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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한 뒤에 남겨진 향기

by 배지영

말줄임표 때문에 아찔한 적도 있었다. 밭에 씨를 뿌리는 것처럼 “나는.... 할머니 생각을 할 때마다.... 아버지가 미웠고.... 엄마 생각이 나서.... 가슴이.... 아팠다....”같은 문장을 썼다. 글에 여운을 주고 싶다며 말줄임표를 남용했다. 없는 게 낫다고 선을 그어줬다. 1년에 한 번, 식구들과 친구들이 몰라줘서 괜히 서운한 오후 4시쯤, “오늘 내 생일인데....”라고 할 때만 쓰자고 못 박았다. -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사계절, 배지영


말줄임표에 대한 생각은 지난 토요일부터 바뀌었어요. 사인회에 대해서 말할 때 꼭 필요합니다. 이런 식으로요.


사인회는..... 사인회는...... 망했어요.....


날씨가 좋았다고 해도 사인회는 잘 안 됐을 수 있어요. 2023년과 2024년에 연달에 두 번 사인회 성공했을 때 제 자세는 멋졌어요. 의자에 앉지 않고 몇 시간 동안 계속 서서 사인했거든요. 그토록 멋진 태도는 사인회 성공의 3%, 나머지 97%는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한 실무자들과 일부러 시간 내서 찾아와 주신 분들 덕분이었죠.


그걸 아니까 <학교 운동장에 보름달이 뜨면> 사인회도 저 혼자 힘으로 하지 않고 ‘나운동 나들이’에 기댄 거예요. 날씨는 당연히 좋고, 엄마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들 손 잡고 많이 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총 7권 사인. 10권은 채우고 퇴근하려다가..... 실낱 같은 희망도 안 보여가지고.....(말줄임표 막 씁시다) 밤에는 혼자서 은파호수공원 갔어요. 산책만 하려다가 장우산을 쓴 채로 뛰었습니다. 웅덩이에 빠지니까 구정물처럼 보이는 빗물이 얼굴로도 튀었어요. 기분이 나빠지지 않더라고요. 시련은 이미 사인회에서 겪었으니까요.ㅋㅋㅋㅋㅋ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거실 맨바닥에 누웠습니다. 책도 읽기 싫고 뉴스도 보기 싫고, 사인회에서 받은 꽃이 눈에 들어왔어요. 저는 플로리스트 선생님들이 창조한 모습 그대로 꽂아놓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얼음물 갈아주며 감상하다가 시드는 꽃 하나씩 골라내면서 며칠 뒤에야 작은 꽃병으로 옮깁니다.


단, 사인회 망한 날에는 꽃꽂이도 예외로 칩시다. 핑크거베라 꽃다발은 그대로 두고요, 열한 가지의 꽃이 섞인 꽃다발은 제가 좀 만졌습니다. 꽃병 4개에 나눠 꽂았는데 사진은 3장뿐. 그래요, 꽃꽂이 망했어요.


장마가 오고, 낮 기온이 30도에 이르러도, 밤에는 창문 닫고 잡니다. 책상과 침대 머리맡에 꽃병을 잘 모셔두고요. 밤새 꽃향기가 가둬진 방안에서 눈을 뜹니다. 사인회 망했어도 얼마나 향기롭게요. 뭐 그렇다고요.ㅋㅋㅋㅋㅋ

#고맙습니다

#꽃부티크플로버

#한길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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