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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이어깨동무 Apr 20. 2020

여러분이 맞았어요, 내가 틀렸어요 - 임요한

평화를 보는 새로운 시선, 피스레터 다시 읽기 18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잡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역사가 놓치고 있는 평화적 가치를 발견하여 글로 쓰고, 함께 읽고 소통하는 실천을 통해 평화적 가치와 담론을 공유하고, 우리의 평화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피스레터 다시 읽기>에서는 피스레터에 기고되었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홈페이지(www.okfriend.org)나 평화교육센터 블로그(https://peacecenter.tistory.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피스레터 통권 19호(2019년 8월 16일 펴냄)에 기고된 글입니다.  


[좌충우돌 교실이야기] 


교사는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고, 학생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려고 하면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수업은 학생 중심으로 하되 학생 활동 시 학생들 사이를 순회하며 관찰하다가 학생들이 논의의 방향을 잡지 못한다든지, 학생들의 논의가 학습 목표와는 다른 엉뚱한 쪽으로 전개될 때에는 즉각 개입하여 옳은 방향으로 학생들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배웠다.

오랜만에 학급 회의가 열렸다. 안건은 ‘체육대회 우리 반 반티 선정’. ‘나는 학생들의 자율권을 존중하고 학생들이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게 조력하며 민주적 절차에 따라 학급을 운영하는 담임교사이므로’라고 쓰고 ‘급히 처리해야 할 공문이 있어서’라고 읽는다. 어쨌든 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무조건적으로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하니까, 반장을 중심으로 여러분들끼리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토론해서 잘 정해 보세요. 제가 있으면 여러분이 불편할 수 있으니까 저는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교무실로 뛰어 올라와 긴급한 공문을 처리하고 있었다. 학급 회의 시간이 끝나갈 무렵, 반장이 교무실로 와서 

“선생님, 저희 반티 결정했어요.”
“응, 뭐로 하기로 했어?”
“이걸로 하기로 했어요.” 

라고 하며 반장은 스마트폰으로 태권도 도복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게 뭥미? 이게 반티야?”
“네, 아이들이 이게 제일 좋다고 했어요.”
“모두가 이걸 원했어? 일부 아이들이 막 이쪽으로 의견을 몰고 간 거 아니야?”
“아니에요 선생님, 아이들이 전부 이게 제일 좋다고 이걸로 하자고 했어요.”
“그래? 일단 알겠어. 선생님 지금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이따 이야기하자.”
“네, 선생님.”


반장이 내려갔다. 내가 전에 근무하던 시내 고등학교(남학교)는 모든 반의 반티가 축구팀의 유니폼이었다. 내가 그동안 맡아왔던 반들도 반티로 축구팀 유니폼을 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때마다 내가 생각한 건 ‘아이들이 개성과 창의성이 없다.’였다. 온 학교의 반티가 죄다 유럽 프로 축구팀 유니폼 일색이니…….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반티가 태권도복이라고? 이걸 입고 어딜 다니지? 축구 유니폼은 개성은 없어도 축구할 때나 학교 체육 시간에 입을 수라도 있다. 하지만 이건 체육대회 당일 한 번 착용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이걸 2만 원이나 주고 살 필요가 있나? 이건 아니다. 아이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종례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 번 입고 옷장에 넣어둘 옷을 2만 원이나 주고 사는 것은 낭비이다, 우리 부모님께서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시는데 우리가 그런 소비를 하면 안 된다, 체육대회 때도 입고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옷으로 반티를 맞추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반티라는 것이 꼭 반티를 파는 웹사이트에서 사야만 반티가 아니다, 청바지에 흰 면 티셔츠라도 우리 반끼리 콘셉트를 맞추어서 깔끔하게 입으면 될 일이지 굳이 코스프레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런 옷을 사서 한 번만 입고 장롱에 넣어두거나, 버리는 것은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고 이는 지구를 병들게 하고 우리 후손들에게도 죄를 짓는 일이다, 부디 그 옷을 착용하고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옷으로 반티를 정해주길 바란다.’ 나는 아이들의 생각을 돌려놓으려고 부모님에 대한 효심에 호소하고, 지구 환경 문제까지 들먹이며 이렇게도 구차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종례를 마쳤다. 나는 당연히 세상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들이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네, 선생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각자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다음 학급 회의 시간에 최종 결정을 하기로 하고 교실을 나왔다. 

다음 학급 회의 시간, 나는 또 ‘학급 회의는 학생들끼리 하는 것이 진정한 학생 자치’라는 자기 합리화로 회의를 아이들에게 맡기고 교무실에 와서 급한 내부결재 기안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오늘은 제대로 된 결론을 내려오겠지?’ 나는 전날 이미 우리 반 단체 톡방에다가 실용적으로 입을 수 있는 예쁜 반티의 예시 사진을 대거 살포해놓고 ‘나는 당연히 여러분들의 의사를 존중하겠지만 내가 제시한 반티 중에 괜찮을 걸로 골라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엄포 아닌 엄포를 놓아둔 터였다. 학급 회의가 끝나고 반장이 올라왔다. 나는 기대에 찬 얼굴로 

“어떻게 됐어?”
“선생님, 애들이 그냥 태권도복으로 하고 싶대요.”

속 깊은 반장은 곤란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대답을 했다.
“그래? 일단 알겠어.”

‘도대체 누구 생각이냐, 어떤 놈이 계속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냐, 데리고 와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최대한 덤덤하고 쿨한 척을 해야 하므로 ‘일단 알겠다’는 말로 반장을 내려보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약간 삐친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며칠 뒤 반장이 개인 톡을 보내왔다.
“선생님, 내일 저희 반티 주문하려고 하는데, 선생님도 하실 건가요? 저는 선생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실은 아이들도 결론은 그렇게 내놓고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안 한 것 때문에 괜히 선생님께 죄송해하고 있어요.”

