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 정진헌 (4)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서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잡지입니다. 우리 사회가, 우리 역사가 놓치고 있는 평화적 가치를 발견하여 글로 쓰고, 함께 읽고 소통하는 실천을 통해 평화적 가치와 담론을 공유하고, 우리의 평화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피스레터 다시 읽기>에서는 피스레터에 기고되었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피스레터는 어린이어깨동무 홈페이지(www.okfriend.org)나 평화교육센터 블로그(https://peacecenter.tistory.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시선 | 베를린 윤이상하우스에서 보내는 평화의 편지]
기해년, 황금돼지해라는 새해가 밝았습니다. 독일에서 새 해 첫날은 카운트다운과 함께 쏘아 올리는 크고 작은 폭죽 소리와 불빛으로 시작합니다. 평상시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독일인들도 저마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각자 가져온 폭죽에 불을 붙여 하늘로 쏘아 올립니다. 일 년 중 12월 말 단 며칠만 폭죽을 판매하고 연말연시에만 터뜨릴 수 있기에 가족 단위로 혹은 친구들과 함께 요란하다 싶게 새해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새해맞이 법석도 그때뿐입니다. 독일에서 1월은 그리 유쾌한 달이 아닙니다. 밤은 긴데 짧은 낮 동안에도 해 보기가 어려운 날씨 탓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쉽게 감기에 걸리거나, 우울해합니다. 성탄절 장터에서 흥겹게 보내는 12월과는 일상의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간혹 저는 1월을 보내봐야 독일에서 왜 철학이나 신학 등이 발달했는지 이해한다는 농담을 하곤 합니다. 존재 자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계절이 새해 첫 달인 1월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올 해는 연초부터 불운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일은 꼬였고, 경제적 손실도 생겼으며, 감정도 상했습니다. 액땜이라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억울한 일로 심리적 고통을 겪는 와중에 든든하게 내 편이 되어준 분들이 많았다는 것. 그렇게 마음 한편을 추스르며 스스로 평온을 찾으려 했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억울함과 분함을 부추기는 자존심과 정의감, 포기와 좌절을 종용하는 개인주의, 저항과 대안을 시도해보려는 모험심 등 내 안의 다양한 욕구와 가치관들이 서로 엉키거나 부딪쳤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이 요동치는 와중에도 이역 땅 베를린에서는 역사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중 첫 번 째는 세계 남자 핸드볼 선수권대회에 남북단일팀이 참가한 것이었습니다. 작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이어 스포츠가 평화와 화해에 기여함을 보여준 사례라며 독일 외무성 장관이 개막식 인사에서 유난히 강조하였습니다. 비록 독일과의 개막전에서 패했지만 남북한 선수들처럼, 북측 대사관 소속 직원과 가족들도 남측 사람들과 함께 공동 응원단으로 참가하였었기에 의미가 컸습니다. 장벽을 거두어 낸지 이제 곧 서른 해를 맞는 베를린은 남과 북에게 잠정적 통일과 화합을 선경험케 해 주는 접촉 공간(contact zone)이 되어 주었습니다. 경기장 밖은 빨리 어두워지고 춥고 바람이 불었지만, 단 백 명밖에 안 되는 남북 응원단이 3만 5천의 독일 관중 속에서도 뒤지지 않고 목청껏 ‘코리아 이겨라’를 외치며 뜨거웠습니다.
