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민영 Jul 24. 2023

기승전내동댕이

주짓수 테이크다운

정초부터 불운했다. 성사될 듯하던 계약이 무산됐고 마음이 산란했다. 아끼던 물건마저 잃어버리고 반갑지 않은 전화가 걸려 오는 날이 계속됐다. 행운과 다르게 이들은 절대 혼자 오지 않는다.


그런 채로 나는 넘어졌다. 실패나 좌절을 은유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넘어졌다. 새해부터 주짓수 도장에서 훈련하는 기술이 하필이면 테이크 다운(Take down, 서 있는 상대를 매트에 눕히는 기술)인 건 어쩌면 불운이 그린 큰 그림인지도 모른다.


원래 주짓수에는 테이크 다운의 비중이 크지 않다. 누워서 겨루는 그라운드 기술이 주를 이루므로 평소에는 바닥에 넘어졌다고 가정하고 훈련한다. 그러나 주류가 아닐 뿐, 테이크 다운을 완전히 배제하는 건 아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집중적으로 테이크 다운을 훈련하는 시기가 있는데 그 주기가 돌아온 거다. 하지만 반갑기는커녕 야근을 핑계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다.


  

넘어지는 건 정말 싫어!


이유는 일차원적인데, 다 차치하고 넘어지기가 무서웠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절대 자의로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지는 건 그 자체로 심각한 사고이자 수치스러운 실수다. 특히 그 무렵에 미끄러운 대로 위에서 넘어지는, 불운한 사람을 자주 목격했다. 충격을 흡수한 엉덩이나 무릎이 굉장히 아플 텐데도 창피함에 압도돼서인지 그들은 모두 잽싸게 일어나서 황급히 사라졌다. 넘어지는 순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취약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눈길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엉금거리며 도장에 도착해서는 할 말을 잃었다. 모두가 밀고 당기고 엎어 치고 던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양쪽 다 서로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평형을 유지하면서 겨루는 모습은 소싸움을 방불케 했다.


순간 유도장에 잘못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주짓수 도장에서 갑자기 웬 유도냐고? 사실 주짓수와 유도는 ‘유술’이라는 일본의 고전 무술에서 잉태된, 개성이 강한 형제들이다. 그만큼 두 종목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주짓수의 테이크 다운 중에 ‘저건 유도 기술인데?’라고 할만한 기술이 많고 반대로 유도의 그라운드 기술인 네와자(Newaza) 중에 ‘저건 주짓수 기술인데?’라고 할 법한 기술이 상당수다.


게다가 나는 주짓수 이전에 유도를 먼저 동경했다. 스무 살, 청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조금은(사실은 많이) 미화된 기억에 유도부가 있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내가 아닌 모든 것이었다. 나는 나약한데 그들은 강하고 나는 매사에 불만인데 그들은 여자와 남자 모두 단순하고 건전했다.


좀처럼 마주칠 일이 없던 유도부를 다시 만난 곳은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는 투쟁이 벌어지던 본관 로비였다. 그들은 이사장의 편에 서서 학우인 우리를 짐짝처럼 끌어냈다. 그때도 입만 살았던 나는 끌려나가면서 외쳤다. “이 비겁한 부역자들아!” 그 난리 통에서도 멱살을 움켜잡던 손아귀의 힘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우악스럽던 게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지냈던 유도가 20년 만에 돌아온 거다. 나는 쉴 새 없이 넘어졌다. 평소처럼 스마트 워치를 차고 있었다면 이 똑똑한 시계가 119를 부르고 내가 죽었다고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또 넘어질 때의 충격도 충격인데 체력 소모가 엄청났다. 넘어졌다가 일어나는 동작을 반복하다 보면 자연히 누워서 연습할 때보다 빨리 지쳤다.


“스탠드에서 시작하겠습니다.” 

기술 훈련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스파링이 시작됐다. 상대는 이미 나를 향해서 한 발씩 다가오고 있었다. ‘5초 준다. 빨리 생각해, 넘어지지 않고 버틸 방법!’ 일단 밀고 들어오는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면 균형이 필요했다. 빙판 위에서 엄청난 속도로 후진하다가 높이 점프해서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돌고 가볍게 착지하던 김연아 선수의 그 완벽한 균형! 몸의 무게 중심을 자유자재로 옮길 수 있다면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나태한 몸에 그처럼 아름다운 게 숨어 있을 리 없다.



  

박종혁 제공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넘어지기 전에 상대를 넘어뜨리는 거다. 여기서 유도의 ‘쿠즈시’(崩し)가 등장한다. 쿠즈시는 ‘무너뜨리고 흔들다’는 뜻으로, 상대를 가까이 끌어당기는 동작이나 균형을 무너뜨리는 움직임을 일컫는다. 심지어 흔히 기선 제압이라고 하는 기합을 내지르는 것도 쿠즈시에 속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심을 흔들지 않으면 멀쩡하게 서 있는 상대를 넘어뜨릴 수 없다.



비록 넘어지느라 바쁜 신세지만 새해에 선물처럼 얻고 싶은 게 있다면 바로 쿠즈시였다. 우리 인생이야말로 쿠즈시가 간절하다. 신인 가수를 발굴하는 오디션은 사실 첫 소절을 얼마나 잘 부르는지 겨루는 게임이다. 승자가 되려면 지루해서 넋이 나간 심사위원을 흔들어야 한다. 문학에서도 도입부, 특히 첫 문장에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카프카의 표현을 빌리면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가 필요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은 어떤가. 누가 사자이고 누가 양인지 알아차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2~3초에 불과하다.



  

나만의 ‘쿠즈시’는 없지만


‘마침내 나는 어떤 공격에도 넘어지지 않는 나만의 쿠즈시를 완성했다’는 동화적인 문장으로 이 글을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달 내내 쿠즈시를 터득하긴커녕 도복의 라펠(도복 상의의 깃이 접히는 부분)이나 뒷목, 혹은 앞목을 잡힌 채로 개처럼 끌려가서 매트 위에 내동댕이 당하기를 반복했다. 어쩌다가 용기를 내서 밀고 들어가도 상체를 체중으로 누르는 스프롤(Sprawl)에 당하거나 어설프게 기술을 시도함으로써 내가 내 중심을 흔들어 되치기를 당하곤 했다. 무슨 짓을 해도 ‘기·승·전·내동댕이’였다.


결국 새해에 얻은 건 불운, 무릎과 정강이 주변을 물들인 멍, 온몸에 스미는 피로감이 전부였다. 유독 험난한 해가 될 거라는 암시인 걸까. 그러나 셀 수 없이 많이 넘어진 다음에야 기적처럼, 까맣게 잊었던 필살기가 떠올랐다. 그건 바로 배운 적이 없지만 본능적으로 터득하고 익혔던 나의 필살기, 이름하여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기’였다. 초짜의 정신 승리라고 비웃어도 좋다. 그 필살기 하나로 평생을 싸운 사람이 여기 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여자 얼굴에 피멍...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