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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민영 Jul 24. 2023

강한 여자를 향한 불온한 시선

피지컬 예능의 한계


‘성형 시대가 연 여성과 윤리적 공백 문제에는 어떤 가이드라인도 논쟁도 없다. 아름다움의 신화에는 아직 한계라는 것이 없다.’

미국의 사회비평가 나오미 울프는 저서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에서 ‘아름다움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무기’라고 주장했다.


아름다움의 신화를 떠받치는 것 가운데 가장 충성스러운 조력자는 가부장제, 소비주의, 미디어다. 특히 미디어는 한계 없는 아름다움을 확대경처럼 보여주고 이를 선전하는 구실을 도맡아왔다. 또 흠 없이 아름다운 여성에게만 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미의 기준을 갈수록 고도화·세분화하는 데 기여했다.


미디어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가장 자극성이 강한 리얼리티쇼는 한계 없는 아름다움의 신화를 다루는 데 앞장섰다. <렛미인>(Let 美人) <엄마는 예뻤다> 등 성형미인 만들기 프로젝트는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 일반인 여성의 변신을 소재로 인기를 끌었다(윤리성 논란을 의식한 듯 ‘논란을 넘어 감동으로’가 모토이던 <렛미인>은 무려 시즌5까지 제작됐다).


미디어가 여성의 개성과 능력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강력한 작용이 반작용을 불러온 것일까.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강요하던 미디어가 최근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기존 여성혐오적 문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성의 몸을 조명하기 시작한 것. 변화는 여성이 주인공인 스포츠, 서바이벌 예능을 중심으로 감지된다.


첫 조짐은 연예인의 가상 병영 체험을 다룬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MBC)에서 나타났다. 최초로 남녀가 동반 입대한 해군부사관 특집에서 뜻밖에도 여성 출연자인 배우 이시영이 스타로 떠올랐다. 과거에도 권투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는 등 운동능력이 뛰어난 이시영은 체력과 근성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여기에 암기력과 문제해결 능력까지 발휘하며 ‘진짜 사나이’의 역대 최고 에이스로 이름을 남겼다.


‘근수저’(근육을 많이 갖고 태어난 사람) 열풍의 주역인 개그우먼 김민경도 빼놓을 수 없다.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IHQ)은 원래 ‘먹방’ 예능 <맛있는 녀석들>의 사이드 프로젝트였다. 여기서 김민경은 엄청난 근력과 센스로 어떤 운동이든 척척 해내는 ‘운동 천재’의 면모를 보이면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2022년 11월에는 국제실용사격연맹(IPSC) 국가대표에 발탁돼 국제대회에 참가하는 쾌거를 이뤘다.



 

IHQ 예능 프로그램 <맛있는 녀석들>의 코너 ‘시키면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에서 사격훈련을 하는 개그우먼 김민경. <맛있는 녀석들> 유튜브 영상 갈무리


<골 때리는 그녀들>(SBS)은 여성의 팀스포츠로 예능계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2021년 설날 특집 파일럿 방송으로 선보인 이 프로그램은 축구를 매개로 경쟁하고 성장하는 여성들을 조명한다. 남성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한 축구·농구 등의 스포츠예능이 수차례 제작되는 동안 한 편도 제작된 바 없던 여성 버전의 스포츠예능이 드디어 빛을 본 셈이다.


최근 ‘케이(K)예능’의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 <피지컬: 100>(넷플릭스)의 여성 출연자들은 앞서 언급한 예시를 모두 압도하는 관심을 받고 있다. 국가대표 레슬러 장은실의 체력과 리더십, 스턴트우먼 김다영의 헌신, 유튜버 심으뜸의 정신력 등 낯설지만 신선한 인물과 그들의 개성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처럼 강인하고 리더십 있는 여성은 기존 미디어가 소비하던 아름다운 여성과 비교하면 수적으로 여전히 열세하다. 그러나 그동안 남성 출연자가 신체능력과 리더십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걸 고려하면 여성에게도 아름다움 이외의 개성을 부여하고 내재한 능력을 발굴해 소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무엇보다 획일적으로 마른 몸 대신 근육질, 고체중이면서 건강한 몸, 민첩성과 지구력이 강한 몸이 미디어에 노출되는 현상은 그 자체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출연자들이 축구하는 모습. <골 때리는 그녀들> 누리집 갈무리



