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처럼철학하기
아리스토텔레스는 만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모든 부분을 아우르는 전반적인 학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만큼 폭이 넓어서 깊이가 덜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기우였다. 각부문의 깊이 또한 가히 놀라울 정도이다. 서양 철학사의 큰 획을 그은 대철학자의 사상을 접하는 이 순간은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수학에 열의를 덜 나타내는 대신 경험적인 자료들에는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시간이 흐를수록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은 자연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들에 좀 더 확고히 고착되어 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추상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이 생동하는 자연 속에 뿌리박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에 플라톤은 사유의 세계를 변화하는 사물들의 세계와 분리시키면서 이데아와 형상들에게 참된 실재를 부과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참된 실재는 본래 사물과 분리된 채 존재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사상이 초시간적 <존재>의 정적인 영역에 좀 더 밀착되어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사상을 <생성>의 동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2. 논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식 논리학을 창안했다. 그는 논리학을 어떤 과학이 내포하는 문제들을 분석할 때 그것을 적절히 언표 할 수 있는 도구 organon라고 생각했다. 그가 특히 집중했던 문제는 인간이 실재에 대해 정밀한 언어로 진술할 수 있는 것, 즉 <어떠한> 사물이 존재하며 <왜> 그것은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에 관한 문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과학은 참된 명제들로 구성되며 그것들은 왜 사물들이 이렇게 행동하고, 저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은 <사실>과 <이유>에 대한 지식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관찰과 관찰된 결과들을 설명하는 이론을 모두 내포한다. 그러므로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형성하는 언어인 것이다. 과학적 언어는 가능한 한 엄밀하게 과학의 주제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명백히 제시해 주어야 하며, 왜 사물들이 이러저러하게 행동하는가를 밝혀 주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사유에 대한 연구로서 단어들은 그 사유에 대한 기호들이다. 즉 그것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반영하는 사유를 분석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실재에 관한 인간의 사유를 분석하기 위한 도구다. 확실히 사유는 실재를 항상 정확하게 반영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언어와 실재 간의 좀 더 적절한 관계의 정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논리학의 기능이다.
2.1. 범주와 추론의 출발점
이러한 관계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범주 개념을 발전시켰다. 범주들은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 사유하는 방식을 설명해 준다. 우리가 하나의 분명한 주제에 관해 사유할 때 우리는 하나이 주어와 그것의 술어들, 즉 <실체>와 그것의 우연한 성질들을 고려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인간이라는 단어를 <크다>나 <유능하다>와 같은 술어들과 관련시킨다. 여기서의 <인간>이라는 단어는 실체며 거기에는 아홉 가지의 <범주들>(술어들을 뜻하는 것으로서), 즉 양(6피트 높이), 질(말할 줄 안다), 관계(이중적이다), 장소(학교에서), 시간(지난주에), 상태(서 있다), 소유(옷을 입고), 능동(봉사한다), 수동(봉사받는다)이 관련된다. 이 범주들은 과학적 지식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의 분류를 의미한다. 그것들은 모든 존재가 존재하는 방식과 실현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사유 과정에서 사물들을 범주 내에 배열하며 그 범주들을 유(類), 종(種), 개체(個體)들로 분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범주나 분류들을 정신의 인위적 피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이 정신 외부에, 그리고 사물들 내부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려는 것은 <과학>으로 접근하는 일련의 순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순서는 첫째, 사물들의 <존재>와 그것들의 과정들이며, 둘째, 사물들과 그것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사유>이며, 셋째로 사물들에 관한 사유의 <단어>로의 전환이다. 언어는 과학적 사유를 정식화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논리학은 언어의 분석인 동시에 추론 분석이며 언어와 추론이 실재에 관련되는 방식의 분석이다.
2.2. 삼단 논법
논증적 추론(대전제 참)은 확실한 전제들, 원리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1원리들 archai>을 전제해야 한다. 논증적 추론은 참된 제1원리들, 즉 어떤 사물이나 유의 엄밀하게 정의된 속성들로부터의 추론이다. 그러므로 타당한 추론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참된 제1원리들의 발견을 전제한다.
