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마법사전 #8

"마음의 창"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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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선생님들은 마법을 처음 배우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마음을 열고 세계를 받아들여봐."


"그리고 이제 이렇게 말해보렴. '나는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를 인정합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우리 안에서 왈칵 하던 그 어떤 감각, 그것은 마법의 시작이었다.


마법은 마음의 창을 여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언제나 이 모든 것은 동시적인 일치성의 문제다. 앞을 허용하려면 뒤도 허용되어야 하고, 나에게 가능한 것은 상대에게도 가능한 것이며, 안을 여는 일은 밖을 여는 일과 같다.


마음을 열면 세계가 열린다. 세계가 늘 우리에게 차갑게 닫혀 있다고 경험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세계는 자신의 이채로운 신비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늘 지루하고 뻔하게 반복되는 철지난 테마파크의 기계장치들로만 남을 뿐이다. 아이들의 미소와 함께 영롱하던 그 빛을 잃고 퇴색한 회전목마의 삐걱거림으로만.


마음은 어떤 때 가장 닫히는가?


이렇게 답하는 일은 유용하다.


자신이 이제는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함께 흐르지 못한다. 우리 사이의 소통이 사라진다.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곤,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의 내용을 어떻게 상대에게 주입시키는가의 그 강제적 학습작업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압적인 선생이 되어 있다. 그러니 동시에 서로는 서로에게 열등생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욱 못난 존재로 경험하게 될 것이며, 차라리 마음을 닫고자 할 것이다. 상처받는 일은 아프니까.


마음은 상처로 인해 닫히며, 오늘날 그 상처를 가장 크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앎에 대한 광신적 태도다.


더 많은 지식정보를 소유하면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발상은 정확하게 앎의 계급사회를 만들어냈다. 이에 따라 더 잘 알고 있는 자로서의 지식권력을 얻기 위해 불공정과 불평등, 내로남불의 현실은 펼쳐졌다. 앎을 신앙하는 태도가 어떻게 우리 모두에게 상처를 가져왔는지의 대표적인 예다.


이것은 학력사회라고 하는 제도권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비제도권이야말로 오히려 이 앎의 광신이 난립하는 무대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자기만 알아서 이득을 취한다거나, 상대의 무지를 공갈과 협박으로 공략해 자신의 이익으로 바꾸어내는 일 등은 음지로 갈수록 더 만연하다.


'제대로 알아야 내가 사기를 당하지 않을 거야.'라고 우리가 종종 생각하곤 하는 이 말에는 이미 앎이 사기의 소재라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무협지의 세계관과 같다. 서로가 서로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앎을 들고는 자웅을 겨룬다.


자신이 좀 알고 있는 자라고, 곧 앎의 내공이 남다른 고수라고 믿고 있을 때는 이 앎의 대립은 한층 치열해진다. 자신의 앎이 틀렸다는 것은 단지 앎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부정당하는 일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착같이 억지의 앎을 휘두르며 광란을 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상처주려고 하는 행패가 시작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일상에서 상처받았다고 하는 많은 경우를 살펴보자. 상황이 또는 상대가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을 때 우리는 상처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자신의 앎이 틀릴 때 상처를 입게 되는 이 상황은 분명 앎에 대해 지나치게 우리 자신을 의존시키고 있는 광신적 자세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 경우 앎은 전능한 신적 소재 같은 것이 되어 있다. 그러한 앎은 마치 한 번 알면 그 앎의 대상에 대한 지배력을 영구하게 지속할 수 있는 것처럼 기대된다.


자신이 지배하려다가 뜻대로 안되니 상처받았다고 하는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일까? 상대에게 휘두른 주먹이 맞지 않았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면서 상대가 자신을 상처입혔다고 호소하는 이 코미디는 대체 왜 발생하는 것일까?


앎을 삶과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어서다. 앎은 언어이기에, 이것은 언어와 삶의 동일시와도 같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쓰는 언어가 자기의 삶인 줄 안다. 그런 말을 하면 자기가 그런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앎에 의존해 자신이라는 것을 세우고 있는 동안에는, 앎에의 광신은 이제 스스로를 향해서도 광신이 된다. 자신이 정말로 자기가 쓰는 언어와 그 앎의 내용만큼 대단한 존재라고 믿게 되는 자기우상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그처럼 대단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대로 이 세상이 움직여야 하는 일은 지당하다. 그 앎에서 벗어나면 안되고 언제나 세상은 자기의 앎에 따라 복종해야 한다. 세상의 모두에게는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자기는 신이므로.


