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은 어떻게 권력의 도구가 되는가?

"공감에 대한 착각이 낳는 폭력"

by 깨닫는마음씨



"공감을 내놓으면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칼을 든 강도들이 하는 소리다.


이 강도들은 에너지를 약탈한다. 미카엘 엔데의 걸작 『모모』에서 회색사나이들이 사람들에게 시간을 약탈하듯이, 이들은 생체에너지를 약탈한다. 그 결과가 소진(burnou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간약탈자들과 에너지약탈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동시대에서 지지받는 도덕적 가치로 무장했다는 점이다. 특히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담론이 이들의 약탈에 친히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이로 말미암아 약탈은 오히려 이들의 권리가 되어 당당해진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한 이유는, 해당 시대에 주된 세력을 형성한 정치사회적 담론이 이 약탈자들과 동일한 논리로 헤게모니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모는 아이를 영원히 지켜야 한다는 식의 담론으로 권력을 얻은 세력이 있다면, 그러한 권력이 작동하는 배경 속에서는 이제 부모에 대한 아이의 약탈은 정당해지며, 나아가 아이의 약탈 앞에 희생되는 부모의 모습은 오히려 미덕이 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고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억지로 이렇게 보려는 이들은, 늘 자신보다 작고 약한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자신이 그들을 도와줄 힘을 가진 존재처럼 되고 싶어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 즉, 약자를 통해 실은 자기 자신의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상대를 약체화시켜 자신의 권력을 얻으려는 교묘한 방식이다. 그리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자신 또한 동일한 논리로 약자에게 약탈당하게 된다. 아이에 대한 부모가 되어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그 논리가, 부모에 대한 아이의 약탈 역시도 정당화되게끔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체감적인 증거는 바로 죄책감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자극하는 죄책감이다.


약탈의 아이들은 부모에게, 그 시대마다 부모 자신이 세운 '좋은 부모'로서의 조건을 역으로 공략한다.


오늘날, 사람다움, 소통, 더불어, 동행, '네 자신을 당당한 스피커로 세워라' 등의 흡사 상담적 원리들처럼 보이는 것들을 중요한 부모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세력들은 그래서 이러한 역공에 직면한다.


"공감 안해주네? 좋은 부모 맞아?"


부모 자신이 세운 새로운 10계명 중 제1계명을 지키지 못한 자로서, 부모는 아이에게 끝없이 공박되며, 그 결과 죄책감은 누적된다.


그러나 누군가를 원망해야 할 일이 아니다.


부모 자신이 권력을 얻기 위해 세운 논리가, 권력을 얻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동일하게 활용되는 것뿐이다.


이렇게 권력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된 그 모든 원리는 원래의 빛을 잃는다. 상담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상담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권력의 도구로 몰락한다.


상담의 제1원리인 공감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두 가지 착각이 이 몰락을 촉진하고 가속화한다.


첫 번째의 착각은 공감의 내용에 대한 착각이다.


이것은 공감을 마치 부모가 아이의 모든 언행에 대해 절대적으로 찬동해주는 행위 및 태도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현실적 부모를 꿈꾸었던 미숙한 이들이 공감이라는 개념에 자신들의 소망을 투사해서 착각을 이루며, 그 착각에 근거하여 이제 자신이 그러한 부모로서 행세하려고 한다. 공감을 제1계명으로 정해놓고 사람들을 아이처럼 대하며 자신이 이러한 서비스를 제공해주겠다고 천명한다.


그 결과는 물론, 끝없는 찬동이 강요되며 생체에너지가 약탈되는 현실이다. 그러나 약탈되지 않을 수도 없다. 찬동을 잘 해주는 좋은 부모 행세를 해야만, 자신이 사람들에게 얻은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권력에 대한 강박적 의지가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두 번째의 착각은 공감의 작동방식에 대한 착각이다.


공감을 강요하는 자나, 공감을 강요받는 자나 동일한 이 착각 속에 있다. 그것은 공감이 무슨 투표권을 행사하듯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선택하는 주체적 활동이라는 착각이다.


공감을 이처럼 주체의 활동으로 착각하니, 공감하지 못하는 일은 올바르게 선택하지 못한 죄인 내지 올바르게 선택할 수 없는 무능력자의 일이 된다. 어느 쪽이든 그 결과는 죄책감이다.


그러나 공감은 능동적으로 의지를 내어 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수동적으로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공감은 비를 맞는 일과 같다. 비를 맞는 일은, 비를 예찬하거나 비난하는 일이 아니라, 그저 비의 속성을 경험하는 일이다. 비를 느끼는 일일 뿐이다.


하나의 통속적인 예로 한 아내가 남편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 그림을 묘사해볼 수 있다.


"당신은 진짜 공감무능력자다. 그냥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기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왜 자꾸 그렇게 싫은 얼굴을 하며 해결해주려고 하거나 짜증을 내는 건데?"


사실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 남편은 아내에게 '정확하게 공감한 것'이다.


