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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민영 Jan 26. 2023

'왜 부모님 일에 집착하세요?'

[양민영의 한 솔로] 23화. 미워하지 않을 결심

▲ 청결한 흰색 셔츠 차림에 평온한 얼굴로 맞아주는 그는 어떤 면에선 심판자다. ⓒ 게티이미지뱅크


"오늘은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상담의 시작을 알리는 질문이 넘어왔다. 질문을 신호로 병원에 오는 내내 구상했던 흐름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글로도 쓰지 못한 비밀의 핵심을 전해야 한다. 


항상 청결한 흰색 셔츠 차림에 평온한 얼굴로 맞아주는 선생님은 어떤 면에선 심판자다. 그는 결함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진료실 내부도 눈에 거슬리는 점이라곤 없다. 그래서인지 감춰둔 이야기, 최후의 진심, 눈물이 뒤섞이는 상담 시간이 마치 의식처럼 느껴졌다. 의식의 목적은 하나, 공감과 위로였다. 여기서 내 감정을 부정당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상담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전문가의 견해나 조언을 기대했다. 그런데 정신과 상담과 치료에 있어서 경험치가 훨씬 높은 이들이 충고하길 영화에나 나올 법한,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결책을 주는 의사는 없단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처방전을 잘 써주는 의사가 최고라나? 


과연 그들의 충고대로 견해나 조언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냉소적인 충고가 사실이라고 해도 지금껏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내면을 돌본 적이 없으니 나에게 이 과정이 필요했다. 또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홀가분함이랄지, 해방감이 주어졌고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점점 높아지는 '왜'의 장벽에 막히는 느낌이었다. 내가 공감과 위로를 갈구할수록 선생님은 더 자주 '왜' 카드를 뽑아 들었다. 물론 실제로 '왜'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넉넉한데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나를 보면서도 상담을 종료하거나 모든 이야기가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귀결되는 걸 건조한 어투로 지적할 때마다 그의 표정, 말투, 눈빛이 전부 '왜'라는 무거운 과제로 나에게 돌아왔다. 


'왜 부모님 일에 집착하세요?'

'왜 아버지에게 사과받고 싶은 건가요?'



갈등, 평생 감당할 수 없는


왜냐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내보인 진심 어린 고백과 눈물이 내가 상처받았음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갑자기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 같은 그 표정은 뭐야. 아니, 정말 모르시겠어요?


결국 근래에는 공감과 위로는 한 조각도 얻지 못한 채 조용하고 청결한 방을 벗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라벤더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세면대 앞에서 눈물 자국을 닦고 다음 일정을 예약했다.   


작가들은 사랑과 죽음 다음으로 부모라는 소재에 집착한다. 저명 작가들이 쓴, 부모를 고발하다시피 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정말 이렇게 악마적인 부모가 존재했는지 궁금했다.


예를 들면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인 소설가 필립 로스는 소설에서 못돼먹은 자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걸로 유명하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도 냉정을 넘어 신랄하게 묘사했다. 그가 쓴 '아버지의 유산'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은 이렇다. "죽는 것은 일이었고 아버지는 일꾼이었다. 죽는 것은 무시무시했고 아버지는 죽고 있었다." 


그러면 작가들은 왜 부모를 악마화하는가? 그만큼 이상적인 부모를 갈구하기 때문이다. 이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들은 이상적인 부모, 이상적인 연인, 이상적인 세상의 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만들어서 마음 깊은 곳에 모신다. 애초에 그런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남들이 아무리 비웃어도 절대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들은 자기만의 이상 때문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추구해야 할 이상이 없으면 살 이유도 없다.


그러나 이상은 필연적으로 좌절되고 꺾이기 마련이다. 인생에는 이상에 반하는 사건이 넘쳐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와 대비되는, 한층 더 우중충하게 보이는 현실의 결핍에 몰두했다. 도저히 손쓸 수 없는 강력한 결핍은 욕망과 짝을 이루어서 한 몸처럼 움직였다. 어떻게 된 일이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을 수록 결핍이 제멋대로 활개를 치고 나섰다. 툭하면 과거를 소환하고 애써 이룬 것들을 무너뜨리고 가라앉힌 감정을 휘저어 흙탕물로 만들었다. 


이 고통스러운 마음의 부침은 에너지를 전량 소진하고 동력을 완전히 잃어야 간신히 멈춘다. 자, 이제 범인을 색출할 차례다. 결핍을 부추기고 나를 혼란으로 밀어넣은 자가 누구인가? 그들은 대체로 더없이 친밀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한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는 해결책은 다시는 그들을 만나지 않거나 대화하지 않는 식의, 독단과 냉정한 단절의 형식을 띠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과오를 만드는 과정일 뿐, 실질적으로 해결책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뒤끝이 무척 사나웠다. 그저 갈등을 안고 씨름하다가 단절을 선택하는 게 나에게는 익숙하다 못해서 당연한 방식이어서 '왜'라고 반문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뿐이다. 


상담을 계기로 마침내 반문을 시도했더니 문제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이상, 욕망, 결핍이 계속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면 나는 평생 감당할 수 없는 갈등에 갇혀 살게 될지도 모른다.


용서,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 오묘한 문양 같은 인생의 여러 사건을 그저 바라본다. ⓒ 게티이미지뱅크


"오늘은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다시 조용하고 청결한 방에서 선생님과 마주했다.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그 어떤 구상이나 계획 없이도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려고요."


그 어렵고도 거창한, 그래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고 여겼던 용서. 이전에는 용서가 모든 걸 포용하고 이해하고 없던 일처럼 무화시키는 행위인 줄 알았으나 최근에 용서를 다시 정의했다. 내가 재정의한 용서는 이미 일어난 일, 그리고 지나간 일을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그에 얽힌 사람들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부모님을 그들의 보호와 애착이 나의 생존과 직결되던 시절처럼 사랑할 수 없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너무 오랫동안 내 부모님이 내가 원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갈 곳을 잃은 마음은 그들을 맹렬하게 미워했다. 하지만 나도 중년에 접어들었고 이런 채로 계속 살 수 없는 노릇이다. 


문득 어릴 때 했던 수면 위에 색색의 물감을 풀고 물결이 만든 모양대로 종이에 찍어내던 놀이가 떠올랐다. 무엇을 의도하지 않아도 수면의 움직임과 우연이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주곤 했다. 그 오묘한 문양 같은 인생의 여러 사건을 그저 바라본다.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심상한 어른의 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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