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적 사회에서 살아남기

"아버지의 부재도 어머니의 지배도 나를 막을 수 없다"

by 깨닫는마음씨




전체주의는 위대한 하나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주의의 근간은 마초주의다.


그런데 이 마초주의가 출현하는 원인은 바로 어머니에 의해서다.


곧, 어머니는 자신을 채워주지 않는 아버지의 권위와 능력을 끝없이 부정함으로써 결국 아버지를 몰락시킨다. 아버지의 부재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그 부재하는 아버지의 자리에 어머니가 올라선다. 가장 권력적인 모습으로 자신이 관장하는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한다. 그 모습이 바로 마초다. 즉, 마초는 권력적 모성의 모습이다.


이러한 권력적 모성에 노출된 아이는 똑같은 마초가 된다. 특히나 남자아이라면, 무력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연민이 뒤범벅된 시선을 갖고, 자신은 아버지와 같은 초라한 모습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힘있고 당당한 남성으로 기능하는 일이 그의 지상목표가 된다. 그렇게 그는 그의 권력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따라 동일한 마초가 된다.


한국사회에서 드러나는 아주 전형적인 구도로서,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와, 그 폭력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이러한 구도를 경험한 이는 그의 아버지를 인간쓰레기의 표본처럼, 동시에 그의 어머니를 성모마리아의 화신처럼 간주하게 된다.


그의 눈에는, 아버지는 부당한 가해자로만, 어머니는 순결한 피해자로만 보인다. 그래서 그는 맹목적으로 어머니의 편을 들며, 불쌍한 어머니가 그에게 바라는 것들을 어떻게든 이루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결코 어머니의 청을 거절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지금 무력해져 있는 것이며, 정확하게 어머니의 지배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 앞에서 너무나 무력감을 느낀 나머지 결국 역기능적으로 폭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그 입장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초는 모성에 지배되는 존재다.


권력적 모성은 자해공갈과 같은 은밀한 협박을 통해 마초를 조종한다. 그리고 마초는 이에 따라 아버지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한다. 아버지를 대하는 어머니의 시선을 그대로 자신의 시선으로 삼아 아버지를 철저하게 부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부재하게 되는 자리에 대신 자신이 올라선다.


이렇게 마초는 아버지의 대리물이 된다. 자신은 아버지와 다르게 진정한 남성의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천명하며, 그렇게 아버지와 똑같이 어머니에게 지배되는 꼭두각시가 된다.


이러한 마초주의와 권력적 모성의 기운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바로 정치인의 우상화다. 실제의 자기 아버지는 못난 존재로 보며, 그 대신에 정치인들은 진정한 아버지의 표상으로 삼아 그들을 아버지처럼 섬기는 것이다.


특히 모든 이의 말을 다 들어줄 것처럼 행세하는 황희 정승과 같은 바보 현자의 모델이 이 진정한 아버지의 표상으로 쉬이 작동한다. 즉, 조종하기 쉬워보이는 이가 인격적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숭상된다. 권력적 모성이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리에 앉힌 대리아버지를 자신의 뜻대로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그 의도 그대로다.


이처럼 진정한 아버지를 꿈꾸는 마초가 이루게 되는 전체주의의 뒤에는 언제나 수렴청정하는 권력적 모성이 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설화는 되풀이된다. 폭력은 그치지 않고, 고통은 세습된다.


이와 같은 고통이 끝없이 양산되는 사회를 임의적으로 정신분석적 사회라고 명명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정확하게 이러하다.


이것을 정신분석적 사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정신분석에서 바로 상기한 방식으로 진단하고 있는 까닭이다. 정신분석에서 바라보는 핵심적인 문제는 아버지의 부재며, 결국 그 대안은 건강한 아버지의 회복이다.


그렇게 지금의 한국사회는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지배 속에서, 정신분석적으로 더욱 진정한 아버지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회다. 그러나 더욱 진정한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결국 권력적 모성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모른채, 즉 똑같은 부모라는 것을 모른채, 그저 이 모든 비극을 끝내줄 구원자처럼 부모만을 희구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분석이 종국에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다.