누군가가 모종의 사건을 통해 화난 상태를 경험하고 그 상태를 다른 이에게 말할 때, 그 경험을 나누어받은 이가 똑같이 화난 상태가 되는 것은 아주 정확하게 공감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현명한 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은 나에게 화를 전하고 있는 당신 앞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라고 하면서, 왜 정작 당신은 당신에게 화를 전하고 있던 그 사건 앞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지 않았어?"


이것은 내로남불이다.


자신도 먹지 못한 배달음식을 상대에게는 다 먹으라고 강요하고 있는 내로남불의 폭력이다.


공감의 작동방식에 대한 착각을 해지하면 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기야, 나 너무 화난다. 화가 나한테 급작스럽게 막 찾아왔는데 나 혼자서는 소화가 안되고 좀 힘들다. 자기가 같이 그 느낌 들어주면서 화 처리하는 일 좀 도와줄 수 있어?"


이것은 무슨 말인가?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공감은 그 내용에 있어서든, 그 작동방식에 있어서든, 권력의 정반대편에서 작동하는 개념이라는 뜻이다.


권력적일 때 공감은 불가능하다.


공감은 수동적인 것이고, 힘이 없는 것이며, 의지적으로 어떤 것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가온 현상 앞에 귀를 열고 그 현상이 전해주는 느낌을 느끼는 것이 공감이다. 힘의 행사와는 완전히 정반대편에 있는 현실이다.


아이에게 가장 공감 못하는 것은 좋은 부모가 되려는 부모다. 이것은 당연하다. 좋은 부모는 그 자신이 세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좋은 힘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힘이든 나쁜 힘이든 그것은 힘이다. 공감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부모로서 자신의 무능력감과 좌절감을 정직하게 받아들인 부모만 아이에 대한 공감자로 다시 선다. 좋은 부모로서 신격화된 정체성을 벗고 정말로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이는 언제나 부모의 자기우상화를 해체시켜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러나 아이 앞에 영원히 강력하고 유능한 신으로 남으려고 고집하는 부모는 결국 아이를 약탈자로 뒤바꾸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숭고하게 아이를 위해 모든 헌신을 다했지만 그 사실을 몰라주는 아이에 대해 일견 속상해하면서도, 그런 것이 또 부모가 떠맡아야 할 고귀한 운명적 임무라도 되는 것처럼 비극적 미학에 빠져들어 미소짓는다.


그리고 이러한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상담자를 찾아와, 자기 부모에게 하던 방식 그대로 죄책감을 저당잡으며 공감을 강요하는 게임을 펼친다.


"선생님 왜 제가 하는 말에 말대답하세요? 좋은 상담자면 그냥 조용히 제 말이나 들으며 제가 맞다고 공감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러한 내담자는 지금 상담자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부모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가 했던 방식 그대로, 자신이 현실에서 무력하다고 느껴질 때 누군가의 죄책감을 자극해 그를 약자로 만드는 행위를 통해, 상대적으로 자신이 힘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경험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희생양 세우기의 권력적 논리다.


부모는 아이를 영원한 약자로 보며 아이에게 힘을 약탈하고, 아이는 죄책감을 자극해 부모를 약자로 만들어 부모에게 힘을 약탈해온 그 처참한 정치적 폭력의 역사를, 상담이라는 정반대의 영토에까지 밀고 들어와 반복하려는 이 의지는 결국 자신의 부모가 신이라고 외치는 고백과도 같다.


신인 부모가 세운 십계명을 따라 자신도 세계에 대해 똑같이 하고 있는 모습이며, 곧 자기 부모를 신으로 섬기라며 세계에 대해 강요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세계에 대해, 자신의 부모가 신이니까 자신에게 모든 에너지를 내놓으라며 칼을 들이대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아빠가 하나님이고, 우리 엄마가 성모마리아인데, 왜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는 거야? 이거 정당하지 않은데."

"우리 아빠가 토니 스타크이고 나를 3000만큼 사랑하는데 왜 대기업에 취업이 안되는 거야? 이거 정당하지 않은데."

"우리 엄마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인데, 왜 남자친구는 나에게 복종 안하는 거야? 이거 정당하지 않은데."


언술로만 보면 희극이지만,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보편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극이다.


"너 왜 우리 아빠엄마 말 안 들어? 내 말이 우리 아빠엄마 말인데 왜 무조건적으로 공감하며 안 듣고 있어? 너 진짜 이상하다. 너 죄인이거나 무능력자가 틀림없어."


권력에의 의지가 아주 비대한 정치세력이, 나쁜 부모를 몰아낸 좋은 부모인 것처럼 자신들을 성공적으로 입지화하고 있을 때, 이러한 아이의 목소리는 땅끝까지 울리며 하늘을 뒤덮는다. 그렇게 하늘과 땅 사이에 폭력만이 남는다.


그리고 상담자는 이 폭력에 동의하지 않는 대표적인 역할이다.


상담은 내담자가 신처럼 보고 있는 내담자의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찬동하는 역할이 아니며, 또한 상담을 통해 내담자에게 그의 부모보다 더 대단한 신이 되어주는 역할이 아니다.