‘성별 구분 없는 대결’이라지만 여성은 여전히 소수자


물론 문제점이 없지는 않다. 이제 막 새로운 콘텐츠를 선보이는 단계라서 완성형이 되기까지 갈 길이 멀다. 새로운 미디어 문법은 탄생했으나 여성혐오적인 설정과 연출이 잔존하는 실정이다.


먼저 여성의 몸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다. 이는 <피지컬: 100>이 방영 초기에 논란을 양산한 원인이기도 하다. 스포츠계가 성별 경계의 폐지를 고려하지 않는 이유는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에 있다.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에서 기인하는 성별 간 신체능력의 차이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테스토스테론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평균적으로 강하고 빠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남성의 심장이 여성의 것보다 크므로 박출량도 더 많다. 이러한 신체 조건의 차이는 남성과 여성의 경기를 엄격하게 분리해 운영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도 <피지컬: 100>은 성별 구분 없이 최고의 피지컬을 가리겠다고 선언했다. 이 룰에 따라 일부 남성 출연자가 ‘남성은 이길 수 없다’는 이유로 여성과의 일대일 대결을 선택했다. 이종격투기 선수 박형근이 보디빌더 춘리를 선택한 뒤, 마뜩잖은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등장하는 등 매너 없는 행동을 보여줬다.


성 대결 자체도 무리인데 내용도 문제였다. 박형근이 넘어진 춘리의 가슴을 ‘니온벨리’(Knee on belly)로 제압한 거다. 니온벨리는 글자 그대로 무릎에 체중을 실어 상대의 배를 눌러 제압하는 기술이다. 주짓수 도장에서 아마추어끼리 스파링할 때도 니온벨리가 심심찮게 쓰이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배를 누르라고 배운다.


그러나 이 쇼에선 가슴을 누르는 니온벨리를 허용했다. 또 다른 대결에서는 복서인 신보미레가 최현미를 초크(목조르기)로 제압한 걸 두고 격투기 기술을 과도하게 썼다는 비난이 따랐다. ‘초크로 상대를 제압해도 된다면 팔을 꺾는 기술인 암바를 써도 되냐’는 거다.


  

<피지컬: 100>에 출연한 레슬링 선수 장은실은 팀 대항 경기에서 리더가 되어 팀을 이끌었다. 넷플릭스 제공


이런 논란은 모두 쇼의 규칙이 정교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신체능력을 경쟁하는 서바이벌이 의미 없는 대결이 되지 않으려면 특별히 더 정교한 룰을 적용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제작진은 이 부분에 딱히 공들이지 않은 것 같다.


제작진이 설계한 설정이 정말 공정한지도 따져봐야 한다. 여성 출연자 수가 터무니없이 적은 건 물론이고 많지도 않은 인원 가운데 피트니스 모델, 치어리더, 폴댄서를 포함했다. 처음부터 여성을 소수자 그룹으로 설정하고 판을 짰음을 알 수 있다. 남성 출연자 중에도 배우나 래퍼가 있지만 출연자 규모가 확연히 차이 나는 가운데 기계적인 비교를 적용해본들 의미가 없다.


신체능력을 겨루는 쇼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인 가학성이 여성 출연자에게는 여성혐오로 작용하는 점도 문제다. 서바이벌 예능은 폭발적 인기와 함께 위계와 폭력으로 인한 가학성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이 가학성조차 출연자의 성별에 따라 양상이 달라진다.


예능이라면 더욱 여성혐오, 자극적 재미 피해야



예를 들면 <진짜 사나이> 여군 특집에서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 개인의 미숙함이나 체력의 열세를 지적하면서 여성의 정체성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장면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 여성 중대장이 여성 출연자들을 꾸짖으며 ‘여자인 척하지 마!’라고 했던 장면이 대표적이다.


