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마법사전 #7

"장미의 기쁨: 심리적 체질개선"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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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은 체질개선의 문제다. 그래서 마법이 앎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위대한 마도서를 소유하거나, 어떤 복잡한 주문을 더 많이 안다고 해서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마법체질이 되면 마법은 자연스레 발동한다. 중요한 것은 마법체질을 갖추는 것이다. 마법사들의 훈련은 이 체질개선의 문제부터 이루어진다.


이것은 흡사 심리상담사의 훈련법과도 같다. 무슨 빈의자기법 같은 테크닉을 연습하거나, 미러링을 통해 상대의 자세와 끝말을 따라하거나, 또는 어떤 글쓰기 기술을 익힘으로써 상담의 역량이 증대하는 것이 아니다. 상담사가 되려면 먼저 상담사의 체질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상담수련생은 먼저 그 자신이 상담을 많이 받는다. 정글에 적합한 체질을 갖추려면 정글의 환경에 더 많이 몸을 노출할 필요가 있다.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반대로 자신은 상담 한 번 받아본 적 없으면서 최면이나 멘탈리스트 분야의 책 같은 것을 몇 권 읽은 뒤 스스로를 상담전문가라고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책들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성공적인 언어를 따라하면 그와 동일한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물론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마법을 배울 수 없다. 원숭이처럼 따라하는 이 투박한 도구적 행동원리는 마법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이다.


마법의 핵심은 섬세한 감수성이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것이다. 마법체질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이 본연의 감수성을 회복한다는 의미와 같다. 감수성이라는 것은 표현 그대로 느낀 것을 잘 받아들이는 성질을 의미한다. 이러한 감수성이 무뎌져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 바로 모방의 기제다. AI의 행동원리다. AI는 모방을 통해 자기의 지성을 증대시켜간다. 지성의 영토를 넓혀 그 안에 모든 것을 다 소유하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AI에게 시키지만 바로 이전에는 인간이 직접 이 일을 시도했다. 근대의 지성중심적 사유는 계몽주의라는 이름으로 모방의 기제를 최상의 이념으로 보급하려 했다. 근대는 지성의 빛으로 어두운 마법을 추방한다는 기획을 품었지만, 역으로 마법의 입장에서는 가장 어두운 시절이었던 셈이다. 불감증의 시대였다고 우리는 회고한다.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이 살아있었다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그토록 참혹한 고통을 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존재의 마법사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의미하는 실제를 잘 묘사한 바 있다. 그는 '존재양식'과 '소유양식'을 말한다.


어떤 이가 산책을 하다가 숲길에 피어난 장미를 발견한다. 고귀하고 아름답다, 그 느낌이 그를 사로잡는다. 그는 가득 음미한다. 느낌과 하나되어 흐른다. 그는 지금 존재의 사실에 접촉한 것이다. 존재한다는 일의 기쁨을 만난 것이다. 이것이 존재양식으로 사는 모습이다. 느낌은 곧 존재양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장미꽃을 꺾어서 자기 집에 소유하려 하거나, 또는 자기가 장미꽃인 척 장미를 흉내내는 일 같은 것이 아니다. 존재 그 자체의 존귀함을 자기 자아에 편입시키려는 지배의 폭력으로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며 사는 삶의 방식이다.


반대로 누군가는 장미꽃을 정복하려고 한다. 장미의 특성을 자기가 소유해 자기를 영광스럽게 만들 액세서리로 삼으려 하거나, 빛과 향기, 그 생명까지 장미를 최대치로 착취해 자신의 이득으로 환원해낸다. 그러면서 자신이 장미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인 것처럼, 장미라는 존재의 마스터인 것처럼 행세하려 한다. 이런 것이 소유양식이다. 자기의 지성을 통해 모든 것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려는 방식이다.


우리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접한다. 장미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성을 항변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투박한 도구적 앎의 추구가 모든 것을 사물화시키는 광신이 되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기쁨일 수 있었던 삶의 자리를 환기시킨다. 하이데거는 아예 "장미의 모든 근거는 장미다."라며 존재의 신비로 넘어간다.