정신분석과 전적으로 다른 입장에 서있는 실존상담을 대조시키면 정신분석의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신분석과 실존상담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정신분석이 모두가 분석가가 되는 현실을 꿈꾼다면, 실존상담은 상담자가 필요없는 현실을 꿈꾼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분석가 내지 상담가라는 표현을 부모라고 바꾸면 그 의미는 더 명확해진다.


곧, 정신분석에서는 반드시 부모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부재한다면, 분석가가 대리부모의 역할을 해주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내담자가 진정한 부모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조력해야 한다.


이처럼, 모든 이를 부모로 만들려는 것이 정신분석의 기획이다.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아이처럼 간주된다. 통제불가능하기에 위협적인 것이며, 잠재적으로 안전하지 못한 것이고, 반드시 부모의 도움이 요해지는 성가신 것이다.


정신분석에서 가정하기로는, 많은 내담자의 문제는 실제 그의 부모와의 부정적 경험이나 부모의 부재 등으로 인하여, 내담자들이 올바른 부모모델을 갖지 못함으로써 건강한 부모가 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따라 내담자들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몰라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마음의 양육자로서의 건강한 부모모델을 내담자들이 학습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목표가 된다.


정신분석가는 그래서 대리부모의 역할을 수행한다. 모범적인 부모의 본을 보이려 한다.


구체적으로는, 내담자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마음을 부모처럼 대신 받아줌으로써, 어떻게 마음을 잘 양육하여 처리할 수 있는지의 효과적인 모델을 내담자에게 학습시킨다. 이러한 분석가의 역할을 '담아주는 자(container)'라고 부른다. 표현 그대로, 아이가 처리할 수 없는 마음을 부모처럼 대신 담아 처리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개념에 근거해 현대의 정신분석가들은 정신분석의 핵심이 수용(acceptance)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수용이 아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곧잘 하는 것, 그것은 수용이 아니라 희생이다.


틸리히는 이 희생과는 다른 수용의 개념을 가장 정확하게 정의해낸다.


"수용이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수용은 억지로 인내하고 버티며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것을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 사실 자체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수용이란 곧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가장 친절한 존중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버티며 받아낼 수 있는 신과 같은 무한자로서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한성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바로 수용이다.


때문에 정신분석에서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전파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 선 수용이 아니라, 신의 입장에 선 희생이다. 곧, 인간이 신을 자임하는 우상화다.


이것은 정신분석이 왜 교조적인 색채를 띠는지에 대한 그 이유다.


정신분석은 구원자 컴플렉스, 메시아 컴플렉스, 목자 컴플렉스가 주요 동기로 작용하는 접근이다.


즉, 분석가가 부모와 같이 인내하고 희생함으로써 내담자를 구원하려는 모델이다. 또한 그러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 모델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내담자가 분석가에 대해 늘 열세에 놓이게 된다. 분석에 찾아온 내담자는 이미 자신의 마음을 처리할 수 없는 존재로 가정되는 것이다. 다만 분석가의 담아주는 행위로 인해 구원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나아가서는, 그렇게 분석가가 내담자를 재양육하는 활동을 통해, 내담자는 분석가의 모습을 닮은 건강한 부모로서 그 자신을 성장시키고, 이후의 삶에서 내담자 또한 구원자와 같은 부모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이 권장된다.


흡사 컬트종교의 모습과도 같다.


정신분석이 이처럼 건강한 부모의 표상을 보급하려는 전통인 까닭에, 정신분석 특유의 은밀한 권력성에 대한 비판은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특히 정신분석은 마음에 대해 권력적이다. 마음을 아이처럼 놓고, 분석가 자신은 마음을 돌보는 부모처럼 간주하는 이상 이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특성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정신분석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신뢰하지 않는 접근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마음은 부모에 의해 효과적으로 해결되고 또 처리되어야 할 문제와 같은 것이다.