어떤 진리를 <인지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2+2=4를 인식할 때처럼 진리를 즉각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3. 형이상학
<모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앎을 갈망한다>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감각적 대상들 및 그것들의 성질로부터 획득된 지식 이상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동일한 사물들의 반복된 경험에서 획득된 지식보다 우위에 있다. 그 대신에 지혜란 과학자가 소유하는 지식과 유사한 것으로서 과학자는 어떤 것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해서 이 감각적인 경험들을 반복하며 결국 그가 경험한 대상들의 원인들에 관해 생각함으로써 감각적 경험을 뛰어넘게 된다. 과학은 정의 가능한 탐구 분야들의 숫자만큼 많이 존재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 중 많은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는 물리학, 윤리학, 정치학, 미학이 포함된다. [이들 과학은 그 과학의 주제에 대한 활동의 근저에 놓여 있는 원인, 이유, 원리들을 발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물리학에서는 무엇이 물체를 움직이게 하는가를, 윤리학에서는 무엇이 행복한 생활을 가능케 하는가를, 정치학에서는 무엇이 훌륭한 국가를 가능케 하는가를, 미학에서는 무엇이 좋은 시를 가능케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여러 과학의 위계질서 속에서 <각각의 사물들이 행해져야 하는 목적을 아는 과학이 모든 과학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과학이며 어떠한 보조 과학들보다도 큰 권위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개별 과학들 이외에도 다른 하나의 과학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제1철학>또는 이른바 <형이상학>이다. 형이상학은 다른 과학들의 주제를 넘어서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참된 실재에 관한 지식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가장 추상적인 수준의 지식을 취급한다. 이 지식은 특정한 것 대신에 보편적인 것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추상적이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3.1. 정의된 형이상학의 과제 (사물의 제1본질은 “실체”다.)
<이런저런 사물은 무엇이며, 또 왜 그러한가>를 묻는 이들 과학과는 달리 형이상학은 좀 더 일반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이 문제는 과학이 궁극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데 <과연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형이상학』에서 관심을 기울였던 질문이었고, 결국 그에게 형이상학은 <존재자(개별 사물)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학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했던 형이상학의 과제는 존재와 그것의 <원리들> 및 <원인들>에 관한 연구였다.
*철학하는 이유는 존재자에 대한 경외감 때문이다.
3.2. 사물의 제1본질로서 실체
우리가 어떤 사물을 더 잘 인식하는 시기는 우리가 그것의 색이나 크기나 양태를 알 때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라는 것이다. 정신은 사물을 그것의 모든 성질과 분리시켜 그 사물이 실제로 무엇인가, 즉 그것의 <필연적인 본질>에 집중한다.
*실체 + 속성 우연적 속성
필연적 속성
*실체 안에 영혼+육체가 공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실 체 이데아 (영혼과 육체는 분리)
형상 + 질료 인간 형상 = 영혼 질료 (육체)
(모양)
3.3. 질료와 형상
그러므로 이 보편자들은 단순한 정신적 허구가 아니라 객관적인 실재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것들의 실재는 개체들 그 자체 내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는 <보편적 형상들이 완전히 분리된 채 존재한다는 가정에 의해 무슨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만일 그렇게 존재한다면 이는 사태를 더 복잡하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만물은 (개체들과 그것들 간의 관계를 포함하는) 형상들의 세계에서 모사되어야 하므로 두 배로 늘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형상론이 사물들을 더 잘 인식하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형상들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지식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계속된다. 형상은 운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상으로 나타난 사물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은 운동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형상은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대상을 설명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물질적인 형상들이 어떻게 특정한 사물과 연관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반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사물이 형상을 <분유 한다>는 플라톤의 설명도 만족스러운 것이 못 되었다. 결국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것들이 원형이며 다른 사물들이 그것들을 분유 한다는 주장은 시적인 비유이며 말장난일 뿐이다.>
3.4. 변화의 과정 : 네 가지 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들>은 (1) 어떤 사물이 무엇인가는 결정해주는 <형상인>, (2) 사물이 만들어지는 <질료인> (3) 사물을 만들어 주는 <작용인> (4) 사물이 만들어진 <목적인>이다.
