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산골의 비밀파티

어린 날의 크리스마스 추억

by 이래춘

설국이다. 사십 년 만의 큰 눈이다.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져 내린다. 삭막한 도시 숲에 순백의 눈꽃이 피어난다. 연인들에게서는 환한 웃음꽃이 핀다. ​​
매일 아침 미술 이야기를 선물로 받고 있다. 지인이 카톡으로 화가의 일생과 대표작에 대해 설명해 준다. 덕분에 하루가 따스하게 시작된다. 오늘 화가는 '토마스 킨케이드'이다. 그는 눈 내리는 겨울 경치를 주로 그린다.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하얀 눈이 쌓인 산 밑에 오두막집이 있다.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림 속 아늑한 오두막집 풍경이 어린 시절 산골로 나를 데려간다.
남녀공학을 다녔어도 친한 여학생이 많지 않았다. 진학을 위해 교과서만 보고 수업을 마치면 곧장 집으로 가는 재미없는 청춘이었다. 그런 내게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한다는 쪽지가 왔다. 여학생 셋이 파트너를 정했는데 J는 나를 골랐다고 했다. 얼굴만 알고 있는 사이인데 왜 나를 선택했을까. 말수가 없으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을까. 설마 나를 좋아하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치를 살피며 쪽지를 건네는 J를 먼 산 보는 척하며 힐끔 보았다. 아담한 키, 갸름한 얼굴, 긴 머리, 살짝 패인 보조개를 갖고 있었다. 가을 교정의 코스모스가 생각났다. J는 무람했는지 더 이상 설명 없이 돌아서서 마악 뛰어갔다. 그녀의 머플러가 바람에 흔들렸다. 내 마음도 살짝 흔들렸다. 내 얼굴 오른쪽에 있는 보조개가 그녀에겐 왼쪽에 있었다. 좌우에 하나씩 있는 보조개가 만나 한 쌍의 보조개로 완성이 되듯 그녀와 나의 만남은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
겨울바람에 하얀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한 시간을 넘게 걸어 J의 집에 갔다. J는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 주었다. 부모님은 도시에 사는 오빠네 집에 갔다고 했다. 남학생 둘이 와 있었다. 멋쩍은 미소를 나누었다. ​
J의 방은 깔밋했다. 순정만화처럼 벽지에는 꽃그림이 그려져 있고, 창가에는 분홍빛 커튼이 쳐져 있을 줄 알았는데 평범한 방이었다. 하지만 방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여학생 셋 그리고 그녀들의 간택을 받은 남학생 셋이 자리를 했다. ​
흙 천장 서까래에 육십 촉 백열등이 걸려 있었다. 주황색 불빛 아래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백열등 아랫배가 거무스름해서 불빛이 어두웠다. 오히려 적당한 어둠이 마음 편했다. J가 안방에서 인삼주를 가지고 왔다. 마신만큼 새로 소주를 부으면 아버지가 모른다고 했다. 여러 번 해본 솜씨 같았다. 작은 상에 곶감이랑 홍시 그리고 여러 종류의 과자가 차려졌다. 한두 잔 술을 마시다 보니 긴장감이 사라졌다. ​
J가 선물을 주고받자고 했다. 파티 초대장에 작은 선물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장터 책방에서 산 '제인 오스틴'의 로맨스 소설 《오만과 편견》을 J에게 건넸다. 서점 주인의 추천으로 샀지만 소설처럼 J와 해피엔딩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J는 빨간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을 내게 주었다. 장갑을 끼니 아랫목처럼 따뜻했다. 세상 추위를 모두 녹여줄 것 같았다. 부모 몰래 뜨개질을 하며 J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오후부터 내린 눈이 밤이 되자 펑펑 함박눈이 되었다. 우리 고장은 눈이 많았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외동인 내가 눈을 치웠다. 평소에는 마당에 쌓인 눈이 곱지만은 않았는데 그날 봉창으로 보이는 설경은 풍경화였다. ​​
누군가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낮은 초가지붕에도 들에도 산에도 온통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뽀드득뽀드득, 사각사각 그녀의 눈 밟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선물 받은 빨간 벙어리장갑을 끼고 눈싸움을 하다가 커플끼리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사람은 사립문 앞에서 눈을 맞으며 우리들의 젊은 밤을 지켜주고 있었다. ​
초저녁 눈 속에 묻어 둔 고구마를 꺼내서 방으로 들어갔다. J는 고구마를 깎아서 내게 먼저 건넸다. 눈 속에서 탱탱 언 고구마는 달보드레한 맛이 났다. 이불 위에 군용 모포를 깔았다. 눈에 젖은 발을 이불속에 넣고 화투를 쳤다. 내기에 진 커플들이 이웃집 부엌에서 먹을거리를 서리해 왔다. 차가운 보리밥에 반찬은 시큼한 김치 하나뿐이었지만 어린 커플들에겐 성찬이었다. ​
새 학기에 J는 보이지 않았다. 오빠가 있는 도시로 전학을 갔다고 했다. 소꿉장난 같았지만 가슴 설렜던 비밀 파티의 추억만 남기고 J는 사라졌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내가 준 소설을 다 읽고 엘리자베스처럼 돌아오지 않을까, 혹시 쪽지를 줬던 방천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한동안 그녀가 떠올랐다.
폭설이 내린 다음날 도시 숲을 다시 찾았다. 눈꽃은 벌써 사라지고 스산한 풍경만 남았다. 도시에 핀 눈꽃은 하루도 안되어 저물었다. 눈이 녹은 길은 진창이 되었다. ​
우리 삶에서 눈 내리는 시간은 순간이다. 장엄한 새해 첫 일출도, 비 온 다음날 황홀한 저녁노을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어쩌면 빛나는 시간은 짧기에 더 빛나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순간이라도 함박눈 내리는 산골, 그 밤에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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