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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믈리연 Apr 05. 2024

기회를 잡는 기회


2021년 1월. 코로나로 세상이 천천히 움직이던 그때. 같은 아파트에 사는 동생과 티(tea) 수업을 배우러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 대구에서 부산까지 두 달 동안 다녔다.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마칠 즘이면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오가는 시간까지 합하면 더 오래 걸렸지만, 배우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두 달간의 배움은 심화과정으로 연결됐다. 부산이 아닌, 강사님이 사는 지역인 울산으로 갔다. 다시 10주. 배우는 것도, 수다 떠는 것도 모든 게 좋았다.

상반기 내내 열심히 마시고 즐겼건만, 과정을 마치자마자 수료증은 장롱 속 운전면허증이 됐다. 공부할 때만 해도 수십여 종의 향과 맛을 즐기며 눈과 입을 예민하게 만들었건만, 시험 종료 후 외운 걸 다 잊어버리는 학생 때로 돌아갔다.



그 후로, 좋아하는 차만 모으고 마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수료 후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아무 지식이나 경험이 쌓이지 않았다.

얼마 전, 고3 때 짝꿍에게서 연락이 왔다. 본인이 근무하는 곳에서 tea와 관련한 수업을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올해는 좀 쉬어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티소믈리에이긴 하지만, 수업 경험이 없어 망설였다. 경력 없는 거 알지만, 이번 참에 해보는게 어떠냐고 했다. 책장에서 관련 교재 및 도서를 꺼냈다. 그걸로 부족해, 도서관에 가서 관련 책 열 권을 빌려왔다. 퍼즐 조각 맞추듯 강의 주제, 목표, 세부 계획서를 작성했다. 친구에게 보내고 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책이란 책은 다 펼쳐놓고, 한글을 배우는 초등학생처럼 다시 공부해나갔다.

3년 전에 배운 내용들인데, 새로웠다. 차를 알려면 차와 관련한 역사도 알아야 한다. 그땐 재미있으면서도 어려웠다.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는 비중이 컸다. 다시 펼쳤을 뿐인데 전보다 쉽게 읽혔다. 이해도 잘 됐다. 차에 대해 꾸준히 공부해온 것도 아닌데. 글 쓰고 독서하며 문해력이 늘어서 그런 건가, 시험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공부라 그런건가 머리에 쏙쏙 박혔다.



만일 내가 일상에서 차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가 티소믈리에 자격증이 있다는 걸 알리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가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기회가 올 수 있었을까. 이 기회를 놓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다시 공부할 기회도 없지 않았을까? 신청 인원이 미달이라 폐강될 확률이 높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내가 진정 tea를 좋아하고, tea를 내릴 때 행복하다는 걸 깨달은것 만으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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