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
신화는 윤리의 기능을 갖고 있다. 심지어 그것이 주기능이다.
윤리의 장점은 무엇일까?
윤리에서 바람직한 상태라고 규정하는 수준으로 대다수의 평균치를 쉽게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의 단점은 무엇일까?
윤리에서 바람직한 상태라고 규정하는 수준으로 대다수의 평균치를 쉽게 하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침대보다 키가 작은 이는 잡아늘려서 죽이고 키가 큰 이는 잘라서 죽이는, 그리스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의 일을 떠올리게 한다.
또 이것은 현대의 미디어(mythia)가 하는 아주 전형적인 일이다.
미디어가 권력화되는 것은 미디어의 생산자들이 윤리를 집행할 의도를 갖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미지의 침대에 미디어의 소비자들을 눕혀놓고는 모종의 변형을 가하는 이 일이 결국에는 신화의 실현이다. 자신이 떠먹여주는 이미지만 까르륵 잘 받아먹으면 인간은 건강한 시민영웅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미디어의 주체는 말한다. 자신은 인간을 이상적으로 조형하는 자, 그럼으로써 세계를 이상적인 구조로 설계하는 자다.
원래 누군가에게 윤리적 의도를 행사하고자 하는 이는 이처럼 지배의 속내를 감추고 있다. 자신이 전능한 위정자이기를 꿈꾸고 있기에, 미디어를 도구로 써서 인간을 임의대로 조종할 자신의 권력을 증진시키려는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정의감 같은 것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자신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을 선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들 수도 있다. 미디어를 통해 집행하는 자신의 윤리적 의지에 의해 소위 말하는 민도가 올라가고, 전체의 평균수준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이상하게 의심해봐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미디어의 주체 그 자신의 수준이다.
어떤 창작물의 수준은 그 작가보다 결코 높을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창작물의 수준과 창작자의 수준은 거의 동일하다.
그래서 수준이 낮은 작가가 자기의 작품을 억지로 수준이 높은 것처럼 보이려 할 때는 비틀린 굴절이 일어난다. 반드시 그 대가를 대신 치러야 할 희생양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가 자기 작품 속 주인공을 물리학의 천재로 만들고 싶은데, 작가에게는 물리학적 역량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억지로 물리학의 천재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대신 다른 등장인물들이 바보가 되어야만 한다. "아아, 이것은 '중력'이라는 것이다."라고 주인공이 말하면 "오옷!" 호들갑을 떨며 깜짝 놀라는 이세계 바보주민들처럼. 그러나 그것은 원래 작가 자신이 받아야 할 몫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창작된 신화는 반드시 그 신화를 만든 작가의 수준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하나의 신화가 평균수준을 끌어올리는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수준이 대다수의 평균수준보다 높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계몽의 의도를 표방하는 작품을 보면 그 수준이 여실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너무나 유치한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렇다면 정당한 의심은 이러한 신화를 써낸 작가의 수준이 결코 높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평균을 끌어올릴 수 있는 평균 이상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균을 하락시키는 평균 이하의 것이다.
그럼에도 미디어의 주체들은 어떻게 이러한 일을 감행할 수 있는가?
이것은 미디어가 갖는 최면과 세뇌의 기능 덕분이다.
피세뇌자를 카우치에 눕히는 세뇌가처럼, 미디어는 접근성이 높아 편안해 보이는 침대에 그 소비자들을 눕힌다. 일단 눕히기만 하면 성공이다. 그러면 침대의 가상현실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라포(reappot)라는 것을 활용한 권위획득의 술책이다. 침대에 눕게 되어 다소간에 무방비의 상태가 된 피험자는 자연스럽게 자기를 지켜줄 친밀한 권위를 찾게 되고, 이 경우 침대에 눕힌 이가 자동으로 그 권위를 먹게 된다.
우리가 일정 부분 약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가 친밀한 보호자 같은 형상으로 우리에게 접근하면 이 권위헌납의 일은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일어난다. 치과 진료의자에 누운 이가 티슈라도 꽉 잡게 되듯이. 그의 수준이 아무리 높거나 낮든 간에 아무 상관이 없다. 이 침대의 구조가 교묘하게 권위를 생산하며, 이렇게 일단 권위를 얻는 일에 성공하면 이제 그의 말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진실처럼 들리게 된다.
이러한 방식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발전시키면 '야쿠자 조교법'이 탄생한다. 가스라이팅의 핵심이다. 그것은 먼저 자신이 피험자를 위협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은 뒤, 자기만이 그 위협으로부터 피험자를 보호해줄 유능하고 강한 힘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연출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병주고[죽이고] 약주는[살리는] 두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말은 흡사 인간을 죽이거나 살릴 수도 있는 절대적인 신의 말처럼 작용하게 된다.
미디어는 전통적으로 이 병주고 약주는 방식을 아주 능숙하게 써왔다.
