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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게 아름답다

by 배지영

토요일에 당진시립도서관에서 1인 1책 쓰기 수업한다. A4 36매, 글자 크기 10포인트. 첨삭 수업이라서 몇 번씩 읽는다. 내 수업에 오는 선생님들이 나중에도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니까 정성 들여 준비한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에는 다른 날들보다 조금 더 분주하고 예민하다는 뜻.


“지영아, 점심에 밥 먹을 수 있어?”


목요일 아침, 계주님(최길임 씨, 군산의료원 30년 이상 근속)이 카톡으로 물었다.


최길임 계주님은 내가 점심을 잘 안 먹는 줄 안다. 그런데도 만나자고 하면? 저번에 길임이가 갑자기 연락했고, 하필 목요일인가 금요일이었고, 나는 바쁘다고 했다. 나중에야 길임이 큰일을 겪었다는 걸 알고는 혼자 꺼이꺼이 울었다. 이제 최길임이 시간 나냐고 물어보면 요일을 따지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오늘? 알겠어.”

“지영아, 지현이도 밥 같이 먹을 수 있냐고 물어봐.”

한길문고 근처 밥집, 최길임 계주님은 완전 환한 얼굴로 들어왔다. 긴 팔로 조그만 택배 상자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드디어 왔어!”


나는 좀 모자란 사람. 배지현은 그걸 세련되게 표현한 적 있다. “자매는 시집살이랑 직장생활을 안 해서 눈치가 없어.” 우리가 친구 된 지 24년, 나를 좀 아는 길임은 아들 둘을 잘 키운 경력을 발휘했다. 돌려 말하지 않고 사춘기 남자애들한테 하듯이 정확하게 알려줬다.


“만년필이야, 만년필. 1년 반인가 걸렸어.”


2023년 가을에 마산 합포도서관 강연에 여행 삼아 길임이랑 같이 갔다. 길임도 그날 마산시민들처럼 강의실에 앉아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을 들었다. 내가 독자분들한테 사인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부산에서 오신 주머니 작가님(배지영 작가 전국 팬클럽 회장, 진짜로 떡을 해와서 강연 참석하신 분들에게 돌림)과도 인사했다.


그날 저녁에는 호텔에서 알려준 숨은 맛집으로 갔다. 여행자니까 줄 서서 밥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산책했다. 다음날에는 호텔 조식 먹으며 너무 좋다고 감탄 100번씩 하고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함안고분군으로 갔다. 많이 걷고 많이 웃었다. 작은 카페에서 먹은 디저트와 음료도 나중에 오래오래 얘기할 정도로 모든 게 좋았다.


2024년에는 연초에 12월 강연까지 잡혀 있었다. 가을에는 경남 창녕도서관에서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길임에게 미리 휴가를 내라고 했다. 온천도 하고, 우포늪에도 가고, 주머니 작가님도 또 만나고, 기옥숙 교장 선생님(1박 2일 일정 꽉 채워서 강연 초대해 주신 적 있음)에게 인사도 드라자고 했다.


“지영아, 김어준 겸손몰에서 만년필 샀어. 진짜 최고로 멋지고 진짜 작품 같은 거래. 근데 제작 오래 걸린대. 가을에는 오겠지? 창녕 강연 가서 사인 많이 해.”


벚꽃 피었을 때인가 길임이 말한 만년필은 여름이 지날 때까지 오지 않았다. 가을 창녕도서관, 나는 원래 쓰던 네임펜으로 사인했다.


아쉬울 게 없었다. 주머니 작가님은 부산에서 일부러 또 찾아오셨고, 기옥숙 교장선생님은 자연농법으로 지은 쌀을 우리 셋에게 한 포대씩 나눠주고, 한우 구이도 사주셨다. 기옥숙 선생님 안내로 진흥왕 척경비도 보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도 듣고, 밤중에는 길임과 오래오래 온천했다.


“고유한 문자를 가진 우리 수준의 문화에 걸맞은 자기 만년필이 없다는 걸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다.” - 김어준


고려청자 베개를 재해석해서 만든 만년필 ‘베개’. 택배를 뜯어본 길임이 얼마나 좋아했을지 그려진다. 식당에서도 냅킨 한 장 허투루 쓰지 않고, 차려진 거 먹어야 하니까 맛있는 반찬도 더 달라고 하지 않는 길임. 자기한테는 만 원 한 장 쓰지 않고 아끼는 최길임은 친구가 뭐라고 수십만 원짜리 만년필과 케이스를 선물했다.


비싼 게 정확하다(여론조사 꽃)

비싼 게 아름답다(만년필 베개)


이제부터 나는 사인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사주셔야 하는데요?

도와주십쇼!ㅋㅋㅋㅋㅋㅋ


#쓰는사람이되고싶다면

#학교운동장에보름달이뜨면

#나는진정한열살

#소년의레시피

#주머니작가님

#지렁이학교

#우정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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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_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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