이와는 대조되게, 실존상담에서의 마음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삶의 징후 그 자체다.


정신분석의 입장에서는 부모가 마음에게 해야 하는 것이, 실존상담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때문에 실존상담은 마음을 부모와 같은 대상에게 담아달라고 넘기지 않으며, 또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을 억지로 담아내기 위해 홀로 애쓰지도 않는다. 즉, 다른 대상을 부모로 만들거나, 자기 자신을 마치 마음을 알아주는 부모처럼 삼지 않는다.


실존상담은 아주 단순하게, 부모와 같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음이 스스로 하는 일을 신뢰한다. 그래서 선불교와 맥을 함께한다.


마음은 보편법칙이다. 내 마음이 아니다. 곧, 내가 주관해야 할 것이 아니며, 나의 부모가 주관해야 할 것이 아니다. 마음은 삶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실존상담의 출발점이 된다.


번개가 칠 때, 번개의 부모인 척 한다고 그 번개가 멈추지는 않는다. 나의 것이 아닌데, 나의 부모가 나설 곳은 더욱이 없다.


번개가 아이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부모가 사라지면, 아이는 번개를 다만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아이는 억지로 버티고 참아내며 번개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중이 아니다. 아이는 그저 번개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는 번개와 친구가 된다. 번개의 번쩍거림 속에서 번쩍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곧, 번개가 자신이 된다. 마음이 내가 된다. 그러한 나는 이제 어둠이 무섭지 않다. 어둠 속에서도 나는 번쩍이기 때문이다. 어둠을 스스로 밝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살아있다. 스스로 실감한다.


이는 실존상담이, 내가 아닌 마음을, 마음인 나로 전환하게 되는 그 자연스러운 과정에 대한 묘사다. 이 과정에 부모는 결코 필요하지 않다. 인내하고 희생해야 할 것 또한 없다. 즐겁고 흥미로운 과정일 뿐이다.


마음은 이처럼 원래 즐겁고 흥미로운 것이다. 이것을 심각하게 바꾸어버린 것은 부모며, 곧 정신분석적 태도다.


우리가 마음을 두렵고 불편하게 경험하게 된 것은, 마음이 애초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의 호들갑 때문이다. 부모의 호들갑이 마음을 문제처럼 만들었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필요하다며, 더욱더 마음은 부모에 의해 갇혀가게 된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이처럼 개인이 마음을 잘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러한 훈련이 부모를 통해 안전하고 성숙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가 다만 자상하게 지켜보는 엄마의 시선 속에서 더 안심하고 신나게 놀 수 있는 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몰입해서 놀고 있는 아이는 엄마의 시선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는다. 오히려 엄마의 시선이 의식될 때, 그것은 아무리 자상한 시선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엄마의 아이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약하는 구속으로 느껴진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는 진심으로 소망한다. 자신이 엄마의 아이임을 벗어나, 새가, 공룡이, 두더지가, 꽃이, 바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논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유라고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부모가 없을 때 펼쳐지는 이 자유를 봉쇄하는 동시에, 아이를 알아주는 부모를 통해 아이의 자유가 건강하게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엇인가에 의존해 성립될 수 있는 자유라면 그것은 이미 자유가 아니다. 우리의 자유를 실현시켜주겠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의 말이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거짓말인 것과 같다.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해줄텐데, 왜 이렇게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고 날뛰고 있니,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야."


이러한 부모의 말은 그대로 전체주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진정한 아버지만 따르면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이 자기모순적 진술은 정신분석적 사회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여기에는 분명하게 나의 실종이 있다.


정신분석은 나의 실존이 아니라, 나의 실종에 근거한 접근이다.


아이가 건강하게 기능하는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그러한 양육과정에서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분석가나 교사가 헌신적으로 재양육의 역할을 담당하여 아이를 좋은 어른으로 잘 성장시킨 모습을, 우리는 곧잘 나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최고의 환상이다. 정신분석적 양육주의가 세뇌시켜온 가장 오래된 환상이다.


