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과 원의 두 삶의 양식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by 깨닫는마음씨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 질문을 하는 이는 빨리 눈치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곧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삶이라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것은 도덕을 요청하는 질문이다.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도덕적 규칙을 우리에게 끌어오는 것이며, 그 결과 그것들 중에 상충되는 것만 같은 규칙들의 갈등으로 인해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서 정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라지게 된다.


이것과 다르게 묻는 방식이 있다.


"왜 살아야 하나요?"


이것은 종교를 요청하는 질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종교성을 요청하는 질문이다. 우리 삶의 가장 근본을 돌이키고자 하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오늘날의 종교는 유감스럽게도 이 종교성을 상실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대답이 되어 있다. 즉, 오늘날의 종교는 무엇이 맞고 틀린지를 제공하는 도덕적 장치로만 기능한다. 도덕자판기와 같다.


이것을 종교의 도덕적 환원이라고 부른다. 더 큰 것이 더 작은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내가 옳아."를 지지받기 위해 종교를 소비하게 되었다. 종교적 대답을 통해 자기 삶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려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이는 비단 종교를 통해서만이 아니다. 모든 소비적 문화를 통해 사람들은 단지 자기 삶이 옳다는 것을 항변하는 데만 초점을 둔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삶이 재미없는 것이, 다만 떠맡은 짐과 같이 버거운 것이 되어버렸다는 반증이다.


'좋아서 사는 일'에 대한 종교가, '옳게 사는 일'에 대한 도덕이 되어버린 결과다. 그렇게 종교는 자신이 맞다는 강퍅한 자기주장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날의 정치는 종교보다 더 종교적이다. 즉, 정치는 사람들이 소비하고 싶어하는 도덕적 기능을 가장 탁월하게 제공한다. 정치에 대한 열광적 광신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종교가 도덕에 불과하다면, 더욱 노골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도덕적 기능을 보다 유능하게 제공하는 정치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당연히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누구도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답은 이미 정치가 내려 놓았다. 깨어 있는 민주시민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위해, 또한 그 이상을 가로막는 부조리함을 정의의 이름으로 함께 연대하여 극복함으로써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간다는 정답이 이미 내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생명체로서의 종말의 상황이다. 정치는 더 열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닫아 버린다. 폐쇄된 생태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즉, 폐쇄됨으로써 그 계(system) 안에서의 움직임이 예측가능해야만, 그 신뢰성을 바탕으로 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 곧 정치이기 때문이다.


닫힌 생태계는 생명의 끝이다.


그것은 뱅글뱅글 같은 자리를 돌기만 하는 원주 운동과 같다.


같은 풍경을 재생산하며 같은 평면 위를 반복하기만 하는 것이다.


이 닫힌 원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바로 윤회라고도 부른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 아닌 질문, 즉 이미 정답을 내려 놓은 질문을 소비하며, 결코 잡히지 않는 그 정답이라고 하는 것을 붙잡기 위해 운동장 트랙을 돌기만 하는 것이다.


원은 수직을 잃은, 즉 높이와 깊이를 잃은 나선이다.


곧, 나선이라는 입체가 평면이 된 것이 원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사실 답이 없다. 모든 것이 동일하다.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입체의 회복이다. 즉, 높이와 깊이로 이루어지는 수직운동의 회복이다.


그 회복의 시발점이 바로 "왜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질문자 자신을 향하게 된다. 질문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질문자가 정말로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질문자 자신이 이 질문에 의해 노출되게 된다.


그렇게 지금까지의 있는 그대로의 질문자의 모습이 노출될 때, 그것은 곧 지금까지의 있는 그대로의 질문자의 모습이 수용되는 현실과도 같다. 그 전모가 바라봐지며, 그 전모가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순간 정말로 일어나는 일은 바로 원의 바깥으로부터의 관측이다.


아주 단순하다. 새가 바라보는 시선의 조감도처럼, 하나의 계 속에서의 질문자의 삶의 전모가 관측될 때, 그것을 관측하는 시선은 그 계 바깥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까닭이다. 곧, 평면을 통째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은 오직 입체적 시선뿐이다.


