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눈앞에 목표가 놓여야만 하는가
나는 가뜩이나 활발하지 않은 취업시장의 문을 열어젖히지 못할 사회과학계열의 석사학위 소지자이다. 학위 소지자임을 강조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최근에 졸업을 했기 때문이고 그다음의 이유는 내가 희망하는 연구직에서는 석·박사 학위가 필수이기에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자격인 탓이다. 현재는 연구기관에 몸담으며 계약직 연구보조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석사학위만큼이나 필연적으로 계약 종료 시점이 명시되어 있는 직위의 나는, 다시 당연하게도 퇴사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대개 이곳의 연구보조원에게는 중대하거나 과중한 업무가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예정된 행사가 취소되면서 그간 준비해왔던 업무들이 잠정 연기되었다. 이번 주의 행사를 위해 지난 몇 주간 가져온 부담과 긴장감이 사라지고, 당장 해야 할 업무도 오전 중 해치우고 나니 브런치 쓸 글을 구상하고 작성할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입사한 이래 오늘이 가장 한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느지막이 동기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 할 일이 없어서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결국 주변 편의점에 다녀왔다.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컵라면과 도시락을 샀고, 퇴근시간이 되기 30분도 더 전에 사 온 편의점 식품들을 덥혔다. 근무시간에 음식을 먹지 말라는 규정은 없으니 당당하게 그것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야근하려고 먹나 싶을 테지만, 다른 그 어느 때보다 오늘이야말로 편의점 도시락 까기에 아주 적기인 날이었다. 오늘은 같은 사무실을 공유하는 동료분들도 출장이셨고 주변 사무실을 사용하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았다. 마치 금요일 같은 수요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치밀하게 먹을 수 있었다. 평소에는 가공식품과 고기류는 먹지 않지만, 가끔씩 미디어에서 보였던 회사원의 야식 메뉴에 대한 로망이 치솟을 때엔 건강보단 로망을 우선시해버린다. 그대로이지 않으면 잘 느껴지지 않는 간접체험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바쁘지도 허덕이지도 않았던 근무시간 속에서 야근도 하지 않을 건데 왜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을 산 것일까?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와 '동식'이 원인터내셔널 건물 옥상에서 마시던 캔커피 한 잔과 같은 의미가 바로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에 똑같이 녹여내려 있다. (사실 '장그래'와 '동식'이 회사 건물 옥상에서 캔커피를 마신 장면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여러 미디어에서 보였듯, 회사 건물 옥상 가장자리에 서서 시야를 멀리 두고 캔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본 터라 기억이 혼합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편의점 도시락과 커피에 '미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면, 아마 지금의 나에게는 정규직에 대한 갈망이 조금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는 20대에 해왔던 네댓 번의 인턴, 계약직에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비정규직이어도 먹고 살 정도의 돈만 받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연구직을 꿈꾸는 석사학위 소지자이다.
석사과정에 들어서면, 원치 않아도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은 그 수가 많았고, 많은 수만큼이나 서로 다른 생각과 함께 석사과정에 대한 다양한 동기(動機)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통해 정리해 본, 석사과정을 시작하고자 했던 이유에는,
1) 스스로가 학자/연구자로서의 삶에 적합한지 잘 모르기에 이를 확실히 알아가 보고자
2) 석사과정-박사과정(-박사 후 과정)을 거쳐 연구자, 학자 등의 전문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3)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어/취업은 하기 싫으므로 학부 전공을 따라 석사학위라도 따려고
4) 남들 다 따니까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가 대표적이다.
위의 공식적인 네 가지 이유를 제외한, 비공식적인 이유에는,
5) 졸업하면 부모님과 약속한 자동차, 돈 등 정해진 대가가 있을 것이란 점,
6) '음? 생각해보니 내가 여기에 왜 있지?' 등도 있다.
생각 외로, 생각보다 더욱더 공부를 하고 싶지 않거나 공부가 나에게 맞는 것인지 불확실한 상태의 석사과정생들이 즐비하다. 애매한 그것이 바로 석사학위다.