민족의 하나 됨을 염원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과거사와 현재를 두루 살피는 일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핸드볼 대회가 마무리된 후 베를린에는, 현재 일본에서 부당하게 차별받고 있는 조선학교 상황을 알리고 연대하고자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아동인권위원회에 일본 정부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조선학교 학부모회와 그분들을 지지하기 위한 한국시민연대 그리고 해외동포연대 분들이 참석하셨습니다. 조선학교 학부모님들은 독일까지 오시지는 못한 채 귀국하셨고, 대신 한국과 미국에서 오신 활동가분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며칠 전부터 손님맞이와 행사 준비를 나누어 진행했고, 다양한 연령대의 교민은 물론, 일본여성모임과 독일 활동가들도 초대했습니다. 남북이 하나 되는 길은 단지 한반도 영토 안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750만 정도 되는 해외 한인들도 분단국가의 축소판을 경험합니다. 그중에서 재일 조선학교의 현재와 미래는 진정한 한반도 평화의 내용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기에 동포 연대를 통한 국제적 지지세력 확보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고난의 서사시임에 분명합니다. 성공적 이야기를 위해 과거의 고난이 더욱 부각되기도 합니다. 최근 한국은 3050 클럽 즉, 5천만 이상 인구를 지닌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불을 넘는 국가들 대열에 일곱 번째로 들어섰다고 합니다.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로서는 처음이라니, 굴곡 많은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성공 신화가 미완의 역사적 과제와 현재적 어려움 등을 가리는 구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최근 한국은 계층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우리의 젊은 세대들은 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인성과 감수성이 피폐화되고 있습니다.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상황에서는 더 힘든 약자가 보이질 않고,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도 근시안적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중시하면 결국 구관이 명관이 된다는 식으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현실과 타협하거나 굴복하는 대신 무엇이 옳은 길인지 외로워도 꿋꿋이 걸어가는 삶은 고결합니다. 우리는 올 1월에 그러한 어르신을 잃었습니다. 14살 어린 소녀로 끌려가 22살까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셨던 김복동 할머니. 고인께서는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최초로 위안부 문제를 직접 증언하신 이후 국제 평화와 인권을 위한 운동가로 향년 93세까지 한길을 걸으셨습니다. 고인의 혼은 이제 나비가 되어 훨훨 저 세상으로 떠나셨지만, 고인의 유지는 이제 우리 후대의 몫이 되었습니다. 고인의 넋을 기리고자 윤이상하우스에 작은 소녀상과 함께 추모 공간을 만들어 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의 단호한 외침이 새겨진 손목 띠를 차기로 했습니다; “There must never be another victim like us (다시는 우리와 같은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됩니다)” – Kim Bok-Dong
할머니께서는 과거의 희생자이시지만, 과거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미래적 열망을 실천해 오신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육신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을 겪으셨고, 오랫동안 피해 사실을 숨겨야 했던 사회문화적 폭력에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을 텐데도 고인의 바람은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더 이상 할머니 같은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바람은 그토록 지켜지기 어려운 걸까요? 일본 정부나 천황의 진정성 어린 사과를 받아내는 게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요?
2차 세계 대전 패망국 독일은 그 죄과로 분단이 되었고, 나치 전범들을 끝까지 찾아내 단죄함은 물론이요,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 유태인 추모비 앞에 무릎 꿇고 국가적 사죄를 올렸습니다. 세계적으로 유태인 세력이 컸던 이유도 있지만, 이러한 역사적 참회는 지금도 공공의 기억으로 재생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전범으로서 어떠한 처벌을 받았고 스스로 참회를 했던가요? 분단도 조선반도가 당했고 그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도 조선땅에서 벌어졌습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민간의 일이거나 개인적 선택의 문제였다는 지극히 몰역사적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지요. 물론 지난 박정희 정권 시기 그리고 그의 딸 박근혜 정권 시기를 거치며 한국 정부도 절반의 책임을 안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우리 안의 파시즘 역시 성찰하며, 할머니의 유지처럼 미래지향적 역사의식을 반듯하게 세워야 하는 과제를 위해 예술, 학문, 일상의 영역에서 다각도로 노력해야 합니다.
