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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철학의 길 그리고 식당 로리안

by 옥상평상

뭔가 책이라도 한 권정도는 들고 가야 할 것 같은 '철학의 길'표시
이 수로를 쭉 따라간다면 비와호를 만날지도 모른다.


교토의 서북쪽에 위치한 비와호(琵琶湖)는 비파처럼 생겼다고 해서 비와호라고 불린다. 일본 창조설화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제주도의 탄생설화 속 설문대할망같은 역할의 거인 다이다라봇치는 하룻밤 만에 일본에서 가장 거대한 산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비와호 자리의 흙을 퍼 담아 남쪽에 옮겨 쌓아 올린 것이 오늘날의 후지산이 되었고 흙을 퍼담은 자리에는 물이 차오르면서 비와호가 되었다.


'철학의 길'


교토의 철학자 '니시다 키타로'가 이 길을 걸으며 사색을 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은각사(지쇼지)로부터 난젠지까지의 2킬로미터 정도의 길을 말한다. 철학의 길 옆으로는 비와호로부터 흘러나온 물이 생각의 흐름처럼 천천히 흐르고 있다. 일본을 창조한 때에 생겨난 호수의 물과 철학이라니 일상을 신과 함께 하는 일본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https://maps.app.goo.gl/E2qViUAPC698hDRw7


그나저나, 봄에는 벚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들어 아름다운 길이라는데 우리 가족은 하필 겨울에 와버렸다. 아이들에게 사색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은각사를 나와 주전부리 몇 개를 사주고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사실 오늘은 일우가 가이드를 맡기로 한 날이었다.


"아빠, 내가 가이드 할 테니까 천 엔만 주세요."

천 엔이면 우리 돈 만원이다.

"응, 하는 거 봐서."

"그럼 기본으로 500엔 주시고 잘하면 500엔 더 주세요."

"좋아."


그렇게 일우의 1일 가이드가 시작되었다.


수로교가 있는 난젠지까지 이어지는 철학의 길은 2킬로 미터 정도라고 하는데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은각사에서 한참을 둘러보고 또 걸으려고 하니 더 힘이 드는 모앙이었다. 가이드를 맡은 일우가 맛집인 우동가게를 힘들게 찾았건만 때 마침 가게는 신년 연휴로 영업을 쉬고 있었다.


"아, 배고픈데 식당은 어딨 는 거야?"

"응, 지금 찾고 있으니깐 좀 참아봐."


슬슬, 배가 고파진 혁우가 짜증을 내기 시작하자 일우가 달래며 말했다. 혁우와 마찬가지로 허기를 느끼기 시작한 우리에게 이 '철학의 길'은 슬슬 '고난의 길'로 바뀌어 다가오고 있었다.


일우가 필사적으로 구글지도를 돌려 식당을 찾았지만 찾는 족족 모두 신년을 맞아 영업을 쉬고 있었다. 연초에 일본을 방문하면서 이미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긴 했지만 막상 끼니를 놓칠 정도가 되니 좀 당황스러웠다. 더군다나 오늘은 은각사를 거쳐 난젠지를 지나 기요미즈 데라까지 7킬로미터 이상을 계속 걸어야만 했다. 어서 식당을 찾아야만 했다.


대부분의 식당이 이렇게 연말에서 연초까지 열흘 정도를 쉬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엄마와 혁우가 식당 한 곳을 발견했다. 식당 로리안, 처음에는 식당의 굳게 닫힌 문을 보고 영업을 하지 않고 있는지 알았다. 하지만, 배고픈 김에 용기 내어 힘껏 문을 밀었더니 열리는 것이 아닌가?


카운터에는 백발의 할머니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보통 영업 중인 일본의 식당은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를 하며 반기는데 그녀의 태도를 보니 이곳도 역시 글렀구나 싶었다.


"혹시... 지금 영업 중이신가요?"

"예."