물론 상담은 내담자에 대한 재양육이라며, 상담자가 내담자의 부모노릇을 해줄 것을 제안하는 접근도 있다. 정신역동적 접근이 그러하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자면, 그 무수한 심리상담의 이론들 중에서 고작 정신역동적 접근 하나만이 그러한 제안을 시도할 뿐이다.


심지어는 정신역동적 접근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트조차도, 내담자의 욕구를 다 받아주며 채워주는 부모상을 상담자의 모델로 설정한 적이 없다. 프로이트가 회복하고자 한 것은 오히려 엄격한 부권이다. 신이 실종된 세계에서 임의적인 내면의 질서를 제공해 인간들이 서로를 약탈하는 일을 멈추게 하려는 것이 프로이트의 기획이었다.


나아가 공감이라고 하는 개념을 심리상담의 구조 속에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핵심적으로 도입한 칼 로저스와 같은 인본주의 상담자 또한, 상담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역할로서 부모의 역할을 그 선두에 두었다. 우리에게 공감이란 단어를 친숙하게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 공감은 부모와 전혀 관계없는, 오히려 부모의 반대편에서 성립되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반대의 예로, 상담자에 의한 내담자의 재양육을 강조한 현대정신분석의 세력인 멜라니 클라인과 같은 이들이 결국 우울증과 자살로 그 끝을 맺었다는 사실은 아주 의미심장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약탈의 끝은 원래 죽음이다.


우울증이 만연한 시대라면, 역으로 '좋은 부모'에 대한 환상이, 그리고 그 환상을 중심으로 한 약탈의 현실이 얼마나 농후하게 펼쳐져 있는지를 짐작해보는 일은 유익하다.


상담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감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개념이, 오히려 그 반대편에 위치한 약탈의 현실을 강화하고 가속화하는 데 남용되고 있는 일은 그래서 진실로 비극적인 일이다.


"좋아요를 눌러주면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구독자가 되어주면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우주킹왕짱천재미남이라고 말해주면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공감이라는 이름의 찬동이 강요되며, 그렇게 공감의 원의미가 굴절되고 오염되며, 결국 공감의 표현인 상담이 권력의 도구로 전락되는 이 현실 속에서도 사실 공감은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에 그리 쫓기고 있을까?'


가만히 있으면 뒤쳐질 것 같고, 이대로는 잘못된 존재인 것 같고, 그러한 조바심 속에서 피박만이라도 면해보고자 화투패를 긁어모으듯 찬동을 긁어모은다.


쫓기는 이 느낌이 공감된 것이다.


쫓는 것의 정체는 '좋은 부모'다.


부모도, 아이도, 똑같이 좋은 부모에게 쫓긴다.


부모도, 아이도, 똑같이 좋은 부모를 쫓고 있기에 좋은 부모에게 쫓긴다.


상담은 본질적으로, 좋은 부모 없이 살아가는 법에 대한 것이다.


좋은 부모의 말로만 이상적인 일들에 대해 강제로 찬동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정말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감되는 것이 상담이다.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되게 하려는 강요가 폭력의 출발점이다. 공감의 강요란 애초 성립도 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억지로 웃으라고 하는 일과도 같다. 웃음만큼이나 공감은 오직 자연스럽게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재미없는 이야기 앞에서 웃지 못하는 것이 상대의 잘못이 아니듯이, 공감하지 못하는 것 또한 상대의 잘못이 아니다. 내 자신에게도 재미없는 이야기 앞에서 상대가 재미없는 표정을 짓는다면,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공감한 것이다.


내 자신은 재미없는데 상대는 재미있어 해주기를 바라고, 내 자신은 화가 나있는데 상대는 자비롭게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내 자신은 스스로를 예쁘게 보지도 않는데 상대는 나를 예쁘게 봐주기를 바라는 일, 이것이 일상에 만연한 폭력의 정체다.


자기로부터의 소외, 이것이 폭력의 정체다.


아무리 좋은 부모가 찬동한다 하더라도 이 자기에 의한 자기의 소외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이 소외는 오직 공감으로만, 진짜 공감으로만 극복가능하다.


내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게 될 때, 공감은 이미 시작되어 있다.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억지로 바꾸려는 일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좋은 부모로 이끌어가려는 일을 포기할 때, 공감은 이미 시작되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내가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공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좋은 부모로부터 해방되어 그 모든 그 자신일 수 있도록 하는 '변화'를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을 든 도둑이 아니라, 곳간을 푼 부자의 마음이다.


이처럼 진짜 공감은 누군가에게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좋은 부모의 권력에도 찬동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공감의 여정을 이제 시작한다. 자상한 폭력 속에 자신을 방치시켜두었던 슬픈 날들을 뒤로 한 채, 공감이 이끄는 곳으로 자신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삶이며, 공감은 삶의 나침반이다.


이 삶의 나침반을 신뢰해가는 삶의 연습활동이 바로 상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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