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명작동화에 성역을 허락했나
Q. 책을 쓰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아동 도서중 <EQ의 천재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국 아동작가 찰스 로저 하그리브스가 쓴 <미스터 맨과 리틀 미스>로 EBS에 방송된 ‘와글와글 친구들’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이 동화는 사람의 외모, 성격과 특징을 가지고 다양한 캐릭터로 의인화 했습니다. 총 60개로 나누었는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재미있고 귀엽게 생긴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전 내용 중에 묘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사람의 외모나 한가지 특성을 가지고 그 사람의 전체를 대변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왕따는 작은 별명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별명은 한사람의 특징을 가지고 그것을 확대 과장하는 과정에서 나오는데, 대게의 경우 당사자가 싫어하는 별명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걸 희화화하는 과정에서 당사자에게 평생 남을 상처를 주기도 하죠. 마치 그 사람의 부분 하나가 그 사람의 전부인 것마냥 행세합니다.
예컨데 대명사는 명사 대신 쓰이는 말인데, 그 대명사가 명사의 자리를 꿰차는 꼴입니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하는 것이다’가 아닌 메타포, 즉 은유가 존재를 대신하는 셈입니다.
물론 이 동화의 소개 글에도 나오지만 ’4-7세 유아의 첫 감성동화’로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캐릭터로 의인화해서 쉽고 재미있게 이해시킨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전 이 책이 아이에게 단어의 뜻을 이해시킬 수는 있어도 사람에 대한 편협한 시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머물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저 뿐일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리 전세계 부모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라지만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단 이 동화만 해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읽고 자랐고, 현재의 아이들도 읽고 있는 고전 동화, 명작 동화, 전래 동화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문제점에 대해 얘기하는 책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아이의 건강에 해가 될 것 같으면 펄쩍 뛰며 못 먹게 하는 부모가 왜 동화에 대해서는 안일하게 받아들이지 의아스러웠습니다. 저의 아이를 위해서도, 또 주변에 아이를 둔 부모를 위해서도 뭔가 환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Q. 나쁜 동화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 좋은 동화란 어떤 존재일까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19금, 즉 청소년유해물을 판단하는 기준은 크게 세가지로 선정성, 폭력성, 반사회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19세를 기준으로 19세 미만은 보면 안된다 하는 것이 바로 19금입니다. 19세 미만이라고 하면 갓 태어난 아이도 어떻게 보면 이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19세 미만은 안되고, 19세 이상은 된다하는 기준은 이미 다 큰 청소년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 그러다보니 영아나 미취학 아동에게는 빠져 있는 중요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입관, 편견을 심어주거나 고착화시키는 내용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읽어주는 동화를 통해 세상과 첫 조우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받은 인상은 잠재의식에 각인되죠. 일종의 초두효과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가 커 가면서 아이의 성장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칩니다. 동화에 들어있는 수많은 상징 코드들은 아이의 잠재의식 깊은 곳에 매복해 있다가 아이의 판단을 요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가 어떤 동화를 처음 접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한번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이 생기면 아이는 그 생각을 강화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지 그것을 뒤엎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선입관이나 편견을 심어줄 수 있는 동화가 너무 많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흔히 명작 동화라고 말하는 고전 동화, 전래 동화에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더 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명작동화라고 알려진 안데르센 동화나 그림형제 동화는 17, 18세기에 나온 동화입니다. 그 당시의 사회는 철저한 계급 사회로 사회적 불균형 및 남녀 차별이 심하던 때였습니다. 또한 노인,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한다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 동화에는 현재에 맞지 않는 당시의 시대상이 자연스럽게 담겨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밤하늘을 통해 보는 별들 중에서 이미 몇백년전에 사라진 별을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별에서 나온 빛이 지구를 향해 몇백년을 날아오는 사이 이미 별은 우주에서 사라졌는데, 우리는 그것을 명작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두세대에 걸쳐 읽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에 살고, 미래를 꿈꿀 아이들의 머리속에 과거의 낡은 가치관, 비뚤어진 세계관을 여과없이 때려넣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머리 속에 심어져 아이의 성장과 함께 커 나가는데, 나중에는 그것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덩쿨을 이룹니다. 그러다 자신에게 생긴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편견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몰라 어리둥절할 때가 찾아오죠. 여기에 더 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좋은 동화는 현재의 변화된 시대상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지금의 시대상이 반드시 정답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시대는 좀 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아도 최소한 과거로 역행해서는 안됩니다. 즉 멈춰 있는 것이 돌아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또한 좋은 동화는 그동안 명작동화라는 이름으로 비뚤어진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로 세우는 사회적 역할도 필요합니다. 그동안 옳았다고 믿었던 ‘정’에 맞서는 ‘반’을 통해 ‘합’을 찾아가는 정반합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Q.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를 설명해주세요.(좋은 동화 포함)
나쁜 동화의 예를 들기전에 당시의 시대상을 한번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오랜 전쟁과 전염병, 기근으로 시달리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극도의 공포심과 불안감이 지배하였습니다. 오죽하면 모든 불행의 이유를 애꿎은 여자에게 뒤집어 씌어 마녀사냥이라는 시대적 비극을 낳기도 하였을까요.
