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다신주의 공장의 출현"
인간이 정말로 신이라는 것 그 자체를 살해한 적이 있는가?
없다.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
인간은 언제나 한 놈만 팼다. 단체로 몰려들어 관계의 힘으로 다구리를 놓는 것이 인간의 종특이다.
인간은 언제나 하나의 신, 바로 유일신만을 팼다. 그렇게 일신주의를 추방함으로써 인간이 열어젖힌 것은 인간이 자유로운 현실이 아니다. 하나의 신을 대체할 무수한 신들의 세상, 곧 다신주의(多神主義)의 현실이다.
우리는 오늘날 다원주의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한다. 그 말의 참뜻은 다신주의다. 그리고 그 숨은 뜻에 따라, 저마다 다 자기가 신인 것처럼 굴며 온갖 갑질의 횡포를 자행하려 한다.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는 다신주의가 준거할 아주 좋은 토양이다. 그것은 제2의 르네상스라고 말할 만하다. 그러니 실은 포스트모던은 결코 의미 그대로의 탈근대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1차 르네상스로 열리게 된 다신주의의 세상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2차 르네상스일 뿐이다.
인간의 역사가 늘 일신주의와 다신주의를 교차해가며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기억해볼 것이다.
이 기억을 흐리고 왜곡시키는 것이 인본주의라는 표현이다. 이제 우리는 이 표현을 다신주의라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인본주의적인 것은 다신주의적인 것이다. 정말로 신이라는 것 그 자체로부터 해방된 참된 인본주의를 말하려면 역설적으로 신적인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다. 신이 아니라 신적인 것. 에크하르트 같은 신비주의자들이나 틸리히 같은 신학자들은 이러한 것을 말하려 했다. 물론 가장 정확히 말해본 이는 붓다일 것이다.
요는, 신이 죽었으니 인간은 이제 자유라고 까불거리던 이들은, 그 내심으로는 자기가 드디어 신이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렇다고 자기 혼자 신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 돌을 맞을테니, 이들은 인간 모두가 신처럼 될 것이라는 보편적 차원의 담론으로 자신의 주관적 소망을 대신 표현했다.
그래서 열린 것이 인본주의다.
1차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의 인본주의의 전통을 부활시키려 한 운동이다. 인간의 모습과 특성을 닮은 무수한 신들이 활개치던 그 현실. 곧, 다신주의의 현실이 인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인간을 억압한다고 믿어진 중세의 일신주의를 무너뜨린 뒤, 인간은 이제 자유로운 다신주의의 현실을 만들어냄으로써, 결국에는 그 자신도 신이 될 것이라고 꿈꾸었던 것이다.
고대의 다신주의, 중세의 일신주의를 거쳐, 이렇게 근대의 다신주의가 태어났다. 그리고 현대의 초입으로 들어와 냉전시대를 맞으며 신들 중에 제일 센 신 둘이서 자웅을 겨루어 다시 일신주의를 탄생시키려 할 때, 잽싸게 제2차 르네상스는 기획되었다. 타자, 다양성, 소수자, 권력, 자본, 계급, 이런 것들에 대한 윤리를 조직함으로써, 정말 모순적이게도, 이제 다신주의를 하나의 도그마로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다신주의가 필연적으로 내포한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되고 싶어하는 이는, 실은 자기 말고는 누구도 신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다 신이면 자기가 신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혼자 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누구도 그에게 관계의 힘을 몰아주지 않을 것이며, 그가 신이 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니 신이 되고자 하는 이는 모두가 신이 될 수 있다는 다신주의를 이를 악물고 주장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남들보다 자기가 조금이라도 빨리 관계의 힘을 얻어 신을 실현하게 되면, 그에게는 자기가 그래도 다른 신들보다는 조금 더 상위의 신인 척할 수 있는 은밀한 전략이 준비되어 있다.
요즘 뉴미디어의 '기득권'을 빠르게 선점해버린 그 미디어선동가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들이 마련한 전략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는가?
자기가 확보한 기득권의 미디어 파워로, 이제 다른 이들을 그 장에 초대해서 그들 또한 신이 될 수 있도록 조력한다. 자기의 팬덤이 그들을 응원하도록 조장하고, 그들이 어떤 정치적 권력이나 사회적 명예를 얻을 수 있게끔 여론을 조종한다. 흡사 자신이 다른 이들의 재능과 소질을 발굴해서, 그들을 새로운 신으로 육성하는 그 유사엄마의 역할을 하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갓메이커라고 불러야 할까? 또는 신들의 엄마라고 불러야 할까? 어떻든 자신이 더 많은 신들을 태어나게 하는 일종의 '미디어 자궁'이 됨으로써, 자기의 자식 같은 그 신들에 대한 모종의 상위적 주권을 행사하게 되는 셈이다. 다신주의의 현실 속에서, 신들 위의 신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탄생한다.
그래서 이것은 엄연한 공장이다.
오늘날의 미디어(mythia)는 신화를 낳는 장소.
다신주의의 신들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예전의 미디어(media)는 보다 이념적인 것에 봉사했다. 특정한 소수만이 이념의 대변자로서 신의 위치를 얻곤 했다. 대다수의 입장은 그렇게 생산된 우상(idol)을 소비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그러나 뉴미디어(new media), 즉 미디어(mythia)의 발달로 인해, 이제 누구라도 우상을 생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우상의 소비자이기만 했던 대다수가 이제 우상의 생산자로서 자리이동을 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신화를 부여함으로써 자신을 신적 우상으로 만드는 일은 오늘날 보편적인 성공공식으로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인류사의 어느 때보다도, 현대사회는 이 우상공장들이 가장 활발히 가동되고 있는 시대다.
