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원으로 하루 살기
서른한 살, 워킹홀리데이를 와도 너무 늦게 왔다. 호주에서 1년 남짓 지내보고 나니 더 있고 싶다. 미련 없이 떠나고 싶을 줄 알았는데 웬걸 더 있고 싶다. 남은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코비드 비자로 1년 더 연장해 지내고 싶었지만 시한부였던 코비드 비자는 9월부로 사라져 버렸고, 올해 말 나는 어김없이 호주를 떠나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이 되어버린 셈이다.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쉬프트가 많거나 시급이 높은 일을 굳이 찾아 하지 않았고, 딱 일한 만큼 통장 잔고가 쌓였다. 그마저도 바닥이 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정도의 통장 잔고가 됐다. 그렇게 디데이를 세어 가며 North QLD 로드트립도 다녀왔건만 만족할 줄 모르는 내 욕심은 커져만 갔다. 좋은 서핑 스팟이 많다는 South QLD, NSW 주도 내려가 봐야지, 아웃백도 가 봐야지. 이미 바닥나고 있던 내 통장 잔고는 로드트립 덕에 마이너스를 향해가고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나는 어느새 욕심쟁이가 되어버렸다. 돈은 없지만 행복하게 살고 싶어.
관광비자로 연장해 호주에 더 머물다 갈 생각이다. 친구가 물었다. 그럼 호주는 언제 떠나? 음, 돈이 다 떨어지면 가지 않을까? 사실 처음에는 돈이 다 떨어지면 이 생활도 끝나겠지, 단순하게 생각했다. 왜? 쫓겨나는 것처럼 돌아가는 건 싫었다. 원하는 만큼 머물다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처음으로 한 생각은 언제 어디서나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거였다. 눈에 들어온 건 온라인 한국어 튜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교육 봉사를 꾸준히 다니면서 학원 강사로, 입사하고서는 사내 강사로 활동을 했다. 퇴사 후엔 프리랜서 강사로 활동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내가 알고 있는 걸 전달하는 건 새롭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주제가 한국어였고, 과연 나는 한국어라는 언어를 잘 알고 있나? 한글이 뭔지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쉽게 알려줄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 같아 시작하기 전 친구들에게 한국어를 알려준다는 마음으로 교안을 만들어보고 있다.
그다음으로 한 생각은 소비에 대한 부분이다. 수입이 없다면 소비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그간 얼마나 멍청한 소비를 했던가 돌아봤다. 단순히 시간 때우기용으로 소비한 것들이 생각났다. 맥도날드에 들러 아이스크림 콘을 사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얼마나 마셨던가. 당장 필요하진 않지만 저렴해서 샀던 세일 상품들. 우선 이것들부터 줄여야겠다.
단연 호주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드는 부분은 주거다. 운이 좋게도 나는 차를 사고 지금까지 렌트를 하지 않았다. 차에서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렌트비(주거비)는 0원이 됐다. 가끔 하우스시터로 집과 강아지, 고양이를 돌봐주면서 호주 가정집에서 혼자 지내며 요리도 해 먹고 편하게 잠도 자고 친구들도 초대할 수 있었다. 물론 집주인이 허락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외 대부분은 길 위에서 잠을 청했다. 파도가 좋은 곳을 찾아다녀야 했기에 자주 도로 위로 나갔다. 휴게소에서, 길 위에서 잠을 자고 운전해 또 다른 곳을 찾아다니고 차에서 요리하고 잠을 자는 삶. 물론 불편한 점이 많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삶이다. 그리고 호주에서는 밴라이프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점도 이 생활을 수월하게 이뤄나갈 수 있게 안정감을 줬다.
그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교통비(기름값)이다. 어쩔 수 없이 소비해야 하는 부분으로 차 먹일 기름값을 벌기 위해 캐주얼이라는 근로 형태로 바짝 일하고 있다. 같은 카테고리로 식비가 있는데 이것 역시 아무래도 줄일 수 없는 부분이다. 여전히 저렴한 재료를 선택하기 위해 마트에 가지만 호주에 살면서 글루텐 프리와 비건의 차이가 뭔지도 알게 되었고, 플라스틱을 소비하지 않고 유기농 제품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조금씩 환경을 위해, 즉 내 몸을 위해 까다로운 소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고르고 소비하는 음식들이 나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됐다. 내가 첫 번째로 경험했던 하우스 시팅 집에는 큰 정원이 있다. 작은 채소부터 온갖 식물, 나무를 기르고 있었는데 샐러드용 채소, 대파, 라임, 가지, 토마토도 언제든 따 먹을 수 있었다. 또 닭을 돌보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신선한 달걀 후라이를 해 먹었다. 이 '자급자족'의 방식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게 새롭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와는 먼 다른 세상 이야기,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에서만 가능한 일인 줄 알았다. 빌딩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네모난 방에서 지냈던 몇 십 년의 세월 동안 어딘가에서 데려온 재료들을 마트에서 사서 먹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하우스 시팅이 아니더라도 노동을 제공하는 대가로 숙박 혹은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는 형태의 교환 시스템인 Worldpackers, Wwoof, Workaway 등 정말 다양한 형태의 여행 방식이 있다. 몇 주에서 몇 달을 일하며 지내면서 각자가 원하는 지역에서 원하는 삶을 얼마든지 꾸려갈 수 있지 않을까.
무료 캠핑장을 찾아다니고, 야외 바베큐장을 이용해 요리를 하고, 더우면 바다에 뛰어들고, 매주 열리는 지역 마켓을 꼭 찾아다닌다. 파도가 좋은 곳을 찾아 또 이동하고,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고, 또다시 어딘가에서 우연히 만나는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아,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형태의 삶이 있구나. 신기한 건 마음이 조급하다거나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삶은 행복으로 가득 차 보였다.
호주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땐 한국에서 채워온 잔고가 넉넉했기 때문에 여유로웠다. 그래서 조금 불편한 일이 생기면 돈으로 해결하곤 했다. 돈이 있을 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오히려 보이기 시작했다. 누구나 아늑하고 포근한 집을 원하지만 지붕 있는 집을 포기하고 나서 불편한 것보다 얻은 기회들이 훨씬 많다. 무료 캠핑장을 찾아다니면서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하우스 시팅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애틋한 인연도 만들 수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고 저녁이면 일찍 잠이 드는 아침형 인간이 되었고 그 덕에 조금 더 부지런해졌다.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게 되면서 행복을 자주 느꼈고 그렇게 좋아하던 서핑을 매일 할 수 있게 됐다. 돈이 필요할 땐, 다시 캐주얼로 벌면 된다. 가끔 벌고 꼭 필요한 것만 소비하는 삶으로 좋아하는 걸 하면서 오래오래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