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인 베를린

by 옥상평상

11살 일기

과자를 너무 많이 사는 바람에 체코 동전을 몇 개 모으지 못했다. 아쉽다.


9살 일기

똑같은 조식이 지겹다.




숙소에 묵는 내내, 그저 그랬던 조식은 오늘 그 최악의 맛을 보여줬다. 출발을 위해 짐을 싸느라 늦어 버려 식은 음식을 먹은 탓도 있었지만, 3일 내내 똑같았던 메뉴에 물려버린 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조식에 대한 실망감을 숙소에 두고는 얼른 짐을 챙겨 나섰다. 독일로 출발하는 새로운 기분을 겨우 조식 따위로 망칠 수는 없었다.


4일 동안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레트나 스타디움이 오늘은 이상하게 눈에 밟혔다. 막상 이곳을 떠나려니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어제 들렀던 레트나 공원도 '레트나'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검색을 해보니 체코의 축구리그에서도 열정적인 응원으로 유명한 AC 스파르타 프라하의 홈구장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와 형제들은 체코의 국내 리그까지 챙겨볼 정도의 축구 마니아는 아니었다.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조차도 과감히 스킵했던 우리가 아닌가? 레트나 스타디움을 추억의 한 모퉁이에 접어두고는 독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4일 동안 매일 타며 익숙해진 트램에 올라 프라하 중앙역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니 새삼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프라하는 그만큼 매력이 있는 도시였다. 쓰고 남은 체코의 코루나 동전들을 아이들에게 적당히 나누어 주었다.


" 역에 도착하면 네들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사 먹어."

" 와! 신난다."


아이들이 아직까지 동전으로 해결이 가능한 과자 따위를 좋아하는 나이라는 것이 새삼 고마웠다.


이제 우리 여행의 남은 나라는 지금 향하는 독일을 포함해 벨기에 영국 세 나라뿐이었다. 그동안 지나온 나라가 머리에 하나하나 떠올랐다.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두 달여의 기간 동안 모두 일곱 나라를 다녔다. 남은 세 나라만 돌면 총 열 개의 나라를 여행하게 되는 것이었다. 80일 정도 되는 기간에 한 나라에 평균 열흘 씩 머문 셈이었다.


베를린행 기차에 올랐다. 베를린까지는 4시간 반 정도가 걸릴 예정이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내게 있어 낭만보다는 하드보일드 한 이미지가 강했다. 아마도 냉전시대 베를린 장벽을 사이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던 사실과 '본 슈프리머시'나 '베를린' 같은 첩보 액션 영화에서 받았던 느낌 때문이리라. 지금도 베를린의 오래된 골목 어딘가에서는 은밀하게 비밀 첩보 작전이 수행 중일 것만 같았다.


베를린 역에 내린 우리는 교통권을 구입해야 했다. 역시나, 처음 도착한 도시의 낯선 교통 시스템은 언제나처럼 나를 당황하게 했다. 1일권을 끊으면 동반 어린이는 두 명까지 교통비가 무료라는 이야기에 1일권을 구입하려 했지만 발매기 화면에서 도무지 1일권 표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아이들 것까지 모두 해서 1회권 3장을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미 늦은 오후인지라 오늘은 특별히 움직이지 않을 계획이었다.


도착한 호텔은 예약사이트에 나온 사진과는 달리 조금 오래되고 낡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친절한 리셉션과 깔끔한 관리 덕분에 낡은 이미지가 많이 상쇄되었다. 대충 짐을 풀고 정리하자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인근에 위치한 마트에서 저녁거리로 소시지와 빵, 맥주 등을 사 왔다. 마침 티브이에서는 독일어로 더빙된 영화 '타이타닉'이 방영 중이었다. 사랑꾼 '잭'을 연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독일어로 하는 사랑의 속삭임은 꽤나 낯설게 다가왔다. 내게 디카프리오의 속삭임은 항상 영어여야만 했던 모양이다.


국경을 넘어온 내 의식은 침몰하는 타이타닉처럼
베를린의 심연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가고 있었다.



20170415_161627.jpg 베를린 숙소는 '주차장 뷰'였다. 금방이라도 '제이슨 본'이 튀어나와 총격전을 벌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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