결국 이와 같이, 이제는 좀 아는 자로서의 상태로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이 자신을 신으로 인정해주지 않아서 상처받았다는 그 애기를 하고 있던 셈이다. 감히 인간 따위의 하급전사가 신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하다니, 원통하고 또 원통하다. 이 부당한 치욕을 경험할 바에는 차라리 이 잘못된 세상을 벌하고야 말리라. 신의 가슴을 아프게 한 자, 바닥없이 절망하거라. 상처입어 절망한 신이 이제 세상을 절망시키려는 심판의 날이 도래한 것이다.


창문은 또한 그렇게 닫힌다. 심판을 위해 가스실의 창문은 닫힌다. 자신의 앎이 옳고 세계가 잘못되었다고 벌하기 위해. 그러나 죽어가는 것은 외부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것이다. 우리가 죽인 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이었다. 세계를 심판하고자 하는 폭력은 언제나 우리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들을 자신의 앎으로 지배하려고 할 때 이처럼 인간의 영혼에는 심대한 폭력이 가해진다. 자신의 앎에 삶을 끼워맞추어, '있는 그대로'를 '아는 그대로'로 강제로 변형시키려는 이 일은 분명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홀로코스트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폭력이 있는 곳에는 마법이 없다. 우리가 마법을 경험한 적이 없다면 우리가 폭력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법은 존재의 힘. 존재가 있는 그대로 펼쳐지는 그 생명력이다. 있는 그대로가 부정되는 곳에서 마법이 자취를 감추는 일은 필연이다.


심판이 편견에 의해 자행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자. 편견은 선입견이다. 앞서 자기에게 들어와 자리하고 있던 기존의 앎을 불변의 진리로 삼아 세상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대체로는 자기 양육자의 관점, 특히 엄마의 관점이 지배적인 선입견을 형성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자기 엄마의 관점에 따라 이 세상을 처벌하고 심판하겠다니, 그래서 이것은 코미디인 것이다.


이 선입견은 분명 마음의 창을 흐려지게 하고 또 좁아지게 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니 마음의 창이 좁아지면 시야가 굴절된다. 작은 인식의 한계에 갇혀, 일어나는 사건들을 아주 부분적으로만 곡해하게 되며, 결국 일그러진 세계관을 구성하게 된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바로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이다.


마음의 창을 여는 것은 이렇게 왜곡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선입견을 포기하고, 지금 존재하는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하는 일은, 바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에 대한 인정이다. 앎에 의해 일그러진 채로 차가운 앎의 감옥 속에 유폐되어 있던 우리는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젖힘으로써 즉시 감옥으로부터의 탈출구를 확보하게 된다.


우리의 모든 고통의 이유가 되었던 그 좁은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 이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넓고 파란 하늘이다. 마음의 창이 그만큼 크게 열려 있고, 그것은 우리 마음의 크기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크기며, 바로 우리 자신의 크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찾고야 만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들 좋다. 뭘 좀 알고 있는 자처럼 유세를 부린다 해도 좋을 일이다.


우리 눈앞에 지금 펼쳐진 세계에 대해 그 앎의 권위를 다 기각하기만 할 수 있다면 다 괜찮다.


우리가 알고 있던 어떤 것보다, 지금 우리에게로 다가온 이 삶이 한참을 더 크다. 절대적으로 크다. 이 삶이야말로 우리가 결코 알 수 없었던 더 커다란 우리 자신에게로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삶을 따라 우리는 계속해서 기존에 우리 자신이라고 믿었던 그 앎들을 넘어서며 더욱더 한계없는 자유 그 자체가 되어갈 것이다.


삶을 통해 점점 더 우리가 자유롭게 되어가는 신비의 일.


이것이 마법이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이 진실한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보라고, 마음의 창을 미소로 활짝 열며 우리의 마법선생님들은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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