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마법사전 #9

"마법은 실존한다"

by 깨닫는마음씨


illustration-carolina-zambrano-13-805x1007.jpg?type=w1600



마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이해하기 쉬운 정의를 채택해보자.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법이다.


"마법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쉽다. 그런데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마법은 실존한다."


'실존'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의 대표적인 존재방식이다. 그러니 상기한 두 표현은 정확하게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실존주의자들은 "나는 왜 사는가?"라고 하는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 실은 불가능한 형식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어쩌면 그 질문은 문답의 가치로서는 전적으로 무용하다. 어떤 대답이 이루어지든 간에, 그 대답은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프랑스의 실존마법사들은 '부조리'라고 불렀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기괴한 상황이다.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인간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기존의 통속적 믿음에 따르면, 본질이 먼저 규정되고 그 본질에 따라 실존하게 되었어야 하는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마땅하다는 본질 없이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묻고 있다.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이유가 없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존재해도 되건만, 자신의 존재함에 의문을 갖고 인간은 끊임없이 존재를 향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은 팔자좋은 이들만이 지적 허영을 위해 향유하는 자기표현이 결코 아니다. 모든 인간은 일상상황에서 늘 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자신이 어떻게든 잘못하거나 부족한 인물이 되지 않기 위해 하루의 매순간을 신경쓰며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하면 정당하게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그 행위들 안에는 담겨 있다. 곧, 우리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자신의 존재방식에 대해 스스로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 당연하게 이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실은 이것은 불가능한 형식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이 점에 주목했다.


이는 마치 2차원의 종이 위에 그려진 카툰의 캐릭터가 종이에 대해 묻고 있는 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을 수 있는 의식은 이미 2차원의 것이 아니다. 2차원에 갇힌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도약하고 있는 것이며,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능성의 가능성, 그야말로 마법이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신비이며, 그 신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비를 초월한 신비 중의 신비다.


이것은 '초월의 마법'이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초월하고 있는 것이 있을 때만 성립된다. 불가능성에 갇힌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불가능성으로 말미암아 밝혀지는 초월의 마법을 통해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실존주의가 그토록 중요하게 인간의 한계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정확하게 한계에 위치시켜야만 초월로서의 인간존재의 면모는 드러날 수 있어서다.


실존주의가 구조를 강조하는 사유들, 대표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등과 반대편에 서게 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구조를 강조하는 관점은 초월을 거부한다. 대신에 그들은 연대한다. 한계는 양적인 수요로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다. 유니버스를 성립시키려는 근거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질적인 지향을 갖는다. 초월하고자 한다. 쉽게 말해, 마법사로서의 인간을 묘사하고자 하는 것이다.


헤겔, 융, 마르크스를 관통하는 주요한 기제는 역사변증법이다. 이것은 반대되는 것을 통합하고자 하는 유니버스의 기획이다. 이러한 통합은 초월과 상반된 것이다. 경우에 따라 초월은 역설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역설은 모순과는 다른 것이며, 모순은 통합을 필요로 하지만, 역설은 다만 초월될 뿐이다.


역설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모순의 통합을 말하면서 그것을 역설이라고 부르곤 한다. 모순과 역설의 근본적인 차이는 모순은 '앎의 표현'이며 역설은 '삶의 표현'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삶의 표현은 언제나 반드시 자유를 향한다. 자유의 증진만이 삶의 방향성인 까닭이다.


모순의 통합을 역설로 착각하는 이들은 한쪽만 중시하면 안되고 반대쪽의 것도 함께 알아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함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약함의 가치도 알아주어야만 고르게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엑스맨 같은 영화를 보고서는, 매그니토가 자기 안의 약함을 마침내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야 그는 한계를 넘어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런 것이 바로 모순의 통합이다. 게임메뉴얼처럼 언어로만 존재하는 가짜레벨링의 원리다.