나는 왜 석사과정을 시작한 것인지 자문해본다. 말하자면, 학부를 졸업하고 NGO에 취업하여 자유롭게 일하고 싶었지만, 지원한 곳들로부터 죄다 줄줄이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 전공과 관련한 국책연구기관의 인턴에 지원하여 일할 기회가 주어져, 우연찮게 석사과정에 대해 자주 접하는 환경에 놓였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그 이전에도 NGO 말고는 하고 싶은 게 딱히 없었던 터라, 취업이 안되면 전공 관련하여 공부를 더 해도 되겠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그 생각이 연구기관에서 인턴생활을 하며 팽창되었다. 그러니 3)과 4) 정도가 내가 석사과정을 시작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대학 진학률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다는 한국에서의 학부 졸업장이나 연구자/교수가 되기 위해서 취득해야 할 필수 스펙인 박사학위만큼이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고, 박사과정을 위한 중간다리쯤으로 여겨지는 것이 바로 석사학위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다. 달리 지금의 내 현실을 사실적으로 말해 보자면, 나는 그것만 가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높지 않은 학위인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로부터 석사과정 중에서 해야만 하는 과업과 졸업논문들에 큰 노력을 들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어차피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면 박사 졸업논문이 중요하고, 석사 졸업논문은 대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란 이유에서였다. 그 기저에는 석사학위를 취득하고자 하거나 취득한 자를 전문적인 지식인으로 대우해주지 않는다는 전제가 당연히 깔려 있었다. 현실이기도 했다. 학술지 투고 요건만 보아도 석사과정생/졸업생을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다. 학문적 가치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시점은 박사과정생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는 때부터라는 것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었다.
앞으로 계속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싶은 나는 아무래도 석사과정 이후의 박사과정생으로 살아야만 할 것 같다. '~할 것 같다'라고 적은 이유는 나 스스로도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이유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 외에도 하고 싶은 직종의 업무가 있지만, 연구만큼 우선순위는 아니기도 하고, '공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에는 아직 '공부'에 단단하거나 특별한 입지를 쌓아둔 것도 아닌지라 적합한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과정 이후의 진로에 대해서는 추후 더 선명하게 윤곽을 잡아본다고 한들, 박사과정에 진학하기로 결정을 했다면 이를 위한 준비를 해나가야 할 것인데 엄청난 선택들을 눈앞에 두고서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나의 현실이다. 정보의 부족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사항들도 있긴 하지만, 내가 조금 더 강하게 의지를 부여한다면 결정되는 사항들도 있다. 석사과정 지도교수님께 추천서를 요청드려야 하니 교수님께 상담과 지도를 받아야 할 사항들도 있다. 대표적인 지금의 고민들을 요약해보면, 1) 해외유학 VS 국내 유학, 2) 입학시점, 3) 학비 및 생활비 마련, 4) 영어실력 향상, 5) 박사논문 연구계획서(연구 아이디어) 준비, 6) 내향성+발표불안 해결 등이 있다.
브런치에 올리는 글들을 통해 위의 고민들이 어떻게 정리되고 해결되어 가는지 상세히 서술해보고자 한다. 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기장에 속마음을 써 내려가는 방식이 나를 되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 손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일기장에 내 생각을 모두 덜어내지 못한다면, 익명성을 부과하고 솔직함은 덜어내더라도(일기장만큼 내 깊은 속을 다 보여내지는 않겠다는 뜻) 공개된 플랫폼에 모두 적어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몇 년이 걸리든 언젠가는 해치워야 할 작업이 바로 박사과정 진학 및 졸업이므로, 취업시장의 두꺼운 문을 열어야 하는, 또 다른 사회과학계열의 석사학위 소지자가 이 글을 읽고 나서 일말의 희망과 대안을 얻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눈 내리는 아침을 뚫고 출근한 오늘의 도비는 열심히 회사의 탕비실에 놓인 커피믹스를 먹어치우며 고민들로 가득한 하루의 시간을 보낸다. 근로 계약한 기간의 1/6이 지나는 시점인 이번 주, 다음 진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고민은 계속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결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의 나의 목표를 퇴사하기 전에 무언가가 결정되는 것 +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을 갖지 않게 되는 것으로 설정하고 살아가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