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심사위원의 머릿속에는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이 과제가 기준에 맞는가. 왜 이 과제여야 하는가. 이 과제가 실패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발표자료는 이 세 질문에 답하는 순서로 설계되어야 한다. 내가 이것을 PMR 원칙이라고 부른다.
P — Pass: 통과의 전제 조건
아무리 발표를 잘해도, 평가항목이 빠지면 탈락이다.
P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다. 과제 필요성, 기술 차별성, 목표의 명확성, 추진계획의 타당성, 수행체계, 기대성과. 이 축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나머지는 의미가 없다.
다만 P만 있으면 평범한 과제다. 빠진 게 없지만, 기억에도 없다.
P는 발표의 기초 체력이다. 이 축이 약하면, 메시지도 리스크 해소도 설 자리가 없다.
M — Message: 인상의 조건
심사위원은 하루에 수십 개의 발표를 듣는다. 발표가 끝난 후 머릿속에 남는 과제와 사라지는 과제의 차이는 메시지다.
M은 "왜 이 과제여야 하는가"를 한 문장으로 심는 것이다. 왜 지금 해야 하는가. 왜 이 팀이 할 수 있는가. 왜 기존 접근과 다른가.
같은 내용도 순서와 문장이 달라지면 인상이 달라진다. M이 없으면 P가 아무리 탄탄해도, 그 과제는 빠짐없지만, 끝나고 나면 떠오르지 않는다.
R — Risk: 확신의 조건
좋아 보여도 불안이 남으면 점수를 주지 못한다. 심사위원은 책임을 진다.
R은 심사위원이 묻기 전에 먼저 답하는 것이다. 임상 리스크라면 이미 확보된 안전성 데이터로, 일정 리스크라면 협력체계 확보로, 규제 리스크라면 인허가 연계 전략으로. 불안을 제거해야 확신이 생긴다.
한 가지 실전 팁이 있다. 리스크를 전부 닫아버리면 질의응답에서 할 말이 없어진다. 핵심 리스크 하나는 살짝 열어두고, 질의응답에서 완벽하게 답하는 구조가 더 높은 점수를 만든다.
발표자료는 서면의 재배열이고, 동시에 질의응답의 설계도다.
PMR의 순서는 P·M·R이 아니다
원칙의 이름은 PMR이지만, 발표자료의 순서는 다르다.
서면계획서는 P → M → R. 항목 순서대로, 빠짐없이 채우는 게 목표다.
발표자료는 M → P → R. 처음 30초에 메시지를 심고, 중간에서 평가항목을 충족하고, 마지막에 리스크 해소로 확신을 준다. 심사위원이 발표장을 나설 때, 이미 판단이 기울어 있도록 만드는 순서다.
과제 단계에 따라 배합도 달라진다. 기초연구는 P 비중이 높다. 임상·사업화 단계는 R 비중이 올라간다. 리스크가 클수록 심사위원의 불안도 크기 때문이다.
계획서는 평가표에 맞춰 쓴다. 발표자료는 평가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심사위원 머릿속 순서대로 다시 짠다.
Pass로 통과하고, Message로 기억시키고, Risk로 확신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