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텔라 Apr 08. 2020

자꾸 새벽을 잘라먹는 이유

은아의 일기 #1



솔직히 야심 찬 우리의 교환 일기를 덜컥 선포(?)해 놓고, 그 첫 주자가 나였으므로, 일단 내가 먼저 쓰긴 써야 하는데 아! 그때부터 무슨 글제를 가져올 것이며 뭐라고 써야 할지 앞이 막막하기만 한 거야. 아니 쓰는 지금 이 순간도 막막하기만 해. 암튼 몇 번의 초고를 엎고 “나”로부터 시작해 보려구.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니까... (너무 거창한가?^^;)     




요즘 너의 하루 마감 시간과 시작 시간이 꽤 궁금하네.

코로나로 책방 휴무 중이라 자꾸 시간이 뒤로 밀리고 있어. 나의 시작은 꽤 미뤄진 아침, 아니 많이 미뤄진 오전부터야. 밤으로부터 이어지는 새벽은 줄이고 아침으로 내닫는 새벽을 열고 싶은데 잘 안 돼ㅜㅜ. 자꾸 밤에서 출발한 새벽을 쓰게 된다. 당연히 기상 시간이 뒤로 밀리는 수밖에. 해이해진 것 같기도 하구...     


가끔가다 새벽 세 시, 네 시 카톡이 울리지.

너는 “자니?”하고 물을 때 나는 “그럴 리 있겠니”하고 단번에 답을 주곤 하잖아.

누구라도 자는 것이 일반적인 새벽, 기를 쓰며 책상 앞에 앉는 이유, 너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감성 폭발하는 밤 시간의 낭만’이라든지, ‘책을 너~~~무 좋아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정도의 어설픈 해석들이 나를 평가하기 전에, 내 생각을 좀 이야기하고 싶어 지네. (앞으로의 일기에 이런 억울함이 묻어 나오는 글이 많아지지 않을까 살짝 염려되는군 ㅎㅎ)     


아침에 눈 뜨기가 힘들어 끙끙거리는 나에게 남편이 종종 말하지.

“그렇게 힘들면서 좀 일찍 자면 될 것을...ㅉㅉ”

그래 나도 너무 잘 아는 말,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면 일어나기도 수월하겠지!

초등학생도 다 아는 그 말을 번번이 어겨가며 우리는 왜 비장하게 이 새벽을 잘라먹게 되었을까? 직장맘이라 야근을 해서라도 내일 아침 올릴 보고서 만들 일도 없고, 글을 팔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원고 마감을 지키는 그럴싸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엄마, 아내, 딸, 책방지기 등 내게 부여된 의무 같은 이름으로 종종거리며 낮 시간을 살다가, 포 떼고 차 뗀 “나”를 불러내는 시간. 그 엄숙한 의식이 대부분 우리 조각낸 새벽에서야 비로소 거행되지. 그 이유로 우리, 체력의 바닥을 느끼면서도 이 새벽을 포기할 수 없는 거구. (글로 새벽의 이유를 쓰자니 왜 이렇게 울컥하냐...)    


나의 새벽은...

모든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고, 모든 역할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는 자유의 시간이야. 모든 식구들이 잠들었을 즈음 차 한 잔 들고 까치발로 조심조심 약간의 희열과 함께 서재로 들어가지. 문 두드릴 확률 매우 낮은 시간이지만 철저히 혼자이고 싶어 마지막 톡! 문을 잠그는 것까지 하고 나면 진짜 내 시간이라고 할만한 새벽의 통로로 안전하게 들어온 거야. 내게 허락된 고요의 시간 한 허리를 듬성 잘라와 자리에 앉게 되는 거지...


때로는 피곤에 절어 머리가 쿡쿡 책상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찬밥처럼 꾹꾹 눌러놓은 내 감정들을 수면 위에 끌어올리기도 하고, 마침 수면 위에 떠 준 내면의 이야기를 얼래고 달래 차분히 글로 앉혀놓기도 하지. 마구 엉킨 실뭉치를 자르거나 풀듯 마음의 혼란을 질서로 바꾸어내고, 때론 허허로운 마음이 들 때 잔잔한 음악 한 곡, 홀짝이는 차 한잔으로 셀프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말이야. 책 속에서 불러일으킨 “나”를 만나 대성통곡하던 밤도 있었고 문학으로 내 모순을 바라보다 쪼그라들 듯 창피한 밤도 있었지. 지나간 나의 시간들을 다시 복기하고, 거기서 나는 왜 “나”가 아니었나를 곰곰이 짚어 보기도 하고.     


“나”라는 존재가 먼저 찾아지지 않고서 어떻게 엄마, 아내, 기타 관계에서의 내 존재가 성립될 수 있겠어? 의무나 역할에 우선순위를 줘버리면 “나”라는 존재는 영영 후 순위로 밀려나서 어쩌면 찾아지지 못하거나 찾기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만 같아.     


언젠가 온라인 서점에서 그런 제목을 쳐 본 적이 있어.

엄마의 꿈, 엄마의 시간, 엄마의 밤...

또 다른 엄마들의 새벽, 짬, 틈새 시간들. 모두 자신을 위한 자기만의 시간을 간절히 바라는 거겠지. 마음과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해.     


거뜬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꼼꼼한 클렌징 세수를 하고 이불 덮고, 불 탁! 끄고 깔끔하게 밤을 자르면 그만이지.

근데 말이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것보다 내가 누군지 몰라 헤매던 시간이 더 비참하다는 걸 뼈저리게 알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 동네 엄마들과 커피 먹으며 떠는 수다에는 도통 찾아지지 않는 그것, 내 삶의 궁극을 보살피는 일이 한시라도 급하기 때문이지. 나의 내면 이야기에 귀 기울일 사람은 오로지 나밖에 없다는 걸 정말이지 눈물 나도록 잘 알기 때문이라구. 이렇게까지 새벽을 붙잡도록 만드는 것들.... 너는 몽땅 알아먹겠지? 정희야?      


아이 재우다 나도 그냥 쭉~ 잠든 날이면 내 시간을 통째로 날려 먹은 듯한 아쉬움에 퍽 우울해지기도 한 경험 나만의 경험은 아닐 거야 ㅎㅎ

하루에도 백 번 엄마 엄마~ 종알종알 말 걸어오는 아이들의 질문에 호응하고, 끼니때 맞춰 밥하고 청소, 빨래, 설거지, 책방 자잘한 살림들, 모임 진행과 손님 응대,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치르고, 도리를 하고 사는 우리들의 “나” 좀 찾겠다는 무언의 외침.

참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그 긴 낮시간 다 뭐하고?라는 비판적 물음들이 분명히 당도하겠지만 거기에 대한 억울함 내지 명쾌한 해명을 또 차후에 한 번 하도록 하지 ^^    

 

여하튼 오늘도 일찍 자기는 틀렸다. 내일 심하게 눈 비비겠군...     

뭣이 중헌디...     


은아 씀 



매거진의 이전글 은아, 정희 교환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