멀쩡하게 잘 소비되던 음식에 실은 얼마나 유독한 성분이 들어있는지를 고발한다는 시사프로를 만들어, 자기가 그런 사악한 소재들로부터 시청자를 보호하는 중대한 윤리적 임무를 떠맡은 히어로인 것처럼 행세하던 방송인들은 너무나 많다.
이것은 비단 어떤 실체적 소재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음모론을 통해 아예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모종의 가상현실 자체를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마치 조현병의 상태에서 경험할 법한 왜곡된 현실의 이미지를 미디어의 소비자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가 가상으로 만든 위협의 현실에 대해 이제 자기가 구원자인 척을 한다. 자기는 사욕을 다 버리고 오직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만 활동하는 영웅적 인물인 것처럼 위장한 채.
결국 이 신의 권위를 참칭한 미디어의 전략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바로 이세계의 바보주민들이 된다.
"아아, 이것은 '광우병'이라는 것이다."
"오옷!"
"아아, 이것은 '지평좌표계'라는 것이다."
"오옷!"
"아아, 이것은 '990원 소금빵'이라는 것이다."
"오옷!"
추락한다. 추락한다. 미디어(mythia)의 '조교'에 의해 인간의 수준이 하향평준화된다.
원래는 이 신화의 작가들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던 대다수의 이들이, 미디어의 술책에 걸려 작가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헌납하게 된 결과, 작가들 미만의 수준으로 추락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먼저 미디어의 소비자의 수준을 추락하게 만든 뒤에, 이제 미디어의 주체는 씨익 웃으며 자기가 그 열등한 수준을 높게 끌어올려주겠다고 한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모든 최선을 다해 성실히 임하겠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인류의 평균수준이 진보할 때까지 자기가 늘 옆에서 함께하며 돌보고 지키겠다고 한다.
그리스신화의 신들이 바로 그래서 인간의 옆에 늘 있었던 것이다.
질리지 않는 장난감으로 계속 갖고 놀 수 있어서.
그것이 권력의 쾌감이다.
좋은 사람으로 존경도 받고, 다른 사람들도 생각대로 조종하고, 무척 짜릿할 것이다.
이 프로크루스테스들은.
자기보다 높은 수준에 있던 것들을 자기의 미발달된 수준 미만의 것으로 추락시킨 뒤, 이제 그 수준을 끌어올려준다는 미명하에 이들이 실제로 하게 되는 일은 모든 것을 딱 자기의 수준만큼으로 만드는 일이다. 수준낮은 것의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향된 상태의 영구한 지속이다.
미디어의 소비자들이 자기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미디어는 이 일을 한다. 자신의 정부가 떠나지 못하게 하려던 야쿠자의 심정이나, 인간이 떠나지 못하게 하려던 그리스 신들의 심정이 다 이와 같다. 자기는 밑바닥이니까 혼자 비참하게 남겨지고 싶지 않아서 같이 끌어내린 것이다. 계속 함께 이 늪에서 머물자고.
그러면서도 자기는 오히려 늪에 있는 악의에 찬 괴물 히드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겠다며 우리 위에 있는 상급의 영웅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은 자기가 우리를 늪으로 추락시킨 악의로 가득찬 히드라이면서.
히드라의 목을 자르면 그 자리에 두 개의 목이 생긴다.
이것은 전염의 의미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진 이의 진짜 비극은 그도 프로크루스테스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이라고 일컫는다.
아주 많은 경우 이 증후군에 빠진 이들의 모습은 소위 정치병자들의 모습과 유사한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의 미디어정치가 양산하는 것이 이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인 까닭이다.
자기가 정의인 줄 알고, 모든 것을 다 자기의 기준으로 환원시키려 하는 독선적인 모습은 대표적이다. 독선(獨善)은 단어 뜻 그대로 선으로 독재하는 것이다. 곧, 윤리독재다. 미디어(mythia)는 반드시 이 윤리독재의 의도를 내포한다. 신화가 원래 그 일을 위해 만들어진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선함이라는 목적을 갖고 있다면 그 수단은 다 용인된다. 바로 이 논리에 따라 영웅신화의 내러티브는 쓰였다. 영웅이 되려는 개인은 고난이라는 과정[수단]을 거침으로써 윤리를 달성하며, 이제 윤리가 그에게 영웅의 자격을 부여해준다. 윤리로 말미암아 개인이 거대한 권력을 얻는 그 목적을 이루는 일에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신화다. 윤리의 권력화.
미디어는 이 윤리의 신화를 더욱 널리 보급해감으로써, 더 많은 프로크루스테스들을 창출해간다. 이 신화 속에서 윤리는 더욱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노골적으로 권력을 추구한다고 하면 비난을 들을 것 같지만, 윤리를 추구한다고 하면 오히려 우호적으로 지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욕도 먹지 않으면서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니, 세상 만물을 자기 생각대로 재단하는 권력을 얻고 싶은 프로크루스테스들에게는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하찮은 자기만큼이나, 세상 모든 것을 다 하찮게 만들려는 그 길을.
