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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부지곰 Aug 22. 2024

시대유감

K-고3 생존기

  퇴근하고 서둘러 오느라 숨이 찼다. 대강당에 들어서자 수백 개의 붉은 좌석이 모눈종이처럼 빽빽하다. 빨간 정렬 사이로 나를 향해 흔드는 손. 자세히 보니 서준이 엄마다. 나도 아는 체를 하며 옆에 앉았다. 형식적인 안부를 나누며 단상을 바라봤다. 곧 설명회를 시작하니 장내를 정리해 달라는 안내가 울려 퍼졌다. 2023학년도 대학 수학 능력 시험이 한 달 전에 끝났다. 학교 설명회는 내년 입시 전략과 올해 입시 결과로 이루어졌다. 교감 선생님께서는 이제 여러분의 자녀들은 수능이 331일 남았다고 하시며, 이미 고3이라고 강조하셨다. 듣는 내내 숨이 막혔다.


  설명회가 끝나고 너 댓 명의 엄마들과 근처 카페에 갔다. 차가 나오기도 전에 정보통 정훈이 엄마가 입을 뗐다. “우리 정훈이는 이번 겨울방학에 시대유감(가명)에서 수학이랑 국어 수업 들어야 하는데 시간표가 꼬일까 봐 걱정이야. 수 1은 강기철 샘이랑 장수현 샘 중에 해야 하고, 미적분은 이지형 샘으로 하고 싶은데 국어 박성준 샘이랑 시간이 겹쳐서 메가스무디(가명)로 가야 할 것 같아.” 나는 유명 강사의 이름이 줄줄 나오는 그녀의 부지런한 입술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나는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이름만큼 강사명이 늘 헷갈리던데 어쩜 저렇게 술술 나오는지 신기했다. 받아 적고 싶었지만 속도가 너무 빨랐다. 되물을까 고민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괜스레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렸다. 그때 여기저기에서 문자 알람이 왔다. 시대유감이었다. 이 학원은 수능 만점자가 다닌 곳으로 유명세를 탔다. 내일 오후 4시에 선착순으로 강좌 접수를 받는다는 메시지였다. 꼭 이렇게 갑자기 알려준다며 엄마들은 볼멘소리를 냈다. 그러면서도 모바일보다는 PC가 빠르다, 반차를 내서라도 피시방에 가야겠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학원 접수가 뭐 그리 대수라고 저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일 미국에서 오는 언니를 마중 갈 계획이었다. 언니가 보내준 E티켓을 확인했다. 하필 오후 4시 반 도착이다. 남편과 아들에게 수강 신청을 부탁하자 다들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내 차지다.


  인천 공항 안에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카페를 미리 검색해 봤다. 그리고 일찌감치 집에서 출발했다. 노트북의 터치 패드는 아무래도 느리니 유선 마우스를 따로 챙겼다. 공항에 무사히 도착해 지하에 주차했다.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에 내렸다. 그리고 연결통로 근처에서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다는 블로그를 지도 삼아 컴퓨터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리저리 둘러봐도 항공사 사무실만 보일 뿐 인터넷 카페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3시 45분이었다. 난간에 기대 몸을 걸치고, 1층 국제선 도착장을 내려다봤다. 저렇게 분주한 인천 공항에서 노트북을 찾는 것은 인천 앞바다에서 진주를 찾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휴대전화로 해보자.' 나는 4년 만에 만나는 언니와의 극적 상봉과 학원 접수 둘 다 놓칠 수 없었다. 1층으로 내려가 국제선 도착 전광판을 훑어 언니의 항공편을 찾았다. D도착장이 마주 보이는 긴 의자에 앉아 시대유감에서 보낸 문자를 다시 읽어보며 심호흡을 했다.


  3시 55분이다. 와이파이를 끄고 모바일 데이터를 켰다. 사용 중인 앱은 모두 닫았다. 입김을 불고 소매를 끌어당겨 액정 화면을 닦았다. 손바닥을 마주대고 힘을 주어 손가락 스트레칭을 했다. 유명 가수의 콘서트 티켓팅에도 성공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내 안에 있는 긍정의 힘을 이끌어냈다. 이제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접속 시간까지 계산해 전략을 세웠다. 시계 앱을 켰다. 눈도 깜빡이지 말고 숨도 참다. 3시 59분 55초, 56초, 57초. 이때다. 재빨리 모바일 전용 링크를 클릭했다.


  드디어 창이 열렸다. 학생명, 소속 학교, 학년, 전화번호까지 빠르게 입력하고 휴대전화 인증 번호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1시간 같은 10초를 기다려도 인증번호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공항이어서 통신 장애가 있다고 생각해 다시 인증 번호 전송을 눌렀다. 30초를 기다려도 오지 않아 몇 번을 다시 눌렀다. 벌써 4시 6분이다. 후기를 읽어보니 3분 컷이라고 하던데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했다.


  4시 11분, 드디어 6자리 인증 번호가 도착했다. 그런데 맞지 않는단다. 이번엔 번호 2개가 동시에 도착했다. 그제야 번호 전송 버튼을 여러 번 눌렀던 게 한꺼번에 오는 것을 깨달았다. 서너 개의 번호가 뒤이어 왔지만, 모두 인증에는 실패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마지막 번호까지 기다렸다. ‘동시 접속 폭주로 로딩이 걸릴 경우, 새로고침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권장’이라는 안내 문자가 이런 의미였었구나,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4시 23분에서야 인증에 성공했다.


  창이 바뀌고 수십 개의 강좌가 두루마리 풀리듯 아래로 끝없이 펼쳐졌다. 적어둔 강사명을 검색하니 역시나 모두 마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기 신청을 우르르 눌렀다. 그제야 긴장이 탁 풀리면서 어깨에 잔뜩 들어갔던 힘도 풀렸다. 뻐근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고개를 드니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언니가 보였다. 나는 벌떡 일어나 뜨거운 포옹을 했다.


  집에 돌아오니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신청은 못했지만 대기는 해 놨다고 했다. 몇 분쯤에 대기했냐고 해서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고등학생 중에 시대유감에 직접 와서 강의를 듣는 학생이 몇 프로나 되겠냐고, 인터넷에도 일타 강사가 많다며 녀석을 위로했다. 하지만 “서준이랑 정훈이 엄마는 성공했다는데…” 하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기가 몇 번인지 알아봐 달라고 당부하면서 녀석은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대기 478번, 547번, 798번…(네 자리 숫자는 적지 않겠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놀라운 숫자와 K입시에 대한 나의 무지함에 헛웃음이 났다. 한 동안 나는 아들을 피해 다녔다.


  두 달이 지났다. 메가스무디에서 듣는 단과 수업의 좌석 예약이 오늘 저녁 11시다. 지난번 자리에서는 모니터가 보이지 않았다며, 앞으로는 5열 이내로 해달라는 아들의 지시가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성공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이 방을 두드리며 자랑스럽게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줬다. 녀석과 하이 파이브를 하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불을 끄고 나가려는 내게 시대유감의 대기 번호는 좀 줄었느냐고 물었다.


  “어제 전화해 봤는데 아직 400번대래…그렇지만 넌 엄마에게 언제나 1번이야. 알지? 대기는 필요 없어! 아무 때나 등록 가능해. 좌석도 늘 맨 앞 줄 VIP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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