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서
문득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잘 시간을 놓쳐버렸다. 이순이 넘어가면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난데없이 가진 것들에 발목이 잡혀서 쉽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나이 탓일까?
"엄마, 엄마는 손이 너무 커!"
"언니, 힘들게 왜 이렇게 많이 준비했어?"
모처럼 가족들이 모일 때면 딸도 동생들도 음식을 너무나 많이 준비했다는 말에 내 맘을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큰 언니로서 엄마로서 함께 먹고 남은 것들은 봉투 봉투 싸서 들려 보내야 내 맘이 흐뭇했기 때문이다.
방학 때면 내려와서 엄마가 만들어 주신 음식들을 실컷 먹었음에도 바리바리 챙겨준 음식들을 집에 와서 먹는데 왜 그리 맛있었는지.... 엄마에 대한 추억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생긴 습관인 듯 싶다.
그런데 문제는 음식이 아니라 낭비벽이다. 어차피 음식에 대한 관심이나 솜씨가 없어서 특별한 날 가족들 모임이거나 손님들이 올 때 외에는 음식을 즐겨 만들지 않는다. 나에게 낭비벽이 있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아챘다면 절제를 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생긴 이 고약한 낭비벽이 내 발목을 붙잡아서 죽을 때 편히 눈을 감지 못할 상황이다. 우리 아이들 힘들지 않도록 어떻게든 내가 다 처리를 하고 가야만 한다.
"엄마, 왜 똑같은 옷을 여러 개 샀어? 엄마는 같은 옷이 질리지 않아?"
딸은 하나를 사도 원단, 디자인 등 좋은 것으로 꼼꼼이 따져가며 고급스러운 옷으로 사 입으라고 종용했었다. 더우기 나이 들어가면서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며 한 번씩 내려올 때마다 잔소리처럼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다.
이제는 나이도 먹었고 정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니 저렴한 것으로 입기 좋은 옷 쉽게 바꿔 입을 수 있도록 마음에 드는 옷이면 색깔만 달리해서 두어 개 구입하곤 했었다. 인터넷 구매의 특징이 입어보지 않고 구매하다보니 70%는 실패한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한 번씩 광고만 보고 즉흥적으로 구매하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서 무척 많이 노력하고 있다.
내 낭비벽은 옷만이 아니다. 물건을 구입하는데 여러가지 전후 상황 고려해서 신중히 구매를 했어야 함에도 즉흥적으로 그리고 미리 대량으로 구매해서 필요할 때 불편을 겪지 않도록 준비해두는 것이 큰 병이다. 중도 포기하지 않고 끝장을 볼 것처럼......
더 이상 버텨낼 수 없는 건강 문제로 과감히 명퇴하고 내려와서 살다보니 100세 시대 우리집의 환경과 조건을 이용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방면 고민하고 찾은 것이 발효식품이었고 내려와서 겁도 없이 된장을 대량 담기도 했었다.
우연히 본 인간극장의 쌀누룩에 관심과 매력에 빠져서 2박3일 거금의 경비를 투자, 쌀누룩 제조방법을 배워서 열정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군청에 가서 사업처에 대한 상담도 하고 로컬푸드 판매망까지 어렵게 마련해 두었음에도 약한 몸으로 하는 일은 몸이 망가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마저도 미련없이 그만 두어야 했다.
된장과 쌀누룩 상품에 필요한 용기들을 크기별로 종류별로 대량 박스로 구입해 두었으니 이 물건들이 내 발목을 잡게 되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쌀누룩 발효 제조 기기들과 시설들도 갖추어 놓은 상태이니 당시에는 쌀누룩에 대한 꿈이 컸기 때문이다.
현재는 쌀누룩 상품들은 만들지 않고 있지만 가족들이 먹는 음료나 김장 재료로 사용하고 있으니 해마다 쌀누룩을 넣어서 만든 김장김치를 먹어 본 가족들이나 지인들은
"야, 김치 너무 맛있다. 여기서 이 김치 하나로 식당을 해도 잘 되겠는데......"라고들 한다.
기간제교사가 끝나고 2개월 방학이 시작되어서 집에 있다보니 다시 발효식품에 대한 관심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알콩메주로 담근 된장이 더 맛있다는 말에 올 봄 된장을 담기 위해서 발효콩도 만들어야 하고 우리 삼둥이들이 한번씩 내려올 때마다 쌀음료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쌀누룩도 만들어야 한다.
"엄마, 지우가 외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쌀음료가 맛있대."
첫사랑 지우가 맛있다고 하니 번거롭고 힘들다 한들 만들어야 하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우리 가족들이 먹는 것이니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만들 수 있다.
한겨울 방전이 잦고 차량 관리에 애를 쓰는 남편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에
"여보, 여기서 살려면 차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붕만 있는 차고라도 있으면 좋겠다."
"창고 3칸 중에 첫 칸은 차고로 만들었는데 당신 물건들이 쌓여 있으니 차고로 사용을 못하고 있는 거지."
남편의 말에 할 말이 없다. 왜 그렇게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들을 했는지.... 나이가 조금만 젊었어도 발효식품에 적극 뛰어들었을 텐데 그렇다면 구입해 둔 용기들을 계획대로 요긴하게 사용했을 텐데......그러잖아도 약한 체력에 안 좋았던 건강이 심각해진 경험이 있어서 사업으로 진행하기에는 지레 겁이 나고 두렵다.
육순이 넘으면서 있던 것들도 하나씩 정리하며 살아야 하는데 정리하기도 쉽지 않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지니고 있으니 참으로 무모하고 어리석게 살았음을 통감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지혜롭게 하나씩 정리하며 살아야 한다.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서 편히 눈을 감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