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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본인 독자

by 배지영

비가 진짜 무섭게 쏟아졌다. 수문을 개방한 댐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당진에서 군산 내려오는 길이었다.


도로에 고인 물들은 차가 지날 때마다 덩치를 불려 잽싸게 일어섰다. 주행하는 자동차의 앞유리로 굉음을 내며 떨어졌다. 마치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아서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멈출 데가 없어서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무사히 집 도착. 어찌나 운전대를 세게 잡고 왔는지 철봉 매달리기 한 것처럼 팔이 후들거렸다. 샤워하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고서 나지막이 읊조렸다. 같이 길 위에 있었던 운전자들이 모두 안전하게 귀가하기를.


‘일 강수량 극값 경신’.


비가 400여mm나 내린 군산의 소식은 뉴스를 통해 곳곳으로 전해졌다. 뉴질랜드에서, 서울에서, 부산에서 사람들이 안부를 물었다. 소파에 누워서 답장을 하는 동안 빗길 운전에 털렸던 영혼이 서서히 돌아왔다. 그러자 미유키 씨가 너무나 걱정됐다.


도쿄에 사는 미유키 씨는 그룹 ‘신화’ 멤버 김동완 씨의 팬이다. 2017년 여름에 ‘우리 동완 씨’ 공연 보러 서울 왔다 돌아가는 길에 인천국제공항 서점에서 <소년의 레시피>를 샀다.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본어로 번역했다. 2019년 늦가을에는 배지영 작가 책을 사러 한길문고에 왔다.


각자의 모국어로, 미유키 씨와 나는 같은 작가의 책을 제법 읽었다. 공통으로 아는 아티스트도 많아서 서먹서먹하지 않았다. 그래서 1~2년에 한 번 정도는 만날 줄 알았다. 코로나는 그런 기대를 간단하게 무너뜨렸고, 군산 한길문고에 올 수 없는 미유키 씨는 배지영 작가가 신간 낼 때마다 교보문고 페덱스로 10여 권씩 주문했다.


4년 만에 미유키 씨가 폭우를 뚫고 군산에 왔다.


한국어 능력시험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재외동포 및 외국인’이 보는 시험이다. 1급부터 6급까지 있는데, 미유키 씨는 6급(만렙)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5급이었다. 그때 나는 의도적으로 천천히 말했다. 이번에는 말하는 속도를 의식하지 않았다. 완전히 알아들은 미유키 씨는 술술 대꾸했다.

7월 15일 토요일, 서울에서 오전 7시 40분 고속버스를 타고 온 미유키 씨. 우리는 갈치구이정식부터 먹었다. 가고 싶어 했던 월명공원 편백숲에는 진입하지 못하고 초원사진관, 고우당, 이성당에 들렀다. 한길문고 회원으로 등록한 미유키 씨는 책 10권을 샀다.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고 근대역사박물관에 들렀다가 오후 5시에 서울행 버스를 탔다.


“작가님, 지금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오후 8시 19분, 미유키 씨는 동대문에 위치한 호텔 사진을 보내왔다. 마음 졸이지 말고 편안히 자라는 뜻이었다. 다음 날 미유키 씨는 도쿄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런데 내 마음은 미유키 씨와 헤어지고 무려 26시간이 지나도록 헛헛했다. 강성옥 씨가 전분 사오래서 일요일 밤에 마트 갔다가 알았다. 옛날에 일본어 공부할 때 한국여행 온 일본인이 조미김 사는 회화가 있었다. 미유키 씨 인스타그램에도 선물받은 한국의 조미김 사진이 있었다. ‘도시에 사는 친척’처럼 미유키 씨는 선물을 바리바리 가져왔는데 나는 미유키 씨를 빈손으로 보냈네. ㅠㅠ



#군산한길문고

#기쿠치미유키씨

#우리동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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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바로책이야

#소년의레시피

#남편의레시피

#소방관들을위한특별한한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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