이처럼 "왜 살아야 하나요?"를 묻는 이는, 그 순간 자신이 속해있던 계에서, 그렇게 반복되던 원주운동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원의 바깥으로 빠지게 된다. 평면의 원을 조감하는 입체를 회복하게 된다. 아래에서든 위에서든 수직의 좌표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원 밖으로의 움직임을, 평면 밖으로의 움직임을, 윤회 밖으로의 움직임을, 우리는 실존이라고 부른다.


"왜 살아야 하나요?"


이 질문은 실존철학 그리고 실존심리학의 전매특허와도 같다.


곧, 이러한 질문은 즉각적인 대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질문자의 위상을 즉각 변혁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렇게 입체적 좌표로 변혁된 질문자의 위상 자체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된다.


이 삶에 관한 가장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 그것이 바로 질문자 자신인 것이다. 곧, 이 삶의 모든 질문에 대한 이유는 바로 나인 것이다. 이와 같다.


나는 이렇게 출현한다.


나는 회복된 높이이자 깊이다. 때문에 2차원의 평면에서는 건너지 못하는 선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다. 초월적이다.


실존은 이 초월의 수직운동이며, 나는 바로 그 구현자다.


그러나 이러한 초월의 의미는 마치 이 현상계를 넘어서 어느 피안을 향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초월은 곧 수용이다. 수직운동을 통한 조감의 관측은, 관측되는 것을 다시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해서다. 즉, 초월은 이 현상계를 위해 펼쳐지는 운동이다.


이것을 미로에 빠진 이의 모습으로 비유할 수 있다. 평면의 시선으로만 살아가 길이 막혔을 때, 입체의 시선을 빌려 미로의 전모를 조감함으로써 미로를 헤쳐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입체의 시선은 미로 안에서 깜깜하고 갑갑해진 이의 심정에 공명하여 오직 그를 위해 이 초월적 운동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제는 길을 알게 된 미로 안의 그에게로 다시 돌아와 나로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자체의 운동이 곧 나선운동이다. 같은 중심을 가진 삶의 궤적 같지만, 그것을 관측하는 시선은 상승하고 하강한다. 그 수직운동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나는 그 중심이다. 물론 고정된 중심이 아니다. 삶이 평면으로 이동하는 좌표에 따라 중심의 좌표도 달라진다. 이를테면, 한 개인의 중심이 늘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미국으로 이동해 살면 그 중심은 미국에 있게 된다. 한국만이 진짜가 아니라 미국도 진짜다.


그러나 동시에 수직적인 차원에서 중심의 방향성은 항상 같다. 이를 중력으로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지구 위의 어느 평면의 좌표에 서있든 간에, 중력은 늘 밑으로 작용한다. 여기에서의 밑이라고 하는 것은 곧 지구의 중심이다. 중력은 언제나 중심을 향해 떨어져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깊이의 은유다. 나는 언제나 더 깊은 나를 향해 작용한다. 더 깊은 나에게로 떨어져내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종교성의 핵심적인 함의다. "왜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안내하는 삶의 방향성이다.


종교성이라는 것은 결국, 더욱 나다운 삶의 의미다. 더욱 나로 사는 아주 멋진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구약성서에서는 비유한다. 모세가 처음 종교적 실재를 접했을 때, 모세는 대체 그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대답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나야, 임마."


모세는 그 순간 나를 찾았던 것이다.


사생아로 태어나, 뿌리를 잃고, 어디에도 자신을 근거짓지 못해 방황하던 모세는, 가장 든든한 중심인 나를 그렇게 얻었던 것이다. 다 없어도 나만 있으면 된다는, 가장 거룩한 발견을 이루었던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모두 이 모세의 입장과 같다.


어디에도 우리 자신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이 없는 것만 같다. 아무도 우리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만 같다. 우리는 소외되었고, 그래서 고독하다. 그렇게 혼자라서 생존이 더욱 두렵다. 한 번이라도 쓰러지면 모든 것이 끝일 것만 같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신뢰할 것이 필요하다. 정말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도덕화된 종교도, 종교화된 정치도, 그 어느 것도 그 대답이 될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 속에는 답이 없다. 막힌 정답이 있기에, 열린 대답이 없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나요?"


우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있잖아, 임마."


이것이 대답이다.


나선의 삶이다.


나 선(I stand) 삶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정신분석적 사회에서 살아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