샘 해밍턴이나 헨리처럼 똑같이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국인 남성에게 ‘남자인 척 말라’ 하고 꾸짖지 않는 것만 봐도 이런 연출은 여성혐오적이다. 여기에 간부인 여성이 훈련병 여성을 상대로 혐오적 발언을 함으로써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편견까지 부추겼다.


이렇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새 콘텐츠를 제작하면서도 세부 연출에서 삐거덕거리는 이유는 뭘까? 원인은 제작진이 ‘서바이벌과 스포츠는 남성 영역’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혔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강인함과 리더십은 여성성과 대척된다는 낡은 인식이 제작자의 자유로운 상상을 가로막는 한, 여성 출연자는 새로운 콘텐츠 안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못한 채 겉돌 수밖에 없다.


지금도 여성이 주인공인 스포츠예능의 경우 구도가 너무 한정적이다. <~운동뚱> <골 때리는 그녀들> <씨름의 여왕>(tvN STORY)은 운동을 배우는 여성과 그를 지도하는 남성 지도자를 일관되게 보여준다. 여기에 ‘여성은 스포츠 경기의 규칙을 잘 모른다’ ‘운동에 서툰 여성을 남성 지도자가 훈련한다’는 설정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MBC 예능 <진짜 사나이>에서 배우 이시영이 훈련하는 모습. <진짜 사나이> 누리집 갈무리



<골 때리는 그녀들> 초반부에서도 여성 출연자들이 오프사이드, 핸드볼 반칙을 잘 모르는 점을 웃음 포인트로 이용했다. 축구의 오프사이드, 핸드볼 반칙은 야구의 삼진 아웃과 더불어 ‘여성이 경기 규칙에 무지하다’는 편견의 소재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변화가 시작된 지금이야말로 여성혐오를 배제한 섬세한 연출과 새로운 감수성을 바탕으로 탄생한 예능 프로그램을 기대할 때가 아닌가? 만약 누군가 ‘예능이 재미만 있으면 되지 피시함(정치적 올바름)까지 갖춰야 하냐’고 반문하더라도 대답은 ‘그렇다’이다.


국내는 물론 세계로도 보급되는 예능 콘텐츠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윤리적 기준이 필요하다. 비록 예능이라도 아니, 오히려 예능이라서 여성혐오적 발언과 연출에 기댄 자극적인 재미를 지양해야 한다. 여성에 관한 성차별적 편견이 재미에 가려 무해하게 퍼지는 현상을 방지해야 한다. 더욱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혐오하는 발언과 연출은 어떤 경우에도 재미가 될 수 없다.


여성의 몸에 관한 진일보한 프로그램 나오길



끝으로 여성혐오를 배제한 연출에서 더 나아가, 예능이 여성 간의 우정과 연대를 담아내길 기대한다. 실제 여성끼리 운동하는 현장을 지켜보면 브로맨스(남성 간 우정)에 대적할 만한 드라마가 산재한다. 단언컨대 여성은 여성을 통해서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함께 운동하는 동료, 여성 지도자의 진정성 있는 모습을 담고 이 과정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여성 스타와 지도자까지 발굴하면 K예능의 문법은 한 단계 더 진보할 것이다.


<피지컬: 100>은 2023년 2월21일 종영했다. 하지만 피지컬을 소재로 한 예능 콘텐츠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넷플릭스는 <피지컬: 100>의 후속작으로 경찰관, 소방관, 경호원, 군인, 운동선수, 스턴트 배우 등 여성 24명이 직업별로 팀을 이뤄 경쟁하는 서바이벌 예능 <사이렌: 불의 섬>을 선보인다고 예고했다. 가상의 무인도를 배경으로 여성만 출연하는 서바이벌이라니 기대가 크다. 이번에도 여성의 몸에 관한 진보적이고 환영할 만한 변화를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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