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하는 인간
작년 그러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2023년 말, 추운 겨울바람을 쳐다보다(허한 내 마음을 쳐다본 게 맞을 거다) 친구에게 sos를 쳤다. 나 지금 굉장히 힘드니까 위로가 필요하다고 했다. 누구에게 부탁 잘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거절당하기 싫어하는 방어적 기제가 상당한 나로서 이런 sos는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이유로 친구를 불러낸 건 내 생에 처음이니까.
육체와 정신이 고갈상태였다. 매일 맨바닥까지 박박 긁어 에너지를 쓰는 기분이었다. 핸드폰 충전기를 꽂고 겨우 전원 켜고 1%, 2% 채워진 폰을 붙들고 급한 용무를 볼라치면 금세 꺼져버리는...
이런 마음 상태로 꾸역꾸역 한 해를 넘기자면 나의 새해는 누적된 무게로 무너질 게 뻔했다.
그래서 급작스럽게 모든 것을 놓고 떠났다.
말레이시아 한 달 살기를 선택하고 3일 만에 비행기 티켓, 숙소를 예약하고 책방 한 달을 모임 선생님들께 맡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거기서 나는 밥을 먹고 내 마음 돌보는 것에만 24시간을 썼다. 하루, 이틀, 일주일, 열흘. 일체 다른 역할이 들어가지 않는(아이들 식사와 케어정도만 최소한으로 에너지를 할애하고) 단조로운 시간 안에 나를 두었다. 여유 있게 힘을 채워 넣는 일, 드넓은 하늘의 구름을 감상하고 밀림과 같은 숲을 내려다보며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낯선 곳에서 내 존재를 바라본다는 것,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나를 홀로 두어 보는 일, 이제껏 만나오던 나와 결별할 작정을 하기라도 하듯 지친 안녕을 고하고 새로 태어나기라도 하겠다는 듯, 밥 한 그릇을 옹골지게 먹고 낸 든든한 기운이 하루 쌓이고 이틀 쌓여갔다. 그 한 달의 시간 동안 나는, 꽤 나를 사랑하고 자신감도 부쩍 채워 돌아왔다. 그렇게 추스르고 돌아온 2024년의 겨울은 떠날 때의 겨울과는 사뭇 다른 겨울이었지.
2025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무리해서라도 진행시키고 싶은 일이 있었다.
무리할(?) 일은 다름 아닌 내 집에 대한 정리였는데 단순히 청소기 밀고 닦고 쓸모의 유무를 가려 한 짐 버리는 정도가 아닌, "뒤엎음", "이전과 같지 않음", "새롭게 태어나는 것과 같은" 정도의 성격이어야 했다.
우선은 적지 않은 비용이 들고 귀찮고 고단한 실행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니 쉽게 마음먹어지는 일은 아니나 그 일을 새해에 넣기로 한 것은 물리적 공간과 심리적 공간은 엄청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버리거나 처분하지 못한 채 7여 년의 시간을 한방에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전 집에서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올 때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그럴싸한 리모델링도, 물건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급하게 이사를 했다는 변명을 깔고. 7년 되도록 손 한 번 못 대본 쓰레기에 가까운 많고 많은 짐들을 외면하고 살자니 내 마음속에서도 7년간 찝찝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다.
서랍이나 수납장마다 얽히고설킨 내용물들, 쓸모와 쓸모없음이 마구 뒤엉켜버린 묵은 살림들을 보고 있자니 내 뇌의 상태나 마음의 상태가 저와 같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자주 우울해지곤 했다. 허나 무게가 상당한 짐들과 처분하거나 정리하는데 걸릴 시간을 꼽아보니 하루하루 근근이 쓸 정도의 내 에너지로는 역부족이었다.
휴일 모처럼 쉬는 남편에게 눈치 봐가며 물건 하나씩 버려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만족스러운 정리는 계속적으로 미루어지는 상황에서 돈이 좀 들더라도 차선책을 결정하기로 한 것, 정리 업체를 부르는 것이었다.
나의 살림을 누군가에게 맡겨 정리를 부탁하는 일이 처음에는 돈잔치 같기도 했고 꽤 부끄러운 일처럼 생각되었다. 포장된 내가 다 까발려지는 느낌이랄까. 잘 된 것, 칭찬받을 만한 것만 내보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일 텐데 관리 안 된 어떤 면, 채 정돈되지 못하거나 심지어 방치된 어떤 면을 모두 한꺼번에 들키는 걸 감수해야 한다니 사실 묘한 망설임이 있기도 했다. 물론 내놓은 집(이사 계획이 있으나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이 인간의 일인걸)이 계획대로 팔려 이사 가는 김에 리모델링도 하고 정리도 한방(?)에 하면 깔끔한 일이겠으나 어디 사람 계획이 쉽사리 이루어지는가 말이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망설임 끝에 결심하고 결심이 서자마자 마음을 돌릴 수도 없게 잠금장치 같은 것을 해버렸다. 업체 비교가 길어지면 또 마음이 주저앉을 수 있으니 최소한으로 하고 계약서를 쓰고 날짜를 못 박아버렸다.