그림형제의 동화는 그림형제가 언어학자로서 언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회에 돌던 민담을 수집하여 엮은 것입니다. 민담은 주로 서민의 입으로 구전되는 서민의 이야기였는데, 당시 서민의 삶은 끔찍했습니다. 오로지 인간의 노동에 의해 생산에 좌우되다보니 대가족이 많았고 늘 먹는 것은 부족하였습니다. 또 변변한 집이 없던 그들은 가축들과 함께 뒤섞여 생활할 정도로 비좁았고 어렸을 때부터 가축을 도륙하고 가죽을 벗기는 일을 거들었습니다. 또 어른과 아이들을 나누는 공간이 따로 없다보니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성행위를 자연스럽게 보며 자랐습니다. 아이는 젖을 떼자마자 부모의 일손을 거들어야 했고, 어느정도 크면 부모에게서 벗어나 제 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했습니다. 또 이 모든 불행의 원흉이라고 지목을 받은 마녀가 눈 앞에서 화형에 처하는 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이런 시대상은 그대로 동화에도 드러났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림형제의 <헨젤과 그레텔>입니다. 부모는 가난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하자 아이들을 숲에 유기하기로 합니다. 숲에서 길을 잃고 굶주린 아이들은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하고 과자를 떼어먹다가 마녀에게 붙잡혀 잡아먹힐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그레텔의 지혜로 헨젤 대신 마녀가 끓는 솥에 빠져 죽고 이들은 마녀의 집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유기하는 것도 그렇고 아이를 삶아 먹겠다는 마녀나 또 아이 대신 솥 안에 빠져 죽는 것도 끔찍합니다. 또 그 집에 있던 보물을 들고 나와 자신들을 버린 부모에게 갖다 주고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복하게 산다는 것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 동화가 만약 오늘날 창작동화로 나왔다면 과연 몇명의 부모가 이 동화책을 사서 읽어줄까요? 전 세계적으로 단 한명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외에도 당시 사회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였습니다. 남녀 차별은 심했고 여자의 순종은 미덕이었습니다. 또 민담의 주체가 서민이다보니 그들은 공주나 왕자와 같은 지배계급의 위선을 꼬집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통해 차라리 자신들의 비참한 삶 속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인어공주와 같이 공주가 등장하는 동화를 보면 공주는 나약하였고 늘 그녀를 구하는 쪽은 왕자였습니다. 여자의 적은 항상 계모와 그의 친딸과 같은 여자였습니다. 또 젊고 이쁜 여자 주인공을 괴롭히는 쪽은 항상 나이들고 추악하게 생긴 마녀였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착하고 추한 것은 악독했습니다. 거꾸로 착한 것은 아름답고 악당은 추하게 그렸습니다. 이것은 특히 그림동화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는데, 아이의 상상력을 키워줄 줄 알았던 동화가 거꾸로 아이에게 선과 악, 미와 추의 대결을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분법적 세계관을 주입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물론 근래에 나온 창작 동화중에 이에 맞서는 동화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최숙희 작가의 ‘모르는 척 공주’ 입니다. 이 동화에는 부모의 싸움을 보고 모르는 척 하는 공주와 새, 쥐, 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왕자가 등장하는데 그 왕자는 다른 여타의 명작동화에 나오는 왕자처럼 공주를 구하거나 공주를 위로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 왕자도 부모의 싸움이 무서워 도망나온 왕자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렇게 모인 아이들은 다 함께 울게 되는데 결국 그 울음소리를 듣고 찾으러 나온 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가게 되고 공주는 모처럼 편안한 잠을 자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최근 겨울왕국이라는 애니메이션이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영화의 완성도가 좋은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기존의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여타의 공주와는 명확히 다른 엘사의 이미지 때문인 것도 한 몫 거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엘사는 주체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캐릭터로 나옵니다. 어쩌면 이 영화가 인기몰이한 것도 그동안 기존 영화에서 보아왔던 공주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신선한 감도 있었지만 기존 영화에 대한 거부감의 반증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기존의 나쁜 동화로 인해 정형화되고 편향된 가치관에 반대되는 내용의 동화가 많이 나와준다면 아이에게 조금 더 균형잡힌 시각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Q. 앞으로 고전, 전래 동화는 어떻게 읽어주면 좋을까요?
