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심리학 #9

"일론 머스크랑 심리학 대결"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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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를 걸고 넘어지면 일론 머스크와 동격으로 보이는 효과가 생겨난다.


언어의 착시효과다.


황금이라는 언어를 발화하면, 그 발화자가 황금과 연결되어 있을 것처럼 인식되는 효과다. 말과 삶이 동일한 것이라고 믿는 유명한 착각의 형태다.


이 착시효과로 인해 언어는 고대사회에서 주술적 도구가 되어 왔다. 현대에서도 여전히 이 언어의 주술성을 믿으며 활동하는 이들을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오늘날은 사기의 시대인가.


사기꾼이 횡행하는 시대는 주술에 빠진 시대다. 인간정신의 퇴행기다. 유아적인 욕망이 해체되기는 커녕 오히려 지지되기만 함으로써 실제 현실과의 너무나 큰 괴리를 형성하게 될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욕망과 현실의 간극에서 생겨나는 것이 바로 망상이다. 그리고 그 망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이 주술이다.


그래서 인간만이 망상을 경험한다. 망상은 언어로 인한 질병이기 때문이다. 주술은 그 솔루션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욕망도 언어에 의한 것이고, 주술도 언어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언어를 통한 '병주고 약주고'의 상황이다.


병도 주고 약도 줄 수 있는 이는 최고의 권위자처럼 상정된다. 유아적 전능감이 그대로 구현된 마법적 정체성이다. 주술사들은 다 자신이 이렇게 보이기를 꿈꾼다. 수많은 사기꾼들이 권위를 얻는 일에 집착하는 이유다.


망상의 증세들을 살펴보아도 그것이 어떤 권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흥미롭게 드러난다. 자신이 어떤 권위를 갖고 있다는 내용이나, 그러한 권위를 갖지 못해 피해를 입는 내용 등으로 망상은 구성된다.


즉, 망상은 권위에 집착하는 어떤 표현이며, 주술은 그 권위를 날로 먹을 수 있다는 마법적 해결책이다.


왜 이렇게 권위에 집착하는지는 분명하다.


언어의 대표적인 도구적 기능은 분절이다. 구분하고, 분류하고, 상대화시킨다.


통째로 된 삶의 총체를 각각의 구성요소로 분절시킨 뒤 죄다 비교급으로 만든다고 해도 좋다.


그러니 언어에 빠져 살면 필연적으로 비교하며 살게 된다. 남보다 자신이 높은지 낮은지만을 끊임없이 견주며 평가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것이 또한 욕망의 내용이다. 욕망은 단지 어떤 것을 얻는 일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이 얻어야 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커다란 욕망은 커다란 비교를 만들며 그만큼 현실과의 커다란 간극을 만든다.


끊임없이 비교급으로 사는 이 일은 물론 몹시 피곤한 일이다.


자신이 최상급이 되면 이제 비교하며 애쓰는 일을 그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상이 생겨나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 최상급이라는 표현이 권위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의 앞에 the가 붙으면 더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믿게 된 이들이 이제 권위있어 보이는 외부의 것들을 모방하거나 또는 대립하는 형태로 걸고 넘어져, 자신 역시도 동일한 권위를 가진 이로 보이려는 주술적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비교의 현실은 끝나지 않는다.


주술적 이득을 얻기 위해 언어를 쓰고 있는 한, 비교의 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불을 끄기 위해 휘발유를 뿌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


비교의 현실을 끝내고 싶다면 비교급을 최상급으로 바꾸려고 궁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비교를 멈추면 된다.


비교를 멈추는 일은 쉽게 말해 일론 머스크를 실제로 만나게 되면 자신이 쳐맞은 뒤 방사능폐기물용 드럼통에 담겨 텍사스사막 어딘가에 버려지리라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애초 비교는 왜 시작되었는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떠올려보라. 분명하다. 두려움에 대한 태도로 비교가 만들어진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 앞에서 나는 그것과의 비교를 시작한다. 이제는 자신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잘나졌는지, 또는 여전히 무력한지 등을 비교급으로 끝없이 견주어나간다.


단순하게, 두렵다는 사실이 인정될 때까지 계속 비교 속에서 헤맨다.


욕망은 두려움을 회피하고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제다. 욕망의 모든 실제는 어떤 것을 얻으면 자신에게서 두려움이 영영 사라지리라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렵지 않으려고 우리는 그토록 소비하고 또 소유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또 남용하는 것이다.


이 습성은 오랜 유아시절의 잔재다. 부모에게 자신의 생존이 전적으로 위탁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유아들은 이제 부모를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한다. 부모가 떠나거나 자기에게 관심을 제공하지 않아 자신이 두렵게 될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부모를 자기 곁에 계속 묶어두려는 전략을 획책한다. 이것은 최초의 도구적 언어의 발화이며, 최초의 주술이다. 또 아마도 최초의 사기일 것이다.


