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그서 본 아들 모습이 마지막이었어

군산 해망굴과 산동네

by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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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놈들이었다. 남의 땅을 뺏어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도로 이름에도 당시 일왕의 할아버지 이름을 갖다가 붙였다. 그래서 군산의 가장 번화가를 명치통(중앙로 1가)이라고 부르게 만들었다. 명치통에서 바다 가까이에 있는 해망동과 연결하기 위해 파 들어간 반원형 터널. 길이 131m짜리 해망굴이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조선 사람들은 더럽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해망굴 어귀에 있는 서초등학교 자리에는 신사광장이 있었다. ‘왜놈들’한테나 소중한 신사참배, 조선 사람들에게도 무력을 쓰면서 강요했다. 일제는 사람들에게 조선말도 못 쓰게 하면서 조선 청년들을 징병했다. 남양군도(남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많은 섬들)로 끌고 갔다.



“이번 전쟁을 의로운 전쟁, 성스러운 전쟁이라 하지 않고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역사학자 최남선은 제 나라 청년들 등에 칼을 꽂았다. 일제는 징병을 권하는 시가행진을 계획적으로 했다. 그렇게 젊은이들을 모아서는 대대적인 환송행사를 했다. 군산은 해망굴 앞 신사광장에서 했다. 그때 본 아들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던 부모들도 많았다.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벌이던 일제는 조선 청년들을 ‘총알받이’로만 여겼다.


한국전쟁 때, 해망굴은 군산에 주둔한 북한군의 지휘본부였다. 날마다 유엔군의 공군기는 해망굴을 폭격했다. 군산에는 북한에서 온 민간인들도 정착했다. 해망동 999번지는 피난민들의 수용소가 되었다. 방 하나, 부엌 하나인 집에서 사는 300여 가구. 그들을 먹여 살린 건 해망굴 너머에 있는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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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한 뙈기 없으니까 평생 맨손 어업을 한 거여. 배 타고 내초도 가서 굴이랑, 바지락, 꼬막 캐서 내다 팔면서 살았어. 황해도가 고향이여. 임시로 피하면 된다고 해서 젊은 사람들만 피난 온 거여. 인자는 결혼하고 새끼들 낳고 키운 군산이 고향이제.”



피난 1세대 어르신은 말했다. 진짜로 군산 앞 바다는 ‘어머니 바다’였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물때에 맞춰서 몸이 부서져라 갯것들을 잡아갔다. 다음 날이면 바다에는 또 돈 되는 것들이 가득했다. 그때는 해망동 어시장에도 온갖 물고기가 넘쳐났다. 집 지키는 개도 물고기를 밟고 다닐 정도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바다에 기대면 살 수 있었다.


해망동은 바다를 바라보는 동네. 겨울에는 온 몸을 찢을 듯이 바닷바람이 달겨들었다. 여름에는 해망굴 덕분에 바람이 통해서 시원했다. 동네 사람들은 무더위에만 “나 해망동 살아”라고 자랑했다. 비탈진 계단을 올라야만 갈 수 있던 구석구석의 집들.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변함없는 건 바람뿐. 잊지 못 하는 어르신들은 해망굴에 앉아서 여름 한낮을 보낸다.




사진은 군산시청에서 제공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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