최대한 접하지 않는 게 최선인지, 읽을 때 문제의식을 함께 공유하는 것도 좋을지 궁금합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기술로 소위 ‘선빵’이라는 가벼운 말이 있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고전, 전래동화는 교과서에도 실리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접하지 않게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가장 좋은 것은 매도 빨리 맞는 것이 낫다고 부모가 먼저 선제적으로 그러한 동화를 읽어주고 적절히 지도를 해주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아이는 처음 접하는 것을 머리속에 각인합니다. 어차피 아이가 읽게 될 것이라면 부모가 먼저 동화를 읽어주고 그 동화의 어느 점은 문제가 있다고 얘기해주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특히 동화를 읽어주는 것은 단순히 아이가 눈으로 읽는 것보다 귀로도 듣는 과정을 통해 아이의 공감각 지능을 높여줍니다. 게다가 동화의 내용에 때라 부모가 아이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는 과정을 통해 부모와 아이간 공감 능력을 키워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화를 읽어주는 즉시 아이에게 동화의 내용에 대해 묻고 잘못한 생각을 바로잡는 피드백을 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게다가 덤으로 아이가 말을 빨리 배우는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Q. 고전, 전래동화 스토리를 집에서만 접하게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아이가 외부에서 들으면 어떻게 ‘디톡스’ 해주면 좋을까요?
말씀드린데로 아무리 부모가 주의를 기울여도 문제가 되는 고전, 전래동화를 아이가 못 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 나쁜 동화에 대한 문제 인식 및 공론화가 덜 되어 있다보니 그 피해가 고스란히 아이에게 가게 됩니다.
결국 이것은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앞서 얘기한데로 부모가 선제적으로 지도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은 나쁜 동화에 반대되는 좋은 동화를 많이 읽어주는 것입니다. 즉 나쁜 동화를 하루 아침에 없에거나 접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밀어낼 수는 있습니다.
예컨데 다이어트나 금연을 예로 들겠습니다. 어떤 것을 안 먹겠다, 담배를 안 피우겠다에 집중하는 것은 또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안하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을 더욱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피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강화하고 애착을 끊기 어렵게 만듭니다. 나쁜 습관을 없에기 위해서는 나쁜 습관을 없에기 위해 매달리는 것보다 좋은 습관을 늘리는 것입니다. 하루에 먹는 양이나 피는 담배 가피수를 세는 것이 아닌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운동 및 취침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없에고자 하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새로 들이고자 하는 좋은 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나쁜 동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릴 수 없다면 그늘을 찾아 들어가면 됩니다. 나쁜 동화를 읽을 시간에 좋은 동화를 읽게 하고, 나쁜 동화 대신에 좋은 동화책을 많이 사주다 보면 나쁜 동화가 설 수 있는 자리를 없엘 수 있습니다. 나쁜 동화가 끼친 비뚤어진 가치관, 세계관이 그것과 대척점에 서 있는 좋은 동화를 통해 서서히 균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Q. 작가님이 추천하는 좋은 동화 리스트가 있으실까요? 좋은 동화 고르는 법도 알려주세요~
저는 좋은 동화를 고르는 기준을 크게 세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외부의 갈등 보다는 아이 내면의 갈등을 그린 동화, 둘째 그림동화라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사람이 한 사람인 동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말이 열려 있는 개방적인 동화입니다.
하나씩 예를 들자면 첫번째에 해당하는 동화 중에 최숙희 작가의 <엄마가 화났다>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이 동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이가 자장면을 먹으면서 자꾸 먹는 걸로 딴짓을 하고, 목욕을 하는데 거품으로 장난을 칩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다가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는 벽에다가 낙서를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엄마는 붙같이 화를 내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데 어느순간 아이가 사라집니다. 아이를 찾아나선 엄마는 자장면으로 뒤덮힌 후루룩과 거품으로 감싼 부글, 그리고 온몸이 얼룩진 얼룩을 만나면서 아이의 속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뒤늦게 잘못을 알고 슬퍼하는 엄마에게 아이가 나타나고 엄마는 아이를 감싸안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며 끝을 맺습니다.
대부분의 나쁜 동화는 외부와의 갈등을 그립니다. 피아, 즉 적과 아군을 정확히 나눕니다. 항상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과 그에 맞서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에게 이분법적 세계관을 가르칩니다. 항상 세상은 경계해야할 대상이고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반면 <엄마가 화났다>의 경우는 아이가 말하지 못하는 아이 내면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그려냅니다. 아이는 이 동화를 읽으며 자신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묵혀놓은 감정을 해소합니다. 외부와의 갈등을 고조시키면서 스토리를 뽑아내는 나쁜 동화와 달리 아이 내면의 심리를 살피면서 엄마가 아이를 이해하는 과정을 통해 또다른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동화가 좋은 동화입니다.
