
요즘은 출산을 내가 알던 세상과 다르게 더 고급화되고, 더 의학적으로 발달되어 산모들이 어려움 없이 산통도 모르게 하는 무통분만도 있고, 아이도 엄마의 젖을 먹기보다는 분유로 성장하고, 아이를 보는 유모도 두고, 불과 30년 전의 세상과는 너무 많이 달라졌다.
물론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출산의 모습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의 산모들에겐 이 이야기가 어느 시대 이야기인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들이 아무리 환경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여도 엄마가 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고, 10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야 한 생명을 출산할 수 있고, 그 과정을 무난하게 보내기도 하지만 많은 어려움 속에서 눈물과 간절함으로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통해서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함께 성장해 간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아이가 자라는 만큼 엄마도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내가 부모 속은 썩여도 내 자식이 내 속을 썩이는 건 용납이 안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 생명을 내가 낳았다고 해서 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들이 그랬듯이 그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성장해서 사회에서 필요한 한 사람으로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모두의 소망이듯 우리도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기대하며 살아가면 될 것 같다.
출산 때의 진통과 아이를 키우면서 어려웠던 점을 기억하기보다 이 아이로 인해 자신이 받은 기쁨과 아이들이 성장을 하며 알게 모르게 주었던 감사를 기억하며 그 이야기로 우리 모든 여자들의 네버 앤딩 스토리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