그런 것은 내가 아니다. 잘 양육된 만큼 내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계몽된 시민의 모습일 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양육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양육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나는 만남으로 생겨난다. 바로 마음과의 만남으로만 생겨난다.


마음이 나를 만드는 것이지, 부모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그저 반복되는 부모의 복사물을 만들 뿐이다. 이것은 생물학이다. 정신분석은 생물학의 심리학화다.


그러나 나는 그 반복을 깨고 불쑥 출현한다. 그 어떤 생물학적 세습의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과 아무 상관없이 스스로의 존재감을 주장한다.


"어, 왜 이런 마음이 들지?"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돌연히 나로 드러나는 그 순간이다.


불현듯 찾아온 마음이 우리를 나로 깨어나게 한다.


마음이 만나러 온 것, 그것이 바로 나다. 이에 마주하여 마음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 그것이 또한 나다.


이 세상에는 이러한 마음과 나의 태초적인 관계성만이 있을 뿐이다. 키르케고르가 묘사한 것처럼, 이는 신 앞에서의 단독자의 입장과 같다. 그리고 여기에 부모가 끼어들 틈새는 없다. 가장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조율자는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역으로 말해서, 부모는 나의 연인을 자신이 대신 만나려는 의도를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나를 실종시키고, 어여쁜 나의 연인인 마음을 대신 갈취하려는 이가 바로 부모다.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가지려고 하는 정신분석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그래서 성립되지 않는다. 역으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의 연인을 가지려고 하는 일이 실제적으로 펼쳐지는 현상이다. 그래야만 부모는 자신을 반복하며 자신의 삶을 영속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부모는 자신이 영속하기 위해 나를 대신해 나의 자리에 서고자 하는 나의 대리물이다. 곧, 나를 대신하는 우상이다.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부모역할을 하고자 하는 분석가 또한 이 우상이 된다.


우상을 통해 나를 발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진정한 나인 척 하는 우상 때문에 우리는 나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즉, 정신분석의 가장 큰 맹점은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나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정신분석적으로 구성되는 종교체험에서는, 부모처럼 마음을 돌보고 알아주는 주시자와 같은 것에 대한 체험이 이루어진다. 그러한 부모와 같은 입장을 나인 것처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이 아니며, 깨달아진 내가 아니다. 나인 척 하고 있는 우상이다. 우상은 실체화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나인 것처럼 고정된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이처럼 부모가 실체화되며, 부모의 상징인 분석가가 실체화된다. 그리고 실체화는 언제나 위계를 만들어낸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공정한 언어들을 활용한다 해도, 실체화가 이루어져 있는 현실은 위계적 현실일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이 인간을, 내담자를, 마음을 아이처럼 보며, 이를 버티고, 인내하고, 알아주는 실체로서 분석가를 상정하고 있는 한, 그 분석가의 자리는 언제나 가장 높은 부모의 자리다. 즉, 우상의 자리다.


그리고 우상은 동시에 희생양이다.


다른 이의 고통을 대신 받아내는 희생양이다.


그리고 희생은 수용이 아니듯, 희생은 사랑 또한 아니다. 사랑의 심리학적 이름이 곧 수용인 까닭이다.


그래서 이 희생양의 자리에는 사랑이 없다. 구원자 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자신이 희생하는 일을 통해 얻는 고귀한 자기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숭고하고 신성한 책무인 양, 남의 고통을 대신 받아내고 버티며 비극적인 도취에 빠진 순교자의 상태와 같다.


이와는 대조되게, 실존상담은 결코 순교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자기도취 대신에 마음으로 말미암아 짓게 되는 웃음이 있다. 가볍고 경쾌하다. 마음의 속성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반면, 마음을 신뢰하지 않는 정신분석은 무겁고 심각하다. 장중함을 자처한다. 근본적으로 정신분석은 이 세상을 비극의 무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마음에게는 부모가 필요하지 않다. 이 사실이 정신분석에게는 비극이다. 부모 없이 작동하고 있는 마음이 공포스럽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부모가 필요하지 않은 마음에 대해 억지로 부모를 자처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부모없는 비극의 대지를 자신이 힘겹게 이끌어가고 있는 것과 같은 몸짓을 취한다. 현재 부모로서 작동하고 있는 자신이 무너지면 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것 같은 엄숙함을 연출한다.


