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민혜 Feb 12. 2021

최초의 기억

브런치를 만나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상담을 받기 시작한지 두 번째 날이었다.


"당신에게 떠오르는 가장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2m쯤 거리를 두고 앉은 의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은 곧 잘 왜곡되고 미화된다.

나의 최초의 기억. 그걸 믿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사에게는 나름 중요한 화두였던 모양이다.


"유아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하원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 창밖에서 엄마가 라면 한 봉지를 손에 들고 흔들며 나를 보고 있어요. 빨간 고추 그림이 그려진 라면이었어요."

이 기억에 무슨 의미 같은게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며 잠시 나도 생각에 잠겼다.

의사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을 뿐 더 이상의 말을 거들지는 않았다. 


그 밖에도, 친구와 싸워서 선생님께 혼이났던 기억. (싸움이라기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그 아이를 때린 사건이었고, 그것 때문에 엄마가 유아원에 소환되어 왔다. 그 친구를 떄릴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지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여기서는 넘아가도록 한다.)

우리 세 식구가 함께 살던 방 한 칸 짜리 작은 집. 그 집 부엌 겸 욕실에서 엄마 아빠가 내 머리를 감겨주었던 기억. 집 앞 큰 길에서 놀던 내 또래 아이가 1t 짜리 트럭에 치어 죽었던 기억. 그 자리에 남아있던 선명하고도 빨갛던 피웅덩이. 사실, 그 중 어느 것이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최초의 기억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 길이 없다. 

여기까지가 내가 부산에 살던 3살 무렵의 기억이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임은 분명하다. 행복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가난했던 것 같고, 외로웠던 것 같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나는 3살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는데 그 기억은 사실 왜곡되었던게 아닐까 싶다. 엄마가 되고 나도 아이를 키워보니 3살난 아이가 글을 읽는다는게 언뜻 이해가 가질 않는다. 만약 엄마 말이 진짜라면 나는 일찌감치 '글'이라는 것에 나름 재능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가난했고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우리는 아빠 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아빠는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듣도보도 못한 먼 나라로 돈을 벌러 떠났다.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없는 형편에 몇 권 되지도 않는 책을 닳도록 보고 또 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리고 글쓰는 것을 좋아했다. 5살이었다. 


처음으로 나의 글쓰는 능력에 대해 평가를 받은 것은 다소 예상치 못한 곳에서부터였다.    

감수성이 예민하달까. 혼자 자란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나는 친구 관계에 있어서 줄곧 애를 먹어왔고, 그 문제에 대해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마침 내가 구독하고 있던 학습지 맨 뒷 면에 '고민이 있으면 편지를 보내주세요'라는 부록이 실려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내 고민을 적어 보냈다. 얼마 후에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글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차 있었다. 정작 내 고민이었던 교우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상담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선생님이 해 주는 칭찬이 나를 달뜨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고 정확하게 잘 표현할 수가 있나요?,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합니다. 누군가는 노래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몸짓으로 표현하지요. oo 어린이는 아마도 글로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 같아요." 


30년도 더 된 일인데 나는 그 문장과 표현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체통에서 편지를 뽑아 든 채로 그 자리에 서서 읽고 또 읽었다. '아, 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구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 능력에 대한 인정을 받은 날이었다. 9살이었다. 


자신감이 붙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교내외 글쓰기 관련된 대회에는 모두 참가했고, 모든 상을 휩쓸었다. 모두가 내 글에 대해 칭찬을 했다.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나름 어려움 같은게 있었는데, 소위 말해, '판을 깔아주면', 글이 잘 써지지가 않았다. 평소에 하는 생각들, 혼자 끼적이는 글들은 썩 괜찮은 것들이 많은데 막상 '글을 써라' 하고 판을 깔아주면 무언가 틀에 갇힌 것 같고 평가를 받는다는 위압감 때문에 좀처럼 자연스럽게 글이 써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내 글에는 기복이 심했다. 그것은 결국 정식으로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나를 주저하게 만드는 큰 걸림돌이 되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거칠 때마다 내 글을 알아봐 주고 그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주는 선생님이 꼭 한 분씩은 계셨다. 그게 무언지는 모르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일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보다 구체적으로 조언해 주시는 분도 계셨다. 뜻밖에도 그 분은 나의 전공도 아닌, 우연히 들었던 교양 수업의 국문과 교수님이셨다. 그 분은 레포트를 제출할 때마다 꼭 메모를 적어, 내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레포트 검사하는 것이 기대된다고도 해 주셨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었어야 했을까. 막연하게 그러고 싶다는 생각은 늘 해 왔지만, 기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글을 쓰는 사람, 작가가 되기 위한 길이라면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신춘문예' 밖에 없는데 집에 들어앉아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를 꿈꾸며 글만 쓰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렇다할 아이디어도 없었다.  어떻게든 당장 먹고 살아야 했으니, 작가가 꿈이랍시고 무작정 글만 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니는 직장마다 번번이 2년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나는 평범한 조직생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남편이 아닐까 싶다. 나는 가끔 남편 앞에서 운다.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때문에 남편을 붙들고 무작정 운다. 그럴때면 그 사람은 내게 글을 쓰라고 했다. 그 사람은 나를 잘 아는 것이다. 


어는 날 남편이 내게 '브런치'라는 것이 있는데 아느냐고 물었다. 집에서 쌍둥이 육아를 하며 아는 것이라고는 우리 아이들 이름밖에는 없던 때였다. 남편은 그곳이라면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밤에 아이들을 재워놓고 조용히 찾아보았다. 이런 곳이라면 나도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평생 내가 꿈꾸어 왔지만 단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 한 그 도전을 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얘기한 것처럼 나는 '판을 깔아주면' 일시정지가 되어버리는 사람이다. 막상 판이 깔렸다고 생각하니 아무 것도 써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나 같은 사람이 쓴 글을 누가 봐줄까. 그런 공간에서조차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면 더 큰 상처를 받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망설이고 생각만 하다가 1년이 지났다.


나는 기본적으로 우울한 편이고, 가끔 행복하거나 즐거우며, 곧잘 슬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글로 적을 때, 나는 일종의 '배설'과 같은 쾌감을 느낀다. 이것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내가 글을 쓰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누가 내 글을 읽어줄까. 누가 내 글에 공감을 해 줄까. 누가 내 글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나의 막연한 꿈은 내 안에서 그렇게 조금씩 발전해 갔다.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글, 누군가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글, 그래,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내게 자격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수학문제 푸는 것이 제일 쉽고 글 쓰는게 제일 어렵다고 말하는 남편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학문제 푸는 것이 제일 어렵고 글 쓰는 것이 제일 쉽고 편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다. 브런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아닐까. 


요즘 우리 아이들이 하루에도 열 번은 보고 또 보는 영화 '겨울왕국'에서 작은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엘사가 얼음산으로 올라가면서 그 곳에 한 발을 성큼 내딛는 장면이다. 노래가 절정으로 치닫고 화면도 화려하게 변한다. 엘사가 내딛은 발끝에서부터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다. 이전의 자신을 벗어던지고 진짜 엘사로 변하는 나름 의미있는 장면이다. 딸 아이는 노래를 따라부르며 그 장면에서 꼭 자신의 발을 앞으로 쭉 내밀며 쿵 찍는 시늉을 한다. 이제 나도 그렇게 한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 발끝에서부터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하기를 기대하며. 


작가의 이전글 말의 무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