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된다는 것"
인간이 만들어온 이 모든 것은 다 인간에 대한 대답들입니다.
인간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지, 또 그 인간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 등에 대답해옴으로써, 인간은 그 자신을 위한 가장 위대한 성취와 업적들을 이루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이 인간에게는 가장 미지였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냥 미지 정도가 아닙니다.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그 탐구자를 위한 커다란 창조력과 활력을 제공해줄 때, 그것은 이제 신비라는 이름을 갖습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인간 자신이 가장 큰 신비일 때,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일은 번영의 약속과 지속의 희망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것은 신비와 인간 사이의 언약이기도 할 것이며, 인간 자신의 가능성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우리가 인간에 관해 대답하고자 하는 것은 거기에 인간의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행복이 어떻게 지속가능한가의 실제적인 방법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더욱더, 끝없이 미지의 신비로 놓아둘수록 인간의 행복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바로 이 얘기를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는 우리가 지성으로 파악해 쉬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소재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저 위대한 미지의 영역으로 되돌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무력감을 선사하여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 또 영원한 행복을 종교가 지향하고 있기에 갖게 되는 방향성입니다.
인간은 최대치의 미지다, 곧 궁극의 신비다, 라고 하는 이 종교적 관점 위에, 이윽고 심리학이 출현합니다. 심리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다가가는 그 길은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곧, 우리가 자기 자신을 향해 다가갈 때만이 인간 또한 접근될 수 있는 것이라고 심리학은 얘기합니다.
그러면 이에 따라 종교심리학의 관점은 이렇게 구성될 수 있습니다.
<나>야말로 이 우주에서 가장 심원한 미지의 신비라고.
이러한 관점에서는 이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층 더 분명하게 대답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되어야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을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인간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저 위대한 언약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가고 인간이 되려는 이 방법론은 분명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으며, 위대한 혁명적 사유였습니다. 이러한 기획을 갖고 있는 어떤 전통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종교심리학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붓다나 예수가 그러했듯이.
이와 같은 차원에서, 종교는, 또 종교심리학은, 인간에 관해 대답해온 여타의 방식들과는 아주 다른 고유한 방향성을 갖습니다.
대부분의 방식은 인간을 하나의 이상적 이미지로 놓습니다. 그리고는 그 이상적 이미지에 가까워지려고 하거나, 개인들에게 그 이상적 이미지를 체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쉽게 말해,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를 흉내낸다든가, 일본 전국시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처세술을 익히려 한다든가, 황희정승의 인품을 본받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현대에는 인간에 대한 이 '모델링'의 방식이 고도로 발달한 미디어의 도움을 통해 더욱 번창해있습니다. 시대의 참된 어른이니, 민중의 영웅이니 하는 식으로, 미디어의 선전효과는 사람들에게 모델링되어야 한다고 상정된 이상적 인물상을 쉬이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인간을 가장 큰 미지로 놓으려 하는 종교 및 종교심리학의 방향성과는 상충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미지로 보려 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정답을 기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델링의 방식은 인간에 대한 정답 중의 정답을 임의로 설정해서, 인간의 모든 것이 그 정답을 향해 수렴되어야만 한다고 획책하고 선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조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신비로 보려 하는가? VS 인간을 신으로 만들려 하는가?
우리는 후자가 반드시 귀결되고 마는 현실의 이름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의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미디어는 이 우상숭배의 현실을 이루기 위해 기능하는 우상공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우상이 문제가 되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가능성을 절단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면모를 살펴보면, 그들 자신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을지라도, 반드시 '답정너'의 태도가 드러나 있습니다. 자신들이 진정한 정답을 알고 있는 척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정신적 지위는 상격시키는 동시에, 그 진정한 정답을 모르거나 또는 정답대로 살지 않는 이들은 인간 이하의 것으로 취급하려는 폭력적 성향은 농후합니다.