단순하게 떠올려보자. 남의 팔다리를 자기의 기준으로 부자유하게 만들려는 이는 어떤 이일까? 그의 팔다리 역시 부자유한 이일 것이다. 어떤 또다른 남의 기준에 의해 그의 손발이 거세당했을 수 있다. 혼자서는 이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아동의 상태처럼. 매우 권력적인 그의 엄마가 그에게 그 일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가 당한 그대로 다른 이에게도 그 일을 하고 있는 그가 프로크루스테스 증후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의 엄마가 자식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던 그 독선의 장님이었던 것처럼, 그도 눈이 멀었다.
손발이 잘린 것처럼 무력한 아동인 것으로도 모자라 거기에 눈까지 멀었다.
그야말로 이것은 신화적 비극이 아닐 것인가?
인간이 평생을 이처럼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도 못하고, 자기 발로 직접 걸을 수도 없으며, 또 사랑하는 것들을 자기의 손으로 직접 안을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 그러한 총체적 절망의 상태로 엄마의 침대에 누워만 있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진실로 인간의 비극이다.
신화는 원래 엄마가 자식을 키우기 위해 들려주던 이야기. 신화는 그 안에 담긴 윤리적 규범(norm)을 전달함으로써 아이를 사회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처럼 미디어의 주요한 임무는 양육이었다. 사회적 엄마의 목소리 같은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가 잘 닿지 않을 때, 목소리는 커진다.
자기의 이상적인 생각대로 자식이 잘 변형되지 않을 때, 엄마의 무력감은 경험되며, 무력감의 크기만큼이나 권력에 대한 의지도 커진다. 그렇게 자신이라는 개체가 더 권위있게 대접받는 권력자가 되기를 꿈꾸던 엄마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윤리적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내고 싶던 엄마.
그러한 이들은 결국 독선을 꿈꾸고 있던 것이다. 자기가 가장 윤리적인 주체로서 독재하는 현실을. 그러면 자기의 자식들이 성공적으로 잘 변형될 것이라고 믿으며.
이러한 엄마의 침대에서 키워진 이가 프로크루스테스가 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미디어(mythia)가 증후군처럼 끝없이 전염되는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비극을 지속시키고 있다는 이해 또한 우리에게는 정당한 것이다.
가장 무력감을 경험하는 이가 가장 권력을 추구하며, 그 결과 모든 것을 다 무력한 미발달의 상태로 하향평준화한다. 유치한 이세계 바보주민들의 세상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 신들의 장난감은.
머리 좋은 것만이 이 지구의 자랑이던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너무나 통속적인 표현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지 모른다
미디어(mythia)는 정말로 인간을 바보로 만든다고.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인간을 위한 희망이기도 하다.
신화를 통해서는 이제 인간의 상향화는 불가능해진 것이다. 하향만이 불가피하다. 왜 그럴까?
인간이 이미 신화를 아득히 초월했기 때문이다.
신들의 이야기를 한참을 넘어서 있는 것이 이제 인간이라는 존재다.
신화에 의존해서 어떤 수준의 향상을 이루려는 일은, 이제는 인간이 일부러 바보인 척하는 가상현실 속에서나 성립되는 일이다.
인간의 실존은 신화의 허구 그 이상의 것. 그것은 신화를 초월하기에, 신화라는 창작물과 동일한 수준일 수밖에 없는 그 창작자인 신마저도 당연히 넘어선다. 그러한 미디어의 거짓신들의 수준을 아득히 앞질러있다.
침대 밖으로 우리의 손발이 가까스로 빠져나오게 된 것이 아니다.
침대가 우리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 호주머니 속에도 들어간다. 기분이 무척 안좋을 때는 바닥에 던져서 박살낼 수도 있다.
고작 그런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작은 화면 속에 떠도는 다 말들일 뿐이다.
그것의 작음을 알게 되면, 그것이 만드는 비극의 작음도 알게 된다.
그러한 이는 더는 미디어(mythia)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공갈협박에 위협받지 않을 것이다. 병을 얻지 않았으니 약을 구걸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는 지금 그에게 일어난다고 예언된 그 비극보다 큰 존재.
그래서 신들의 예언이 비껴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인간이 그 자신을 비극보다 더 큰 것으로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실감했던 것이다.
이것은 실존주의의 인간상. 운명을 자유하는 자.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의 수준이다. 인간이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그 존재의 수준이다. 신화보다도, 윤리보다도, 엄마의 규범보다도 훨씬 큰, 그렇기에 그런 것들로 늘릴래야 늘릴수도 자를래야 잘릴수도 없는 이 인간의 본래적 위상을 우리는 이제 다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손 안에 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보며, 인간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