애들을 키우는 부모로서 아직 분리되지 않은 두 남매의 방 분리도 내겐 시급하고 중요한 숙제였다. 진즉 해 주어야 할 부분이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늦어졌다. 두 녀석 모두에게 편안하고 아늑한 자기만의 공간을 선물한다는 것이 부모로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특히 사춘기를 보낼 큰아이의 독립된 공간은 엄마로서 조급함을 불러오게도 하였다. 업체 계약 후 아이들 방에 넣을 가구를 보러 갔다. 하얗고 반듯한 책상과 책장, 침대를 보니 벌써 마음이 흐뭇하다.
그렇게 날짜가 되고 이틀간의 대공사 같은 집정리가 이루어졌다. 돈을 지불한 일이지만 정리업체에서 오신 분들 사이에 끼어 나도 이틀 동안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녔다. 옷, 책, 살림을 분류하고 버릴 것을 담고 정리에 동참하다 보니 목구멍이 싹 다 말라버릴 만큼 진이 빠졌다. 정리 후 몸살이 왔으나 아픈 몸에 비할 수 없는 정신적 만족감이 하늘을 찌른다. 남의 손을 빌리거나 돈을 들인 일이지만 필요할 때 과감하게 결정하고 꼭 써야 할 부분에 돈을 썼다는 생각에 긍정의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집안 분위기를 바꾼다는 것, 데코나 인테리어의 의미가 아니라 정리 정돈이라는 영역이 이렇게 큰 것이었어.
언젠가 정리 전문가가 유튜브에서 자신의 보람된 일을 소개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우울증 환자여서 매번 죽음을 생각하던 분의 이야기였는데 정리의 도움을 받고 살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같은 경험이 없던 그때는 그렇구나 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이해된다.
내 머릿속 같은 뒤죽박죽 엉클어진 공간을 마주할 때 그러나 그것에 전면 뛰어들 용기와 에너지는 없을 때! 그 탁한 에너지가 기억난다. 누구한테 도와달라는 말 잘 못하는 내가 이렇게라도 나를 바꿔보겠다는 신호탄을 터뜨린 것은 단순 집 정리를 해서 얻어진 개운함 같은 것과는 다른 의미리라.
마음과 머릿속은 늘 풀리지 않은 그 무엇이 방치된 채 무겁고 어둡게 나를 누르고 있었다.
그런 상태의 것을 나는 "여력 없음"으로 회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 집의 살림 2/3가 없어졌다.
그런데 불편 없이 살아진다. 말끔하고 단정한 기분으로 살아진다.
쓸모 있음으로 간주된 많은 영역의 사물을 쓸모 있음과 없음의 영역으로 다시 재편하는 일이었다.
내 삶에서 작은 변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서도 공간에서도 드디어 차서가 생긴 기분이다. 우리 집 살림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가성비에서 뒤떨어지고 효율면에서 뒤떨어진다 여겼던 일에 하나하나 손길을 주어 정갈한 마음을 내는 중이다. 간신히 짝을 맞춘 양말을 한 번 뒤집어 흩어지지 않게 개킨 빨래. 그 행위의 내 마음은 어떤 소리를 내고 있었는가. 빨리 해치워야 할, 별 중요하지 않은 성가신 일에 한 종류였을 뿐 어떤 의미가 있었나 가만 생각해 본다.
요즘 나는 양말 개키는 일에도 내 마음을 만지듯 마음을 두어본다. 정갈하게 양말을 펴고 1/3씩 곱게 펴 한쪽을 말아 넣어 반듯한 사각형이 되게 한다. 그때와 지금 바쁜 일상에는 변함이 없다. 양말 개키는 일에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한다고 해서 중요한 일을 못하는 일은 없었다. 남편의 양말 어디 부분이 많이 닳았네. 애썼네. 우리 애쓰면서 사네. 이 양말을 신고 열심히 일 해서 우리가 웃고 사네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비단 양말뿐이겠는가.
어떤 수납장, 옷장, 서랍을 열든 제자리를 찾아 자신의 몫을 하는 사물이, 나의 살림이, 나의 마음이 가지런히 그 자리에 있다. 소중하고 고맙게 거기 있다.
내가 어떤 손길로 살림을 대하는가.
나는 어떤 마음으로 내 환경을 관리해 나가는가.
일상 아주 사소한 일에 마음을 내는 일은 어디서부터 동력을 얻는가
한 달 반이 지난 지금 우리 집은 새끈 한 새 아파트 부럽지 않은 정갈하고 따뜻한 보금자리로 잘 유지되어 가고 있다. 마음의 상태와 우리 집 상태가 다르지 않도록 할 작정이다.
두 해 겨울을 나는 마음을 비우고 집을 비우면서 새싹이 흙을 뚫고 나오듯 봄 에너지를 불러냈다.
소원컨대 단정하고 정갈하게 살고 싶다.
다음 겨울에 나는 어떤 정리를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