이들은 다 프롬과 같이 존재의 마법사협회에 소속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체질개선은 바로 이러한 존재의 문제, 곧 존재양식으로 살아가는 문제와 관련된다.


그런데 이 존재라는 것과 직결되는 것이 바로 심리다. 인간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 고로 심리적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가 체질개선을 이룬다고 할 때 그 정당한 의미는 심리적 체질개선이 될 것이다.


우리는 본연의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마법체질로 회복되고자 한다. AI가 아니라 더 온전한 생명의 형태다. 여기에 필요한 심리적 지향점은 무엇인가?


어찌보면 모든 심리상담의 활동은 이 지향점을 공유한다. 같은 현실을 바라본다.


우리가 불안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일, 바로 그것이다.


불확실성, 불확정성, 불안정성,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러한 삶의 특성에 의해, 우리가 삶 앞에 마주섰을 때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 감각을 우리는 불안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제대로 된, 심리상담에서는 불안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런 답이란 애초 불가능하다. 또 그 허위의 답을 내담자로 하여금 의존하게 만드는 일은 상담이 아니라 컬트종교의 일이다.


심리상담이 목표로 하는 것 또한 체질개선이다. 수상한 약물 같은 답이 아니라, 어떤 문제가 와도 흔들리지 않을 근본적인 심리적 체질개선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심리상담이다.


그래서 심리상담적 훈련법은 우리가 마법의 힘을 회복하는 일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장미 앞에 우리를 세우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우리가 장미로부터 어떤 도구적 이득도 취하려 하지 않을 때, 장미에 대해 지성의 지배력을 더는 행사하려고 하지 않을 때, 이제 장미 앞에서 우리가 느끼게 될 바로 그것이 불안이라고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바로 그것이 불안이다.


가장 경외롭고 신비한 존재적 사태로서 우리 앞에 마주한 현상을 마법처럼 경험하게 되는 바로 그 일을 우리는 불안이라고 부른다.


'낯설게하기(unknowing)'에 관해 누군가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 모든 정보를 '몰라진 채' 마치 처음으로 접하는 것처럼 현상에 참여하는 태도를 일컫는다. 명상에서나 상담에서나 공통적인 회복의 기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는 일에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리 앞에 존재하는 사람 또는 사물을 낯설게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존재의 신비에 눈뜨게 된다. 낯설게 된 것은 현상만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야말로 이제 가장 낯선 것으로 화하게 된다. 자신이 경험하리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러나 늘 그리웠던, 우리 자신의 아주 멋지고 자유로운 면모를 우리는 낯설게하는 일을 통해 경험하곤 한다.


'낯설게하기'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또는 우리를 가두고 있던 임의적 앎의 껍질을 벗는 일과 같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삶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사우나에는 들어가 본 적도 없으면서, 사우나의 유래와 그 효능에 대해 마스터처럼 말하고 있는 이가 생애 최초로 사우나에 들어가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체질개선이 된다. 몸은 직접적으로 그 환경에 참여하고 있을 때 유감없이 적응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몸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하나의 적응은 다시 태어나는 하나의 경험과도 같을 것이다.


우리가 불안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새롭게 태어날 그 문 앞에서의 반응이다. 재생을 위한 흔들림이다. 우리는 갑각류처럼 화석화된 우리 자신의 껍데기를 흔들어 떨구고 이제 탈피하는 것이다. 유연하고 섬세한 새살을 다시 찾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아주 생생하게 잘 느껴진다. 대기에 가득한 마나를 느낄 수 있다. 세상은 신비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사실임을 실감하게 된다.


본연의 마법사의 몸으로 우리가 이처럼 다시 태어나게 되었을 때, 마법은 자연스레 우리의 것이다. 입에서는 대충 말해도 시가 흘러 나오고, 우리의 시간은 율동한다. 그침없이 흐르는 대화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 우리의 존재가 이제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고, 또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더는 불안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던 그 불안이 아니다.