유아들은 다소간에 어느 정도 다 사기꾼들이다. 그러나 귀여운 사기꾼들이다. 부모도 알면서 속아준다. 자기를 청하는 그 몸짓과 의도가 애틋하기 때문이다. 포유류의 유체가 생존을 위해 발달시킨 귀여움의 형질은 분명 성공적이다.


그러나 성체가 이러한 행동양식을 보이면 거의 정신장애로 분류된다.


거기에는 무엇을 해도 다 용서될 귀여운 아기라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망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이 귀여운 아기야말로 주술사들이 꿈꾸는 최상급의 실제적 내용이다.


자신이 'the 아기'로서의 권위를 얻게 되면 더는 비교될 것이 없어지고, 두려움이 영영 사라질 것이다. 엄마가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 거야, 후훗. 사기꾼들이 늘 엄마 같은 대상을 사기의 대상으로 물색하는 이유다.


왜 사기는 늘 일론 머스크와 심리학 대결을 펼친다는 식으로 유치하게 일어나는가? 또 그런 유치한 내용의 사기에 사람들은 대체 왜 넘어가게 되는가?


유아가 사기를 치고 있어서고, 엄마가 넘어가주고 있어서다.


오랜 유아시절의 패턴과 동일하게 늘 반복된다.


두려움을 회피하고 싶은 이들이 모여, 한쪽은 사기꾼이자 유아의 역할을 하고 다른 한쪽은 사기의 대상이자 엄마의 역할을 한다. 그렇게 이들은 두려움에 대해 공동주술을 펼친다.


"엄마 내가 3반 경식이, 이번 수학시험에서 아주 혼쭐을 내줄 거예요."


"어머어머 어쩜, 장하다 내 아들. 시험 끝나고 에바에 타렴."


전국 수학경시대회 1등인 경식이를 걸고 넘어져서 만들어낸 착시효과를 통해 구원받는 것은 양쪽 다이다.


엄마에게 버려질까봐 두려워 최상의 아이가 되고 싶었고, 아이를 유기하며 똑바로 못키웠다고 사회로부터 버려질까봐 두려워 최상의 엄마가 되고 싶었던 그 망상의 욕망들이 이제 언어를 통해 펼쳐진 가상현실 속에서는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도취될 만한 그런 분위기가 난다. 도취되면 두려움도 망각되겠지. 사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냥 이대로 속아있고만 싶다. 두려움을 다 잊고 싶다.


그러나 두려움이 왜 오는지를 이 주술공동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두려움이라는 마음에도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 달성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두려움의 목적은 경계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이 글에서 묘사한 바에 적용하자면, 경계없이 구는 유아적 전능성의 해체다. 주술의 기각이며, 우상의 파괴다.


즉, 자신을 최상급으로 가장한 거짓권위의 해체다.


자신이 전능한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우리는 두려워진다. 두려움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증거다. 그 경계의 확보다.


유아도 자신이 신의 옥좌에서 내려와 인간이 되어야 함을 직감하며 두려워진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려고 부모에게 매달리며 고집을 부린다. 부모를 남용하여 계속 신의 자리를 지속하고자 한다.


자신도 신이 되기를 망상하던 부모에게 생겨나는 것이 죄책감이며, 죄책감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가진 부모는 유아가 고집을 부릴 때 이를 맹목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유아가 망상하는 그 일이 자신도 하고 싶던 바였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그 경계를 흐리기 위해 주술공동체는 이처럼 필사적으로 주술행위를 지속한다.


그만큼 두려움도 지속된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주술로 사기를 치고 있지만, 사기를 치고 있기에 계속 두려워지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이유는 우리가 두려움과 대결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두려움에 대한 절대적 존중이다.


두렵다면 지금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경계는 분명해진다. 마침내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현실이 사라지고 고유한 것들에 대한 절대적 존중이 생겨난다.


누구나 한 번뿐인 그 자신의 고유한 시간을 산다. 인간의 시간을 산다.


그 시간을 알아보라고 두려움은 경험된다.


실은 그 시간을 알아보았기에 두려움은 경험된다.


유아 옆에 부모는 영원하지 않으며, 어떤 때는 그 반대이기도 하다. 다들 한 번뿐이다.


그러니 일론 머스크의 인생은 나의 장난감이 아니며, 나의 인생도 그럴 것이다.


바로 그 절대적 존중의 경계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만 경외한다. 이것이 두려움이 정확하게 목적한 바며, 쓸데없는 대결 속에서도 두려움이 늘 승리해내는 방식이다. 두려움이라는 인간조건이 이겼으니, 인간이 또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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