3.5. 가능태와 현실태
*씨 (가능태, 잠재태) 나무 (현실태)-목적인
만일 만물이 변화, 즉 생성 소멸의 과정 속에 있다면 만물은 가능태를 함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태가 존재하기 전에 현실태가 존재해야 한다. 잠재적인 사물들의 세계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적이거나 소멸하는 사물들보다 더 상위 수준의 어떤 현실태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가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은 어떠한 가능 태도 없는 순수한 현실태로서의 최고 존재라는 개념을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 부동의 동자 the Unmoved Mover
3.6. 부동의 동자
운동이나 변화의 발생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 모든 가능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변화의 사실은 현실적인 어떤 것을, 다시 말해 가능태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현실태를 전제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부동의 동자는 힘을 발휘한다는 의미에서의 <작용인>도 아니며 <의지>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들은 가능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실재는 변화의 과정, 다시 말해 가능태로부터 그 가능태의 궁극적 완전화로 진행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동자를 운동의 <이유>나 <원리>로 채용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부동의 동자는 현실적인 운동의 원리이며, 어떤 가능 태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운동의 <영원한> 원리이다.
어떻게 부동의 동자가 운동의 <원인> 일 수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는 그것을 한 명의 사랑받는 사람과 비교했다.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움직인다>. 즉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좀 더 기술적인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동자를 <형상>으로서, 세계를 실체로서 간주했다. 그는 자신의 4 원인론의 관점에서 부동의 동자를 <목적인>이라고 했다.
4. 인간의 위치 :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존재하는 사물들 중에서 어떤 것은 본성적으로 존재하며 어떤 것은 다른 원인들로부터 존재한다. 동물들과 동물들의 신체 각 부분들은 《본성적으로》 (자연에 의해) 존재한다. 식물들과 단순 물질들 – 땅, 불, 공기, 물 – 도 마찬가지다.>
4.1.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세계 내에는 어떠한 원질들이 존재하며 사물들은 그것들의 <본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는 이를 <단순 물질들>, 즉 공기, 불, 흙, 물이라고 칭했다. 만물은 예외 없이 이 물질들로 분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물질들이 서로 결합될 때 그것들은 새로운 실체들을 형성한다.
4.2. 생물학
4.3. 심리학
감각적인 영혼은 동물의 수준에서 발견된다. 그것의 주요 특성은 <질료>를 통하지 않고 사물의 성질과 <형상>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라는 개념을 사용해 감각적인 영혼이 사물들을 감각하는 방식을 설명했다. 감각 기관들은 다양한 형상을 감각할 수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감관은 어떠한 성질과 잠재적으로 부합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면 눈에는 푸르게 될 수 있는 가능태를 지닌 물질이 틀림없이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대상이 감각될 때 그 물질은 실제로 푸르게 된다. 눈의 이러한 중립적 물질은 잠재적으로 모든 색과 모양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의 다른 감관도 다른 성질과 관련하여 유사한 가능태들을 소유한다.
4.4. 인간의 이성
인간의 영혼은 좀 더 낮은 형식의 영혼들, 다시 말해 식물적인 영혼과 감각적인 영혼을 결합시키며, 이들 영혼 이외에도 <이성적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 이성적 영혼은 과학적 사유의 힘을 지닌다. <이성>은 사물들 간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분석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사물들 간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성적 영혼은 과학적 사유 이외에도 심사숙고>하는 능력을 지닌다. 여기서 정신은 어떠한 진리가 사물의 본성에 존재하는가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위한 지침도 발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능동적 지성은 부동의 동자와 동일하다. 부동의 동자의 판명한 행동은 순수 행위며, 순수 행위는 모든 실재에 관한 진리와 완전히 조화된 정신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가지적 구조로서 간주된 형상들의 전 체계는 세계의 영혼, 부동의 동자, 능동적 지성에 대한 연속적인 지식을 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지성이야말로 불멸적이다. 따라서 수동적이며 잠재적인 인간의 지성은 어떠한 진리에 대해서 인간적 지성이 인식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능동적 지성을 지닐 뿐이다. 인간이 죽을 때도 죽기 않는 것은 능동적 지성에 속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인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 개인의 영혼은 그것의 질료인 육신과 함께 사라진다. 오직 순수한 활동만이 영원하다.
