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 여성이 한길책방으로 들어오고 난 뒤에 체크 셔츠에 뿔테 안경을 쓴 남성도 왔다. 조금 서먹서먹해 보이는 두 사람, 인사를 나눌 때 표정이 환했다. 밖은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비가 쏟아지는데 서점 안은 특수 효과 필터를 씌운 것처럼 화사해졌다.
‘꺄아! 점심도 안 먹고 책방에서 버틴 나 자신아, 잘했어.’
두 젊은이는 서가에서 꺼낸 책을 펴들었다. 작은 우산 하나를 두 사람이 쓴 것처럼, 젊은이들은 책 한 권을 두고 나란히 붙어 섰다. 마침 내가 읽던 책은 안희연 시인의 <줍는 순간>, 54페이지 ‘나는 너무나 기울어져 있었던 거야’.
너와 헤어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안희연 시인은 독일 브레멘에서 보았던 젊은 연인을 떠올린다. 소년에게 키스를 조르는 소녀는, 소년 쪽으로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다. ‘사랑은 상대를 향해 한없이 기울어지는 마음’. 나는 긴 테이블에 앉아서 두 사람의 기울기를 가늠했다.
‘아니이, 배지영 씨. 책방에서 데이트하는 젊은이들이 건축물이야? 한옥 목수들처럼 왜 ‘수직추’를 두 사람 사이에 달려고 하는 거야? 누구 쪽으로 더 기울기를 바라는 건데? 존재만으로 그냥 너무 사랑스럽잖아.‘
내면 어른이 튀어나와서 나를 꾸짖었다. 숨죽이고 있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젊은 연인들은 서가 맨 끝으로 숨어버렸다. 기울기 따위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자리였다. 책방 언니는 책 정리하러 저 끝으로 가야 한다고 나한테 와서 말했다. 나는 속삭였다. “안 돼요. 기다려요.” 바짓단이 젖어 있던 젊은이들은 50분 만에 떠났다.ㅋㅋㅋㅋ
책방에 남은 사람은 네 명. 책방 언니, 50대 후반 선생님 둘(책방 언니의 친구들), 그리고 나.
태어나 처음으로 로맨스 영화를 본 사람들처럼 볼이 발그레했다. 시인의 언어, 예를 들면 상대를 향한 기울기나 사랑을 멈추는 방법 같은 거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안 볼라고 해도 보이더만. 남자애가 여자애 이뻐서 죽어 죽어. 손 만지고 어깨 껴안고. 아고, 둘 다 너무 이뻐.”
와! 50대 후반 선생님들 대범하네. 안 보는 척하면서도 그 예쁜 젊은이들이 뭐하나 직관하셨네.
씨름왕 출신, 며칠 전에는 골목길 키스 대장으로 셀프 취임한 나는 배워야 할 것이 참 많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젊은 연인들이 앉았던 의자를 기록하고, 그 연인들처럼 즉석 사진기 앞에 섰다. 외로워 보일 것 같아서 <학교 운동장에 보름달이 뜨면>을 들고 찍었다. 오후 4시, 허기가 몰려왔다. 연인들이 책방에 있을 때는 하나도 배 안 고팠는데.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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