그녀의 짧지만 확실한 대답에 비로소 나의 긴장이 풀렸다. 허기와 추위에 오전 내내 지쳤던 우리 가족은 구세주를 만난 것 마냥 허겁지겁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보통, 동네 식당의 메뉴는 이 정도 가격이었다.
너무 저렴했던 식당 로리안의 가격표


벽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보았다. 보통의 일본 식당에 비해 너무 저렴한 가격이었다. 제일 비싼 오므라이스가 750엔에 불과했다. 최근 우리나라의 물가는 너무 빨리 올랐다. 특히, 우리가 사는 관광지인 제주도는 이제 만원 이하의 식사를 찾는 것이 그야말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에 비해 일본은 아직 물가가 덜 오른 편이라 어떤 때는 우리나라 음식값보다 저렴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반찬도 제공되지 않고 그 제공되는 양도 우리나라에 비해 작은 까닭에 단순 가격의 비교만으로 일본이 저렴하다고는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서도 말이다.


"뭐 먹을래?"

"뭐가 있는데요?"


하긴 일본어를 모르는 아이들이니 메뉴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오므라이스, 야키소바, 라멘, 카레라이스... 그냥 그럼 우리 하나씩 시켜서 나눠먹어 볼까?"


이런 작은 식당에서는 메뉴를 통일해서 주문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지만 하나씩 맛을 보고 싶은 욕심에 모른 척 주문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할머니는 내 주문을 모두 듣고도 별다른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주방 옆에 있는 문을 열고는 들어가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을 뿐이었다. 언뜻 봐도 비슷한 나이인 게 남편 분인 것 같았다. 아마도 주방은 남편분의 몫인 모양이었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의 할아버지는 쉬다가 불려 나왔는지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활기가 없었다. 하지만, 주방에 들어서고부터는 태세가 달라지면서 지극히 익숙한 동작으로 불을 붙이고 팬에 기름을 둘렀다.


'이래 보여도 내가 여기를 이십 년 동안 지켜온 셰프라고!'

'얼마든지 주문해 보셩!'


그의 익숙하고 날랜 몸동작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작지만 오래된 동네 식당의 경험 많은 셰프의 위엄이 그제야 내게 전해졌다.


한, 이십 분 정도가 지났나? 할머니가 불편한 걸음으로 음식을 담은 접시를 들고는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배가 고팠던 아이들은 음식을 받자마자 게눈 감추듯 후딱 해치웠다. 혹시나 맛이 없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사실 음식맛은 평범했지만 허기졌던 아이들은 너무 맛있게 그릇을 비웠다.



그제야, 추위와 배고픔에 힘들었던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맞이해 준 이 오래된 식당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변두리 마을에서 우리 아이들의 나이보다도 훨씬 오랜 세월 동안 운영해 왔을 이 오래된 식당의 노부부를 만난 것도 신기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의 길'은 그렇게 다시 한번 '인연의 길'로 다가왔다.


"너희들, 아이스크림 먹을래?"

"좋아요!!"


나는 북해도산 우유 아이스크림과 우지산 말차 아이스크림 두 개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할머니가 다시 힘겨운 걸음으로 조금 전 할아버지를 부르러 갔던 공간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할머니는 한눈에 봐도 정성스레 아이스크림을 꽉꽉 눌러놓은 과자로 만든 콘을 가지고 돌아왔다. 아이스크림은 받은 아이들은 이번에도 역시 게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아이스크림 왜 주문했어요?"


식당을 나오는데 아내가 내게 물었다.


"그야, 먹고 싶었으니까 주문했죠."

"그냥 식당에 뭔가 더 보탬이 되고 싶었던 건 아녜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던 그 순간, 나는 이 노부부가 앞으로도 오랫동안 이 장소에서 식당을 지켰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역시 아내는 귀신이다.


https://maps.app.goo.gl/ZpkvYcMXC3aNQx1c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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