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는 주어가 없다"
잔을 먼저 엎어두고 말해보자.
건배는 그 다음이다.
일단 당신이 하는 말은 다 틀렸다.
나에 대한.
나에게 말하지 않고
나에 대해 하는 그 모든 말은
다 틀린 말이다.
나는 당신의 대상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앞에 실제로 있는,
결코 당신이 아니고,
결코 당신이 알 수 없는,
바로 타자다.
지금 말하는 이 의미는, 마치 심리상담자를 찾아가 당신이 내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대체 뭘 아냐고, 그렇게 집과 회사와 애인 앞에서는 착한 척하느라 내지 못하는 성질을 상담사에게 대신 꼬라지부리고자 발화하는 그 언술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게 누군가를 자신의 도구로 대상화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함께하는 만찬을 망치게 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도무지 왜 그런가?
단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대상화를 할수록 우리는 심대히 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것에 관한 가장 가치있는 진술, 다른 모든 수상한 얘기들은 다 쓰레기통에 버리더라도,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으면 평생을 건강한 존재로 살아가게 될 가장 핵심적인 이해.
<마음에는 주어가 없다>
<그러니 내가 하는 것이 내가 받게 되는 것이다>
붓다도 말했다.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예수의 말은 그와 다른 유치한 종류의 것 같은가? 동일한 것이다. 그가 천국을 펼쳤으니, 그가 만든 천국이 그에게 오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더 직접적으로 이 <황금률>이 묘사된다.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그러나 이것이 대상을 대하는 또 다른 수단적 원리에 대한 애기가 아님을 대철학자 칸트는 정언명령으로 분명히 한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는 진정성 또는 일치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일치성으로 기억하는 게 좋다. 허구의 소설 속에서도 다들 자기가 진정하다고는 믿어 의심치 않으며 길길이 날뛰기 때문이다. 일치성이라는 이름을 택하고 조금 진정하는 게 좋다.
대접하는 자와 대접받는 자가 일치한다면
그러면 마음에 주어가 없는 현실을 사는 것이다.
상대하는 대상이 없으니 이것은 절대적 현실이다.
그렇게 절대적으로 일치해 이제 힘차게 일어선 것의 이름을 말해보자.
<나>
<그것은 나다>
'나에 대해' 말하고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은 대상화가 되어 우리는 타자를 잃고 결국 나를 잃는다.
나는 타자 중의 타자
지금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그것과는 가장 다른 것이며, 가장 알려지지 않은 것
대상화를 하며 타자를 무시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타자 중의 타자인 <나>를 반드시 잃고야 만다.
나를 잃었으니, 우리는 반드시 틀린 것이다. 글러먹은 생이다.
어떤 좋은 말을 하더라도, 나를 잃은 입장에서는, 나에게 그 좋은 것이 향하지 않는다. 좋은 것 하나 없는 삶인데 살아서 뭐하겠는가.
그러니 나에 대해 당신이 하는 말은 다 틀렸다.
<나에게 말해보라>
<나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지를>
그러면 식탁 위에 접시들이 운반되어 온다. 어느덧 식탁이 가장 좋은 것들로 가득 찬다.
나는 사랑받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존중되고, 용서되고, 소중히 여겨지고, 귀하게 모셔지는 그런 것
이 오늘의 만찬은
오직 나만을 위해 차려진 식탁이었던 것이다.
그런 매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식탁에 앉아 함께하는 일이라고는,
나를 마시고, 나를 먹으며, 나를 기쁘게 나누는 그 일, 오직 그 일뿐
그것이 우리가 식탁에 모이는 이유.
이제 잔을 바로 세워 함께 드는 이유.
<나를 위하여>
당신이 처음 말해본 이 세상에서 가장 옳은 말.
오랫동안 기다려온 <나>에게 이제는 들려주게 된 참말.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넘치는 기쁨이 넘치는 기쁨을,
일치하는 것이 일치하는 것에 끌리며
이제 우리는
잔을 부딪치자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인
<나를 위하여>
마음의 목적은 언제나 나다.
이제 우리는 찾은 것이다. 그걸 위한 식탁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