두번째로 동화에 나오는 그림과 글을 한 사람이 쓴 동화중에 추천할만한 동화가 있다면 앤소니 브라운을 들 수가 있습니다. 앞에서 예를 들은 최숙희 작가도 이에 해당합니다.
아이가 어릴 수록 글이 많은 동화보다는 그림이 많이 들어있는 동화를 많이 읽어주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나쁜 동화를 보면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림이 더 큰 폐해를 줄 때가 많습니다. 특히 글을 못 읽는 아이의 경우 부모가 읽어주게 되는데, 아이는 부모가 말해주는 것에도 귀를 기울이지만 눈에 들어오는 그림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동화가 주인공은 착하고 어리고 이쁘게 그리는 반면 악당은 나이들고 추악하게 그린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선과 악, 미와 추는 전혀 서로 관계가 없는 가치체계임에도 자꾸 이것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마치 선한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선하다는 편견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아무리 그림이 좋아도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도 문제지만 아무리 글이 좋아도 그림이 문제인 것도 역시 문제입니다. 따라서 글과 그림이 일치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글을 쓰는 작가가 달라도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왕이면 글과 그림을 같이 할 줄 아는 작가의 작품이 제 경험칙상 조금은 더 낫다는 생각입니다.
세번째로 아이에게 무엇이 옳다, 그르다 또는 무엇을 해야한다, 하지말아야 한다와 같이 정언명령하는 동화보다는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열려 있는 결말을 가진 동화가 좋습니다. 한 예로 존 버닝햄의 <호랑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이 좋아>라는 동화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에게 소소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책을 읽어주는 부모간 대화를 유도합니다.
Q. 부모가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권할 때 꼭 숙지해야 할 점이 있을까요?
뭔가에 중독된 사람은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예컨데 만취한 사람은 자신이 술에 취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나쁜 동화를 읽고 자랐고, 이제는 동화를 읽어줄 아이들이 있는 부모도 이에 해당합니다. 부모 세대의 경우 명작동화라면 덮어놓고 좋다는 시절을 살았습니다. 없어서 못 읽을만큼 책이 귀하다보니 책이라고 하면 무조건 양서였습니다.
따라서 나쁜 동화를 읽고 자란 부모 역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나쁜 동화를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에게 앞장서서 읽어주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잘못하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녀를 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멈추기에 가해자의 죄의식에 기댈 수 조차도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기 전에 부모의 각성이 가장 먼저 필요합니다. 스스로 자신이 읽은 동화를 돌아보고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어른의 시각에서 이해했던 것을 아이의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자연히 크면서 알아가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물론 아이가 크면서 이성적인 판단력은 길러지겠지만 한번 아이의 머릿속에 자리잡은 선입관, 편견은 쉽게 바꿔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아이에게 지도한답시고 일방적인 주입은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나쁜 동화를 읽었다면 아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아이에게 답을 찾아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질문을 통해 아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거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어떤 생각을 없에겠다고 그와 반대되는 지식을 밀어넣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비뚤어진 불균형을 없에겠다고 반대쪽을 누르는 것이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불균형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쁜 동화를 통해 아이에게 잘못된 생각이 자리잡았다면 아이 스스로 그 생각을 꺼내 없에게끔 곁에서 도와줘야 합니다. 반대편에 무언가를 얹어서 균형을 찾기 보다 아이 스스로 한쪽으로 기운 생각을 덜어내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이는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주문한다면 좋은 창작 동화에 대한 부모의 적극적인 소비도 따라주었으면 합니다. 명작 동화에 가려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좋은 동화를 부모가 나서서 사주어야 그것이 더욱 좋은 양질의 창작 동화를 만들어내는 선순환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각성된 부모들간의 연대도 중요합니다. 연대라고 해서 거창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부모보다 지금의 부모는 인터넷과 모바일을 통해서 손쉽게 좋은 정보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혼자 아는 것이 아닌 소셜 미디어를 통해 얼마든지 공유가 가능합니다. 팔로우 버튼 하나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부모가 올리는 정보를 빠짐없이 받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대는 그렇게 느슨하게 연결된 연대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소소한 일이 모이다보면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오랫동안 자리잡았던 나쁜 동화를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그러한 풍토를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 상기 인터뷰는 육아전문잡지 <베스트 베이비> 1월호에 실린 인터뷰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