반장의 톡을 보는 순간 내가 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아이들은 담임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뭔가. 실은 반장의 그 톡을 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이들이 멋대로 정한 그 반티를 나는 절대 입지 않으리라는 꽁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내가 너무 잘아 보였고 그런 오기를 부리려 했던 나 자신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아니야, 선생님도 입어야지, 같은 반인데……^^ 내 것도 주문해줘.” 

반장은 아주 기뻐하며, 

“꺄~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ㅠㅜ 열다섯 명 이상 주문하면 한 벌이 무료인데 저희 반이 열여섯 명이라 한 벌을 무료로 받을 수 있어요. 선생님은 돈 내지 마세요.”
“아니야, 내야지. 너희들 중 한 명이 무료로 받든, 무료로 받는 금액을 n분의 1로 나누어서 너희가 내는 부담을 줄여.”
“아니에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선생님은 무조건 내지 마세요. 저 이만 공부하러 가야 해서, 내일 봬요.~”


반장과의 톡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아이들의 결정에 토라져 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십 먹은 어른보다 열여덟 살짜리 아이들이 더 속이 깊구나…….’
 

만국기가 휘날리는 영흥중고등학교 운동장


이윽고 체육대회 날이 되었다. 우리 학교 체육대회는 시내 학교의 체육대회와는 조금 양상이 달랐다. 도서 지역의 특성상 마을 주민들이 체험할 수 있는 문화 행사가 별로 없어서 학교 체육대회는 아이들이나 마을 주민들에게는 제법 큰 마을의 문화 행사였고, 우리 학교 체육대회에는 아직 과거의 학교 운동회의 분위기가 남아 있었다. 체육대회 날은 운동장에 만국기를 달고, 풍물패가 사물놀이 공연을 하고, 마을 어르신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종목이 있고, 체육대회를 우리 어릴 때처럼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서 한다. 중1부터 고3까지 1반은 청군, 2반은 백군, 박 터뜨리기나 공굴리기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뻔했으나 그게 없는 것이 아쉬웠다. 어쨌든 우리 학교 체육대회는 한 마디로 마을의 축제였다. 마을의 기관장들이 본부석의 한 자리씩을 차지했고, 어떤 가정은 학부모님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오셔서 손녀를 응원해주시고,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도 학교에 와서 후배들을 격려하는 모습이었다. 
 

각양각색의 반티


각양각색의 반티


아이들의 반티도 각양각색이었다. 초밥집 알바생, 정신병원 환자와 의사, 한복, 슈퍼마리오, 드래곤볼 손오공, 텔레토비 등 아주 다양하면서 어느 한 반 겹치지 않는 콘셉트로 중1부터 고3까지의 학급이 모였다. 평범한 의상은 하나도 없었다. 먼지를 듬뿍 뒤집어쓰고, 얼굴도 제법 검게 그을린 채 체육대회가 끝났다. 우리 반이 속하지 않은 청군이 우승을 했고, 우리는 준우승을 했다. 이제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응원상 학급 발표 시간이다. 중학교에서 한 학급, 고등학교에서 한 학급, 가장 질서 정연한 모습을 보이며 열심히 응원한 학급을 뽑아 적지 않은 상금을 주는 응원상은 단합이 잘 되는 학급의 상징이고,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에게는 소박한 명예가 있는 상이었다. 중학교는 1학년 1반이 받았다.

고등학교는……
“고등학교 응원상 2학년 2반.”

우리 반이 호명되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너무 깜짝 놀라 펄쩍펄쩍 뛰며 박수를 쳤다. 아이들도 깜짝 놀랐다. 응원상 수상 학급이 우리 반이어서가 아니라 담임 선생님이 점프를 너무 높이 해서 놀랐단다. 그 정도로 기쁘고 의외였다. 기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큰 칭찬을 해주고 귀가시킨 후 선생님들끼리 모인 자리, 한 선생님께서 우리 반의 응원상 수상을 축하해주시자 다른 선생님들도 연이어 우리 반을 칭찬해주셨다. 이럴 때는 최대한 몸을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저도 저희 반이 어떻게 응원상을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중 한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반 반티가 예뻐서야. 그 반 반티가 가장 깔끔하고 눈에 띄었어.”
“맞아 맞아, 너무 잘 어울렸어요. 태권도 국가대표 상비군들 같아 보였어. 담임은 사범이고. 하하하.”


선생님들의 말씀에 나는 머리가 쭈뼛 서고 귀가 시뻘게지는 걸 느꼈다. 아이들에게 반티를 다시 정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하던, 뜻대로 되지 않자 아이들에게 실망했던, 찌질 임요한 선생이 소환되어 너무 부끄러웠다. ‘아……내가 틀렸구나. 아이들이 맞았구나.’

교사가 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교사를 가르칠 때도 있고, 교사도 아이들에게 배운다. 착하고 순수한 우리 영흥도 아이들에게 내가 배웠다. 그날 저녁 좋은 기분으로 술을 한 잔 걸치고 취기를 빌어 우리 반 단체 톡으로 고백을 했다.

“오늘 우리 반티 너무 예뻤대요. 여러분이 맞았어요. 내가 틀렸어요. 오늘 수고 많이 했고……
선생님은 우리 2학년 2반 모두 모두 내 친동생처럼, 하나뿐인 내 아들처럼 많이 많이 사랑합니다.~♥”
 

사범과 제자들



임요한ㅣ인천영흥고등학교 국어 교사. 아이들에게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책 읽는 것보다 노는 것이 더 좋은 국어 교사. 여러 길 돌고 돌아 교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이 무얼 잘하는지, 이다음에 뭐가 될지 궁금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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