즉, 정신분석은 실존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없다는 사실을 억지로 무시하며, 자신이 신의 자리를 대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짓 우상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단 하나뿐이다.


신과 같은 부모가 없어서 이 세상을 공포스럽게 경험하는 것은 오직 분석가 자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분석가는 자신에게 부모가 필요하기에 부모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모두 건강한 부모가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아직도 부모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믿는 그 자신의 수치심을 숨기고 싶은 의도일 뿐이다.


부모를 가장 필요로 여기는 이가 부모가 된다. 아주 단순하다. 그러나 그러한 부모는 단지 그의 필요일 뿐이다. 이 또한 아주 단순하다.


때문에 정신분석은 모두가 진정한 아버지와 같은 부모의 표상을 추구해야 하며, 사람들 각자가 진정한 부모[분석가]로서 거듭나야 한다는, 그리고 평생 그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주장을 멈출 필요가 있다. 즉, 모두가 부모처럼 평생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랑을 추방하려는 잔혹한 기획을 그만둘 필요가 있다.


실존상담에서는 신이 없는 세상을, 곧 부모가 없는 세상을 정확하게 사랑으로 경험한다. 그것은 신이 없음으로써 오히려 인간에게 자유를 개방하고자 한, 그렇게 신이 없이 계심으로써 인간을 가장 사랑하고자 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존상담의 인간관은, 자신이 부모와 같은 입장이 되어 이 모든 것을 버텨내며 어떻게든 사랑해보겠다는 미명하에 희생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 사랑받고 있는 인간을 묘사한다.


실존상담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신이 없음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즉, 없이 계신 신의 모습이다. 따라서 마음에 대한 신뢰는 자연스럽다. 마음에 대한 양육의 입장이라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기각된다. 신을 양육한다는 자체가 이미 어불성설인 까닭이다.


곧, 실존상담은 부모의 부재를 견디지 못해 새로운 부모를 세우려는 정신분석의 기획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실존상담에서는 부모의 부재가 곧 실존이며, 실존은 그 자체로 사랑의 증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랑은 양육이 아니다. 잘 양육된 이가 잘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잘 양육된 이는 그저 잘 양육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과는 무관하다.


사랑은 언제나 스스로다.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며,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라는 것은 마음이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알아서 스스로를 향한다는 것이다.


완벽함이 있는 곳에 사랑이 없고, 사랑이 있는 곳에 완벽함이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유한한 그 자리에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용의 태도는 곧 우리의 유한성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을 촉진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유한성에 대한 표현이며, 동시에 유한성을 향한 응답이다. 즉, 마음은 우리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는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린다.


한번 이해해보면 된다.


"저는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못난 존재에요."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면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이미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마음이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억지로 참고 버티며 희생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다. 도저히 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바로 그 자리에 마음을 타고 사랑이 출현한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가장 상냥해질 수 있는 것, 이것이 사랑의 원형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자신을 사랑해보겠다는 의지와는 다르다. 세상이 다 포기하도, 자신만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집념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또 하나의 정신분석적 양육의 태도일 뿐이다. 세상이 아무리 너를 멍청하다고 해도, 엄마만은 네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모습이다. 기어이 유한성을 부정하고, 자신이 신처럼 이 모든 것을 지배하겠다는 집착의 소산이다.


상기한 예에서 아이의 지적 수준을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은 사실 세상이 아니라 엄마다. 자신이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는 이 자기순환적인 고집이 바로 구원자 컴플렉스다.