5.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론은 인간을 포함한 자연 안에 있는 만물에게는 성취하려는 분명한 <목적>이나 수행하려는 기능이 존재한다는 그의 신념에 중심을 둔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예술과 학문 그리고 모든 행동과 추구는 선은 지향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윤리학을 위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이 지향하는《선》이란 과연 무엇인가?>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선과 정의의 원리는 모든 개인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원리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발견될 수 있으며 일상생활에서의 현실적인 행동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5.1. <목적>의 종류
평화란 인간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목수나 의사나 장군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그때 우리는 모든 다른 행동을 수단으로 삼는 <그것 자체를 위한> 행동에 도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행동이 <선(善 좋음, good) 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선>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선>이라는 단어를 어떤 사물의 특수한 기능과 연결시켰다.
5.2. 인간의 기능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목적은 <단순한 생활의 영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식물들에게조차도 분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에게 고유한 그 무엇을 원하다>. 또한 감각적인 생활의 경우도 <말이나 소 등의 모든 생물>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원리를 지닌 요소의 능동적인 활동만이 남는다. 만일 인간의 기능이 하나의 이성적 원리를 추종하거나 내포한 영혼의 활동이라면……인간의 선은 덕을 수반한 영혼의 활동임이 증명될 것이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한 분석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암시되고 있는 인간의 특수한 행동 양식을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비이성적 부분에 대한 이성적인 통제와 인도를 의미한다. 더욱이 선한 인간은 선한 행위를 시시각각으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모든 생활이 선으로 항상 충만해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한 마리의 제비나 단 하루의 화창한 날이 봄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하루나 한 순간이 인간에게 은총과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5.3. 목적으로서의 행복
올바른 방식의 행위는 결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덕적 행위는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어떠한 것도 자연적으로 그것의 본성과 대립되는 습관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은 습관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도덕은 올바르게 사유하는 습관, 올바르게 선택하는 습관, 올바르게 행동하는 습관의 발전과 관계한다.
5.6. 관조
만일 행복이 우리에게 고유한 본성에 따라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의 최고 본성에 따라 행동할 때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것은 합당하다. 이러한 행위는 관조적인 것이다. 이 행위가 최상의 것인 이유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우리의 내면에서 최상의 것일 뿐 아니라, 이성의 대상도 인식 가능한 대상 중에서 최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관조는 가장 연속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일을 행위할 때보다도 더 연속적으로 진리에 관해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행복이 그것과 결부된 쾌락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철학적 지혜의 행위들은 가장 환희에 찬 덕행들임에 틀림없다.>
6. 정치학
플라톤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적인 국가를 위한 청사진을 그리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매우 급진적인 이상에 대해 인내할 수 없었다. 전사 계층의 가족 폐지와 그 계층의 어린이에 대한 국가의 양육과 같은 플라톤의 구상을 비웃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 이론에는 소위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형이 동생을, 동생이 형을 염려해 주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재산의 공동 소유도 인간의 근본적인 쾌락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비능률과 끊임없는 분쟁을 야기할 뿐이다.
7. 예술 철학
결국 플라톤의 예술관은 예술의 인식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었고, 따라서 그는 실재로부터 몇 단계 떨어진 예술은 지식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결론을 짓게 되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적인 형상이 구체적인 사물들 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술가는 보편적인 것들을 직접적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사물들을 연구하면서 그것을 예술의 형식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다.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와 역사를 비교하면서 시의 인식론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단지 특수한 인간과 사건을 취급하는 역사가와 달리 시인은 인간의 근본을 다룬다. 따라서 시인은 보편적인 경험을 다룬다. 그 양자의 진정한 차이는 역사가 이미 일어났던 것에 관심을 갖는 반면에 시는 일어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시는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며 좀 더 높은 수준에 있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려 하지만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표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비극의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했고, <카타르시스 catharsis>라는 개념에 집중했다.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은 감정을 추방하고 더 나아가서는 관객의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극은 어떤 행동의 모방이다. ……공포나 연민을 통하여 이러한 감정들을 적절히 추방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