우상의 생산은 산업화되었으며, 그것도 아주 유망한 산업이다.
신자유주의가 어떻느니 자본주의가 어떻느니 하며 현대산업의 비인간화를 비판하는 이들 중 누구도 이 우상공장의 산업을 문제시하는 이는 없다. 자신들이 그러한 영향력 있는 스피커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산업 덕분이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신들은, 공장에 대한 비판의 기능을 거세당한다.
마치 엄마의 자궁에서 나온 자식들이 쉽사리 엄마에게 거역할 수 없듯이.
그런 마마보이 같은 신들이, 사회의 중추에 올라가 기득권을 형성하며 '신들의 리그'를 펼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보편적인 현실이다. 한국사회는 아주 전형적인 그 양상을 드러낸다.
과도한 산업화가 사회의 불평등 및 불공정의 모순을 만들어낸다면, 그 말이 맞다.
분명한 산업이면서도, 비판의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나있는, 이 미디어(mythia)의 우상공장의 일이 그러하다.
그것은 흡사 수렴청정의 모습과도 같을 것이다. 다신주의의 신들을 낳은 그 엄마 같은 미디어의 주체가 뒤에서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음모론을 생산하는 이는, 자기가 음흉한 음모론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
더 많은 이들이 신과 같은 권위와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가장 인간적인 의도로 위장한 이 다신주의의 독재적 권력욕에 언제나 맞서 싸우던 것이 실존주의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실존주의가 일신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일신주의와 다신주의의 교차는 그저 독재의 양상이 표면적인가 은폐되어 있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혼자 드러나서 독재하는 어떤 실체 같은 것이 가시적으로 보일 때는 그것이 일신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며, 이에 대한 반동으로 모두가 똑같이 권력을 행사하는 신이 되어야 한다며 다신주의가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신주의는 전술한 것처럼 언제나 은폐된 독재자를 내재하고 있다. 그게 노출되면 다시 일신주의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며, 그 반대편에서 또 다른 다신주의의 요청이 생겨나곤 하는 그 반복이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이 모든 것에 반대한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이것은 실존주의 선언이다. 그러니 미디어(mythia)의 위력과 그것이 낳는 관계의 세력으로 펼쳐내는 그 모든 거짓 신의 기만적인 독재극에 실존주의는 완전히 반대한다.
실존주의적 신학자인 불트만의 '탈신화화'라는 개념을 우리는 기억해볼 수 있다.
실존주의 심리학자인 어네스토 스피넬리 또한 인간의 심리적 회복을 위한 작업에 이 탈신화화의 기제가 필수임을 주장한 바 있다.
이것은 개인을 신으로부터 다시 인간의 입장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그렇게 거짓 신이 옥좌로부터 물러간 후에 남겨지는 것은 참된 신의 자리다.
그 자리에는 유일한 어떤 것이, 또는 다원적인 어떤 것이 와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영원한 여백으로 비워져 있어야 할 자리다.
그렇기에 그 자리는 자유의 이름으로 드러난다. 인간에게 가장 신성한 그 이름으로.
비어있다는 것은 내용이 없다는 것, 그러니 내용(content)을 만들어내는 미디어(mythia)는 이 자리에 감히 개입할 수조차 없다. 어떠한 이야기를 써내더라도 다 기각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속박하는 그 어떤 신들의 이야기도 있을 수 없기에, 그 자리에서 인간은 바로 자유다.
신의 자리가 비워져있는 것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그 뜻이었다.
이것을 '숨은 신'의 의미라고도 말한다.
그러니 인간은 신이라는 것 자체를 결코 살해할 수가 없던 것이다.
참된 신은 이미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비워주셨기에.
인간이 자신을 대신해 신이 되라고 비워준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 같은 것에 더는 집착하지 말고, 이제는 인간 그 자신으로 자유롭게 살라고 비워진 그 뜻이다.
실존주의는 이 참된 신의 뜻을 향한 운동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을 더욱 옭아매서 자신들의 장난감으로 삼을까만을 궁리하며 여러 사건사고들을 일으키곤 하는 미디어 다신주의 신들의 '철부지짓'으로부터, "인간이여 이제는 졸업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실존주의다.
이렇게 말한 대표적인 인물은 니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는 일은 유익할 것이다. 그는 인간이 독재적인 유일신을 죽이고 다원주의적인 관점을 갖게 되면 그 자신이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위버멘쉬의 뜻은 그런 것이 전혀 아니다. 니체가 꿈꾼 것은 신이 되는 일에 집착하고 있던 그 낡은 인간의 습성과의 결별이다. 초극되어야 할 것은 그러한 인간의 자기우상성이며, 새로운 인간은 우상의 공장 밖으로, 신들의 자궁 밖으로 나가고 있는 그 인간이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것.
인간이라는 그 이름이다.
신은 미디어의 공장에서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스스로 참된 것으로 자기 자신을 태어나게 한다.
공산품인 신들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러한 우리 자신의 참됨을, 그 신성한 자유를 회복하는 일,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실존주의라고 불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