그래서 구원자 컴플렉스는 온전한 것을 결코 온전한 것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 아니, 보지 않으려 한다. 상시 문제가 있어야만 자신이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정신분석에서 분석활동은 죽을 때까지 평생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반면, 실존상담은 구원자를 기각한다. 상담자는 내담자에 대한 구원자가 아니다. 상담자로 인해 온전하지 못했던 내담자가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실존상담은 다만 마음이 원래 온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접근이다.


때문에 실존상담은 아무 것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바뀐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없이 계신 신의 작용이다.


이처럼 실존상담은 마음을 신뢰함으로써, 마음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국내의 모 보험회사의 아름다운 광고문구다.


"마음이 합니다."


부모가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이들은 곧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할 것이 없구나."


마음이 온전히 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아름답고 감동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계속 해야 한다. 쉼없이 해야 한다. 마음을 버티고, 돌보고, 알아주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마음이 짐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새 자신에게 날개가 짐이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웃픈 현실이다.


한 마리의 새가 자신의 날개를 자신이 얼마나 오래 참아내고 있는지를 인자한 미소로 드러낸다. 의지로 꽉 다문 턱과 얼굴에 스민 피로마저도 인간승리의 뿌듯한 증거가 되는 그 새가 보여주는 인내와 희생의 정신은 새들의 마을에서 이상적인 덕목이 된다. 저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진정한 새의 모습이라며 열광적인 숭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진정한 부모로서 깨어난 새들은, 겸허하게 무게를 버틸 생각은 하지 않고 방정맞게 날아오르려고만 하는 어린 새들의 모습을 한심하게 여긴다. 날개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방종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아내야 할 삶의 무게임을 망각하고 있는 어린 새들이 만들어갈 이 마을의 미래가 심히 염려된다.


어떤 새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진정한 새가 버텨내고 있는 것은, 그저 그의 날개 위에 올려진, 그만이 필요로 하는 그의 엄마의 무게라는 것을.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엄마새가 두려워, 아빠새처럼 엄마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힘센 마초처럼 행세하며 날개에 걸린 무게를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일 뿐이다.


모든 마초는 마마보이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어머니의 지배를 신의 목소리처럼 받아들인, 그리고 그 엄마신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로 삼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마마보이다. 모두가 우리 엄마의 말을 따라야 한다며, 우리 엄마를 너희들의 신으로 섬겨야 한다며, 엄마신을 열렬히 전도하고 있는 광신적 마마보이일 뿐이다. 결국 전체주의는 광신적 마마보이의 목소리다.


자기 엄마가 두려워, 모두를 날지 못하게 만드는 새의 마을의 역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곳에서 새는 더는 새가 아니다.


그렇게 새가 새이지 못한 것, 이것이 고통이다.


정신분석적 사회의 끝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구원자 컴플렉스의 열광적 도취가 끌고 간 그 끝의 좌절스러운 피로감에서 우리는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쉬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받아들여져야 하며, 곧 우리는 이제 받아들여아 한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부재하는 아버지와 지배하는 어머니를 지양하여 진정한 아버지라는 대안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아버지를 죽여야 하고, 어머니를 가져야 하는 일을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지 않았고, 어머니를 갖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오히려 아버지가 친근해서 갖고 싶었고, 어머니가 무서워 죽이고 싶었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한다.


이는 이러한 고백이다.


"저는 진정한 아버지를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즐겁고 흥미로운 것에만 끌리는 쓰레기인가 봐요."


그리고 이것이 정확한 길이다.


부모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정확한 인간의 길이다.


즐거움과 흥미로 이끌어가는 마음이 개방하는, 바로 나의 길이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지배와는 아무 상관없이, 즉시 펼쳐져 불현듯 날아오르는 날개다.


그렇게 어디서나 날아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제 어디서나 쉴 수 있게 된다.


정말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어도 된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아도 된다.


그러면 우리는 노래하게 된다. 종달새처럼 정답게 지저귀게 된다. 경쾌하게 하늘을 가득 채운 그 마음의 노래를 타고 새 자신도 훌쩍 또 바람이 된다.


새가 살아 돌아왔다.


새는 이미 새다.


내가 나인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살아남은 것은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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