도구적 지성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지배력이 상실될 것 같은 현실은 덜덜 떨리는 두려움으로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마법사들은 그러한 싸구려 지성을 초월했다.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남들을 이용해먹는 잔머리를 굴리는 일로 자기가 똑똑한 척하는 개코원숭이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AI에게나 갖고 놀라고 던져주련다.


우리는 존재의 신비를 직관하고 있는 참되게 지혜로운 존재들. 지성을 써야 한다면 신비의 탐구를 향해서만 정향할 뿐이다. 그러니 불안의 문제가 없다.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전부 다 우리 자신을 더욱 아름다고 자유롭게 펼쳐줄 오롯한 마법의 기회일 뿐이다. 실존주의에서 불안의 참이름이 자유라고 말하는 이유다.


이쯤에서 우리는 인간이 가진 본연의 감수성에 붙여진 고전적인 이름을 말해보기로 하자.


그것은 호기심이다.


인간은 어떤 생명체보다도 깊고 풍부한 호기심의 체질을 지니고 있다.


닫힌 문을 왜 열고 싶어하는가? 호기심이 우리를 끌어가고 있어서다. 그렇게 호기심으로 말미암아 신비로의 문은 거듭해서 개방된다. 마법의 세계가 자유로이 열려간다.


그러나 밖으로만 열려가는 것은 없다. '열린다'는 것은 언제나 안팎으로 동시에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열어갈수록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을 열어간다. 외부로는 넓게, 내부로는 깊게, 존재의 운동은 이와 같은 양상으로 드러난다. 존재하는 것들의 신비를 접해갈수록,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신비로운 존재로 경험하게 된다.


이처럼 호기심은 일견 외부를 향해 우리가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다가가는 형태로 묘사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가 내적으로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어놓고 있는 일이다. 호기심이 많은 이는 그래서 자기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아주 개방적이다. 그것들을 적이나 위협물로 상정해 지성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존재 그 자체를 경험하려고 한다. 장미를 마주하는 태도와 같다.


그럼으로써 이제 우리는 존재의 회복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이 역시 안팎의 동일성 속에서 작용한다. 존재하는 것들과 화해해가며, 우리 자신과도 화해하게 된다. 장미를 향한 호기심으로 장미의 존재성을 회복한 이는 스스로의 존재성 또한 회복한다. 우리 자신이 보다 유연해지고 성숙해지는 심리적 체질개선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호기심(curiosity)이라는 단어와 치유(cure)라는 단어의 어원이 같다는 사실은 분명 의미깊다. 호기심이 치유한다, 우리는 이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mbrace your curiosity.'라는 잘 알려진 문장은 일종의 회복주문이다.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라고 하는 옛말도 있지만, 실은 그 반대다. 얼마나 많은 고양이들이 반려인후보에 대한 호기심을 통해 그 삶을 증진할 수 있었을까. 적어도 호기심에 대해서라면, 인간이 있다는 사실로 모든 것이 달라진다. 호기심과 인간이 엮이면 그 자리에는 마법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불안과 함께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이해해가고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지배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있는 그대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이 섬세한 감수성을 갖고 태어나는 이유는 이 함께 사는 '존재의 마법'을 위해서다. 느낌은 그 순간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것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그 길의 방향성을 알린다. 호기심은 우리로 하여금 직접 그 존재의 길로 뛰어들게 하고, 결국에는 길을 열어낸다.


그러니 우리가 불안이라고 부르던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던 그런 불안이었던 적이 없다. 심리적 체질개선을 이룬 우리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하다.


그것은 떨림이었을 것이다. 이제야, 마침내, 기어이 우리가 함께 존재하게 된 그 기쁨의.


혜능선사가 말하듯이, 흔들리는 것은 꽃잎이 아니었다. 흔들리던 것도 아니었고, 꽃잎도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 우리 마음의 기쁨, 바로 장미의 기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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