이런 방식으로는 자유가 증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은 더 많은 조건에 매이게 된다. 상기한 예에 비추어보자면 이미 강함이라는 조건에 속박되어 있는 데다가, 이제는 진정하게 강해지려면 약함이라는 조건도 챙겨야 한다. 조건이 두 배가 된 것이다.


이처럼 모순을 통합해가며 인간은 진보해나간다고 믿었던 근대의 정신이 만든 일은 결국 인간이 한 걸음을 떼어놓을수록 그 어깨에 올려지게 될 짐이 배가되는 현실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근대적 인간은 자신이 만든 짐의 무게로 인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탈근대의 필요성은 긴밀하게 대두되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근대적 모순의 통합이 야기하는 고통의 현실에 대한 고발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역설에 대해서도 묘사해보자. 역설은 한 프레임 위에서 반대되는 대극을 살피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역설은 그러한 프레임 자체를 통째로 뒤집는다. 이를테면,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일에 다 성공적이지 못한 이가 있다고 해보자.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또 다른 이들에게서 조언받은 효과적인 방식을 전부 시도해보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사방이 꽉 막혀 있었고, 무엇을 해도 자신은 안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떤 눈부심이 그를 스친다. 눈앞을 환하게 밝힌다.


'뭘 해도 어차피 다 안되는 것이라면, 나는 이제 어떤 것을 해도 괜찮겠구나! 어차피 안되는 게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그냥 내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해볼 수 있겠구나!'


그는 뭘 해도 안되는 현실에서 뭘 해도 되는 현실로 판 자체를 뒤집었다.


지금 그는 거대한 자유를 획득한 것이다.


이런 것이 역설이다. 초월의 대표적인 형태다.


그는 약함을 받아들여 더 강해진 것이 아니다. 처음의 상태와 똑같다. 안되는 상황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되게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안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려는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소관이 아니다. 자신이 받아들이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양분으로 흡수해야 할 대극이 아니라, 그냥 그의 앞에 놓인 한계일 뿐이다.


더 쉽게 비유해보자. 모든 인간 앞에는 반드시 죽음이 놓여 있다. 죽음을 삶의 대극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죽음을 알아주고 받아들이는 만큼 삶에서 우리는 더 강해지는가? 자신이 무슨 신이라도 된 양 감히 죽음을 자기 밑의 종자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하기라도 하단 말인가? 가능하다면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자기 폐에 대못을 한 2cm 정도 찔러놓고 살든가, 에볼라바이러스에 일부러 감염된 채로 살면 죽음을 통합해서 사는 모습이란 말인가?


다 말장난과 같은 언어적 쇼일 뿐이다. 삶의 차원에서는 근본적으로 모순의 통합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인 현상인 삶과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 통합의 소재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역설은 삶의 차원에서 마법사로 살아가는 이의 근본적인 태도다. 마법적 태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삶도 신경쓰고 그 대극인 죽음도 신경써서 골고루 균형있게 성장하려는 태도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왜인가? 그 일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불가피하다. 그러니 신경쓸 필요가 없다. 뭘 해도 안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는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에너지를 낭비하는 그 불가능한 일 대신에 자신의 에너지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투여하는 현실이 가능해진다. 우리는 이제 자유를 얻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도 대세에 아무 지장이 없다. 죽음은 분명 우리 앞에 놓여있겠지만, 우리는 이 순간 죽음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오늘 사과나무를 심을 자유가 있으므로.


이렇게 살아가는 초월의 마법사들의 모습을 가리켜 우리는 '실존한다'라고 말한다.


마법은 실존한다. 실존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앞을 가로막아 우리를 쫄게 만드는 그 모든 불가능성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롭게 되는 길이다. 자유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이 되는 길이다.


나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을 이렇게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왜 사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우리는 얻은 것이다.


마법사가 되려고 산다.


더욱 나로 살고자 나는 산다.


인간이 나라는 것을 꿈꾸고 나로 실존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은 불가능성의 가능성, 초월의 마법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음의 마법사전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