윤이상 선생님은 고통에 대한 인지를 작곡가의 생명으로 보셨습니다. 1983년 하신 말씀입니다; “A composer cannot view the world in which he lives with indifference. Human suffering, oppression, injustice… all that comes to me in my thoughts. Where there is pain, where there is injustice, I want to have a say through my music. (무심하게 살아가는 작곡가는 세상을 볼 수 없다. 나는 인간의 고통, 억압, 불의에 대해 생각한다. 고통이 있는 곳, 불의가 있는 곳에서 나는 나의 음악을 통해 말하고 싶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인 1986년, 일본 도쿄에서 교향곡 제4번 “Im Dunkeln singen (어둠 속에서 노래하라)”가 세계 초연됩니다. 이 작품은 전쟁 중에 수탈당하고 상처 받은 여성들, 다시 말해, 일본군 위안부들의 고통을 위안하고, 평화를 염원하고자 작곡한 것입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자신의 고통이 미래에도 반복되지 않도록 염원하셨듯이, 윤이상 선생께서는 위안부 여성들의 아픔을 보편적 언어인 음악을 통해 승화시키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전범국 일본의 수도에서 말이지요.
올해는, 북측에서는 3.1 인민봉기라 불리는 3.1 운동 백주년이자, 상해 임시정부 수립 백주년을 기리는 해이기도 합니다. 제2차 북미회담도 곧 열린다고 하니,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도 한 단계 진전되리라 봅니다. 이럴 때일수록 과거의 잘못에 대해 보다 엄격해야 합니다. 구습은 아주 쉽게 되풀이되고, 기득권 세력들은 기회를 틈타 항상 자신들의 자리를 재생산하려 합니다. 과거를 덮고 통 큰 화해를 얘기하는 건 약자와 피해자의 권리와 관용이지, 기득권자의 몫이 아닙니다. 역사의 상흔을 감성으로 느끼고 공감하며 미래지향적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은 이제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국가를 초월하여 실천해야 합니다.
독일에서도 3.1 운동 백주년을 기리는 뜻깊은 공연이 기획되어 있습니다. 윤이상 선생님의 초기 음악활동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다름슈타트 시의 현대음악제 폐막 작품인 타악기 독주곡 마르시아스(Marsyas)가 그것입니다. 작곡가 코드 마이에링(Cord Meijering) 선생이 3.1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을 윤이상하우스 상주음악가 정은비 씨가 3월 1일에 연주합니다. 마르시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숲의 정령으로, 자신의 피리 연주에 도취되어 아폴로와 경쟁했다가 지고 맙니다. 그 형벌로 피부가 벗겨져 그 피부는 북이 됩니다. 그 북을 칠 때마다 마르시아스는 고통을 느꼈다지만, 그의 고통은 오히려 북소리로 승화되어 악기의 전설로 전해지게 되었답니다. 3.1 운동과 만난 마르시아스는 일제의 총칼에 맨몸으로 저항한 조선 백성, 일본군 폭압에 짓밟힌 위안부가 됩니다. 평화적 시위는 무참히 짓밟히고, 위안부 소녀들의 아픔도 오랫동안 무시되었었지만, 그 정신은 다시 살아나 더 큰 평화를 향한 열망의 몸짓과 소리로 재현됩니다. 수십 개 다양한 타악기들의 울림으로 부활할 나비의 꿈. 새로운 역사의 봄도 힘찬 북소리로 깨어나리라 기대해 봅니다.
우울하고 힘들었던 기해년 첫 달을 보내며 다시 한번 역사를 돌아보고 마음가짐 역시 새로이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까치까치설날”이 왔습니다. 정초의 불운은 음력 지난해로 넘기고, 올 한 해 어깨동무하며 다시 새 역사의 한길 더불어 갈 수 있겠습니다. 어깨동무 친구들 모두 평화의 북소리가 울리는 기해년 되시길 바랍니다.
정진헌ㅣ어린이어깨동무 간사 출신으로,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독일 괴팅엔 소재 막스플랑크 종교와 민족다양성 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현재 베를린 자유대학교 역사와 문화학부 한국학과 연구교수로 재직하며, 윤이상하우스 운영을 맡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는, Migration and Religion in East Asia (2015), Building Noah's Ark (2015), 무엇이 학교 혁신을 지속가능하게 하는가 (2015), 한국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 (2007), 북한에서 온 내친구(200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