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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K Jun 13. 2022

운전세대, 비운전세대

그런 생각을 했었다. 회사 참 고맙다. 돈도 주고 운전도 가르쳐주고. 입사 전까지는 장롱면허였다. 운전면허는 꼭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에 면허를 땄지만, 자동차 없는 삶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차에 돈을 안 쓰는 걸 허세 없고 의식 있는 삶과 동일시 했던 것 같다. 걷고 사유하는 것과 관련한 숭배로 가득차 있을 때다. 광고회사에 들어오면서 내 마음 속에 현실의 종이 마구마구 울렸다. 막내, 남자직원, 운전면허 보유. 3가지를 모두 갖췄는데 운전하지 않는 자, 죄악일 지어다. 마침 AE는 클라이언트 미팅, 촬영 등 외출할 일이 많다. 운전 못하는 사람이 운전실력을 키우기에는 최적의 환경인 셈이다. 또한, 법인차량이니 솔직히 내 차 보다 부담감이 덜하다.


처음 운전대를 잡은 날이 생생하다. 오늘은 네가 운전해 보라며 선배는 쿨하게 키를 던졌다. 거대한 사파리에 약한 동물 하나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하 6층 주차장에서 1층까지 올라오는 길이 그렇게 좁고 휘어있는지 몰랐다. 올라온 뒤에는 나와 내비게이션 둘만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선배가 운전에 도움되는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줬던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아득함의 시간이 한동안 지속됐다. 돌이켜보면, 비교적 빠른 시간에 운전에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팔 할이 선배들의 인내심이었던 것 같다.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아 앞차와 접촉 직전까지 갔어도. 눈길에서 핸들을 잘못 꺾어 차가 돌아도. 길을 잘못 들어 같은 곳을 뺑뺑 돌아도. 묵묵히 기다려줬다. 일도, 운전도, 선배가 말을 아낄수록 후배가 스스로 얻게되는 깨달음이 큰가 보다.


15년이 지난 지금, 운전대를 잡는 건 아직도 나다. 시대적인 변화를 느낀다. 나는 막내에게 막내다움을 강요하는 시대에 존재했던 것 같다. 인사는 모두한테 깍듯이. 미팅 때 필기는 최대한 꼼꼼히. 남자라면 운전은 필수. 실력으로 선배들을 제압하는 천재루키가 아닌 이상, 태도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선배들의 보이지 않는 점수판을 잘 채우기 위해 겉으로 보이는 모든 면의 성실함과 나이스함에 많은 공을 기울였다. 가끔씩의 비효율도 있었다. 다른 팀의 선배가 요구하는 일까지 도와줘야 했다. 그래도 몸은 불편한데, 마음은 편했다. 뭣도 몰라도 그냥 열심히 쫓아가면 됐으니까.


지금의 시대는 막내다움이 많이 희석된 것 같다. “다움”을 요구하는 꼰대문화에 대한 거부감, 치열함과 처절함의 환경에서 비롯된 젊은 세대의 생존적 경쟁력이 단단히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장에 바로 투입돼도 좋을만큼 준비가 돼 있다는 인상을 주는 친구들이 많다. 문서 업무든 커뮤니케이션이든 능숙하게 처리하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보다 일찍 태어나서 고마울 따름이다. 이들에게는 태도를 가르치는 시간을 아껴, 업무에 대한 실질적인 부분을 코칭하는 게 더 효율적인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운전을 못하는 막내에게 운전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건 생산적인 코멘트가 아니다. 그래서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기 때문에 비교를 하게 된다. 과거의 막내였던 나, 지금의 막내인 그들. 땀을 뻘뻘 흘리며 내가 운전을 하는 동안 선배들은 뒷좌석에서 담소를 나눴다. 이제 그 뒷좌석에 막내도 있게 됐다. 저들도 나만큼 힘들어야 되는데. 천박한 생각이 가끔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게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운전에만 집중한다. 그러다가 클라이언트 연락이 와서 운전과 전화를 동시에 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천박한 생각이 다시 슬그머니 정체를 드러낸다. 뒷좌석에서 막내 웃음소리가 들리면 천박한 생각이 더 강렬하다. 기왕 운전하는 거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안 되나. 차에서 내릴 때마다 이런 뉘우침은 반복된다.


다만 그런 고민은 생긴다. 막내가 업무 외에 알면 좋은 지혜는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팀원으로서 회의실 예약, 점심 장소 등 어떤 특정 부분을 도맡아주면 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오더의 성격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실무에 대한 얘기는 아닌데, 팀에는 필요한 얘기. 어디까지가 꼰대 느낌이고 어디까지는 아닌지. 솔직히 감을 잡기가 어렵다. 그럴 때마다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느껴진다. 누구한테든 욕을 먹기 싫어하는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용기내어 얘기해 보자. 다짐하지만 여전히 발만 동동 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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