이 폭력성은 타인의 가능성을 절단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능성마저도 절단해버립니다. 자신들이 인간에 대해 규정한 그 임의적인 정답의 기준이 결국 자신들을 공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우상숭배자들은 늘 내로남불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동일한 기준을 남에게는 적용하면서 자기만은 이런저런 언어적 수작으로 회피하려고 하는 비겁하고 저열한 모습은 우상숭배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만연한 광적으로 '정치화'된 개인의 모습은 다 우상숭배자의 모습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정치현상도 실은 종교현상입니다. '종교적 인간[호모 렐리기우스]'의 본성인 종교성이 발현되어 생겨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성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때 언제나 굴절이 일어납니다. 종교의 정치화 내지 정치의 종교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굴절의 방식이 인류사에서 가장 큰 비극과 고통을 낳아온 그 이유였다는 사실에 우리는 기꺼이 동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죽인 이들은 예수를 정치화하려 했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정답을 정해놓고, 예수도 그 정답에 억지로 끼워맞추려 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 정답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예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인간의 미지성을 탐구함으로써 드러낸 어떤 위대한 인간의 지평을, 곧 예수의 <나다움>을 모델링해서 인간에 대한 정답을 만든 뒤, 이제는 거꾸로 예수에게서 얻은 그것으로 예수를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붓다에게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데바닷타가 붓다를 배신한 이유는, 자기가 붓다보다 더 붓다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역시도 붓다가 인간을 향한 탐구로 발견해낸 모종의 위대한 지평, 바로 붓다의 <나다움>을 모델링해서 인간에 대한 정답으로 삼은 뒤, 이제는 자기가 그 정답을 더 잘 안다며 붓다를 공격한 것입니다.
매우 유치하고 조악한 비유로 말하자면 결국 이러한 일입니다.
철수가 그 자신이 되려는 의도 속에서 자기 자신을 향한 깊은 관심을 가진 결과, 아주 멋진 인간의 면모를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영수가 철수의 그러한 모습을 따라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너답거덩? 니가 아니라 내가 진정한 철수거덩?" 그리고 이제 영수는 철수가 그 정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감시와 처벌의 시선으로 철수를 통제하려 합니다. 영수 자신의 <나다움>도 이미 상실되어 있을 뿐더러, 철수에게서도 더는 철수 자신의 <나다움>이 펼쳐질 수 없도록 그 모든 가능성을 절단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상화 속에 있을 때 경험하게 되는 통상적인 상황입니다. 자신과 상대의 생명력을 같이 억압하며, 함께 죽음의 늪으로 빠져드는 물귀신의 운명만이 우리에게 펼쳐집니다. 또 이 물귀신들끼리는 아주 동지애가 강합니다. 같이 늪에 빠져죽음으로써 인간이 가장 철저히 부정되는 그 길을 택하는 것이 동지에 대한 의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우상숭배로 인해 생겨나는 광신의 신앙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갖습니다.
실존주의 심리학에서는 이를 '침전(sedimentaion)'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살아있던 것이 늪에 가라앉아 퇴적되어 결국 화석으로 변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인간과 세상에 관한 임의적인 대답을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숭배하며 살고 있을 때 이러한 침전의 작용이 일어난다고 실존주의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실존상담은 이 침전으로 인해 화석이 되어버린 이들이, 곧 살아있어도 죽은 것처럼 살고 있는 이들이 다시금 생생한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조력합니다. 그것은 탈우상화의 일이며, 인간에 관한 정답을 기각하는 일입니다. 이는 인간의 위상을 미지의 신비로 되돌리려는 '몰라지기(unknowing)'라는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실천됩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의 밖에 더 커다란 미지의 영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그 일을 초월이라고 부릅니다. 실존상담은 인간의 본성이 이 초월성이라는 것을 신뢰하고 있기에 가능한 활동입니다. 모든 실존주의자는 다 이 인간의 초월성에 대해 말합니다.
인간은 지금의 자신을 초월하고 싶어합니다. 그럼으로써 더욱 인간 자신이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에 관해 초월적인 까닭에 인간입니다.
인간이 결국 더 거대한 자기 자신을 향해 계속 초월해가는, 이 고유한 인간의 특성인 초월성의 다른 이름이 바로 종교성입니다. 그러니 종교성은 전술한 것처럼 미지에 대한 감수성과 깊게 연결됩니다. 어떤 것을 다 알고 있는 척하는 동안에는 우리는 초월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미지여야만, 그것에 대해 몰라져야만 우리는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것이 몰라져야만 우리는 초월성을 본성으로 가진 바로 그 인간이라는 것이 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인간을 몰라야 오히려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종교심리학적 이해 속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그 일로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동의했습니다.
그러니 가장 몰라져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몰라야, <나>는 비로소 드러나지며, 곧 <나>라는 인간이 됩니다.
