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엄마 친구분이 놀러 오셨다. 두 분이서 부엌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하시는데 계속 내 이름이 들리는 것이다. 거실에서 TV를 보던 나는 계속 들리는 내 이름에 대답을 하기도, 두 분을 쳐다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와 친구분은 신이 나게 수다를 즐기고 계셨다.
"지은아!"
"네? 네!" 나는 또다시 대답했다.
"어머 널 부르는 게 아닌데. 엄마를 부르는 건데 네가 헷갈리나 보다. 호호호호"
아주머니는 재미나다듯이 웃으셨지만 왜 우리 엄마를 내 이름으로 부를까 싶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도 그게 참 익숙해 보였다.
또 며칠이 지났다. 내가 사업상 하고 있는 물품들을 엄마 친구분들이 여럿 구매하셨다. 근래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서 내 상품들을 엄마 친구분들께 보여줬나 보다. 그러고는 주문을 이것저것 받아오셔서 택배 싸기에 분주했다. 대략 4분 정도의 택배박스를 쌌다. 엄마가 주소를 주시는데 하나같이 '나O이 엄마', '수O이 (딸 이름)', '김O경가족 (남편분 성함)'이었다. 택배를 보내려면 받는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명확해야 했다. 그래서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아주머니들 이름은 몰라? 이 물품 받는 사람들이 정확해야 하는데. 이렇게 이름을 써도 되려나?"
엄마가 굉장히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름? 음.. 이름이 뭐였더라. 아고, 엄마들 이름이 뭐였지?"
30년 넘게 알고 지낸 지인분이셨다. 나도 늘 그렇게만 들어서 아주머니들의 이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옆에서 듣던 아빠가 한소리 하셨다.
"아니 왜 이름을 몰라~ 그렇게 종종 모임도 하면서. 핸드폰에 연락처 잘 봐봐. 거기에 이름이 없어?"
엄마의 핸드폰 연락처를 보았지만 거기에도 누구 엄마, 누구 가족, 혹은 자식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게 생각보다 나 또한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엄마가 괜히 당황하는 듯해서 나는 말했다.
"아니야 됐어. 그렇게 택배 보내지 뭐. 알지 않으실까."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거실을 왔다 갔다 하던 엄마는 친구들한테 전화를 거셨다.
"나O이 엄마~ 어머 택배를 보내려고 하는데 글쎄 자기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자기 이름이 뭐지?"
엄마는 이제야 친구분들의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 못내 쑥스러운 듯했다.
"어머! 자기 이름이 오O순이야?? 호호호 웬일이니! 어머 어머 자기랑 너무 안 어울린다. 아니 몰랐어~"
엄마는 친구분들과 이름으로 또 재미난 수다를 만드셨다. 그렇게 서너 분께 전화를 돌리고 난 뒤, 나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친구분들의 이름이 적힌 메모였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가족, 누구의 부인이 쓱 지워지고 오롯이 개인의 이름이 적힌 메모는 나에게도 생소한 어감을 선사했다. 나도 30년 가까이 알고 있던 어머님들이셨는데, 이렇코롬 개성 있는 이름을 지니고 계셨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번에는 엄마가 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연락처에 있는 이름 바꾸는 거 어떻게 하니? 엄마들 이름 좀 바꾸게."
TV를 집중해서 보고 있던 참에 엄마의 질문은 순간 귀찮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이름을 찾고자 하는 엄마의 모습에 도와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엄마 핸드폰의 연락처에서부터 카톡의 저장된 이름까지 싹 다 오늘 알게 된(?) 개인의 이름으로 바꿔드렸다. 30년 지기 인연이었지만 이름은 오늘 알았다!
그렇게 이름을 수정하면서 이건 무슨 의미일까... 순간 가슴이 찡했다.
엄마가 친구분들의 이름을 몰라 당황하시고, 미안해하시더니 하나하나 연락해서 묻는 질문,
이름이 뭐니?
결혼해서 반려자가 생기고, 자식들과 함께 가족 구성원은 커지는데 어느 순간 개인은 사라지는 신기한 시간들을 우리네 엄마들은 보내오셨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부인이 주는 안정감과 자부심과 따듯함에 사셨던 분들.
자식들도 장성해서 하나둘 독립하면서 그 따듯함도 점점 식어가고, 나라는 사람만 오롯이 남는 차가운 시간들이 도래하면서 우리 엄마는 친구들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