이러한 <나>는 결코 정답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끝없는 끌림이자, 설렘이며, 다가감으로서만 묘사됩니다. <나>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정답 중의 정답으로 삼는 순간, 그러한 나는 빠르게 화석이 되어갑니다. 왜냐하면 <나>는 분명하게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가 아니라고, 더 거대하고 존귀한 것이라며, <나>는 더 멋진 모습을 계속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곧, 인간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더욱 거대하고 존귀한 것이며, 이 우주에서 우리가 영원히 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존재로 스스로를 알리고자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그 인간이 바로 <나>였구나, 를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우상화하고 있는 그 모든 정답 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한 정답들을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매일같이 강요하며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별로 사랑스럽게 경험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나아가, 지금의 세상에 창궐하고 있는 그 성대한 화의 문제를 떠올려보면, 그것들의 실제가 시기와 질투라는 사실도 함께 알려집니다. 이것은 아주 전형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귀한 존재로 경험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똑똑한 척, 세상 돌아가는 일을 노련하게 다 파악하고 있는 척하며, 또 의식이 깨어있는 척, 올바르고 도덕적인 식견을 갖고 있는 척하고 있을 때, 그리고 이를 통해 남들에게 스승이나 선생처럼 가르치고 있거나, 도덕적 교사나 정의의 파수꾼인 것처럼 행위하고 있다면, 우리는 시기하며 질투하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의 삶이 화석화되어있을 때,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활력의 요소는 남들을 교육하거나 양육하는 그 일뿐입니다. 그러한 일을 할 때만이 자신의 삶이 조금은 재미있어지거나 의미있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일들만을 펼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실은 자신의 삶이 심대하게 막혀있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는 이입니다.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모델링된 어떤 기능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잃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나답게> 살고 있는 것 같은 다른 이의 모습을 보면, 미치도록 화가 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잃고 있는 그 소중한 것을 남은 아주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아 생겨나는 시기와 질투가 계속해서 화를 만들어냅니다.
곧,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현재 초월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초월의 일을 위해 정확하게 쓰이지 못한 잉여의 에너지가 시기와 질투의 화가 되어 우리 자신을 치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임의적인 정답을 붙잡고, 자신이 그 인간인 척하고 있을 때, 또는 그러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서 이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지 않기란 불가능한 법입니다. 그러한 방식은 거듭해서 <나다움>을 억압하고 소외하게 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가장 잃어갑니다.
자신이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그 정답을 기각하고, 다만 자신에게 어떠한 인간의 모습이 예상치못한 그 자태를 드러내줄까 그 인간의 미지성에 자신을 개방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지금 자기 자신이 되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러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은 이미 자기가 알고 있던 성격이라든가 행동양식, 정체성 등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나다움>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바로 그 방식을 초월해서 일어나는 것이 참된 <나다움>입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 또 분명하게 말하건대, 우리는 현재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그 이상의 것입니다. 비교도 안될 정도로 훨씬 멋진 것이고, 늠름한 것이며,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아주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나다움>의 의미이며, 그것은 곧 초월의 의미입니다. '종교적 인간'이란 이처럼 스스로를 더 귀한 것으로 계속 초월해나가는 인간의 핵심적인 면모를 정의하는 표현입니다.
이 놀랍고도 엄청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현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순합니다.
우리는 몰라지면 됩니다. 우리가 알아온 인간에 대한 정답들, 또 우리 자신에 대한 정답들을 이제 그만 좀 기각하고, 인간의 원점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 자신이 직접 대답하던 그 시절로. 생생하게 우리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던 그 살아있음의 시절로.
인간에 관해 모르니까 더욱 많이 보고, 가까이 보며, 깊은 관심을 통해 직접 관찰하고 탐구하던 그 눈빛과 몸짓은 분명 붓다와 예수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그들에게서도 드러났고 이제 우리에게서도 드러나고 있는 바로 <나다움>의 그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미지의 <나>를 알아가는 그 즐거움과 기쁨 속에 빠져있는 우리에게는 어느덧 이러한 말이 들려올지 모릅니다.
"봐봐, 여기에 인간이 있다(ecco homo)."
<나>를 통해 인간이 환히 밝혀지는 그 일, <나>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가 차마 잊지 못할 사랑스러운 빛으로 결국에는 드러나게 되는 그 일,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