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전체주의와 프로시민

"자발적 통제사회의 완성"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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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의 집단주의 문화를 통렬하게 비판하던 '일본침몰'이라는 작품이 있다. 일본열도가 침몰하는 데는 물리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물리적 상태에 상응하는 일본인들의 심리적 상태가 연동되고 있다는 동시성의 주제를 묘사한 작품이다.


작품 내에서 그려지기로, 침몰이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막장에 이른 심리적 상태란 곧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다수가 진리다."라는 상태다. 수만 많으면 무엇을 해도 정의고 다 괜찮다는 식의 대중독재의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전체주의는 시민이라고 자신을 명명하고 있는 대중에 의해 실현된다. 그러나 이 시민이라는 주체는 대중이라고 불리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대중은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노예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시민이라는 주체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올바른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을 가진 주인의식에 근거해 있는 것으로 가정된다.


그래서 시민이라는 이름의 대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전체주의적 양상, 즉 동일성의 폭력은, 마치 의도적으로 결집된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개별적으로 결단하여 선택한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처럼 포장된다. 즉, 그것이 전체주의의 결과가 아닌 것처럼 은폐된다. 때문에 집단압력으로서의 폭력을 자행하는 시민 주체는 폭력에 대한 자각력을 상실한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선량한 얼굴로 잔혹한 현실을 창조해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되는 것이다.


전술한 '일본침몰'에서는 이러한 시민 주체의 모습이 잘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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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철학자인 베르자예프는 이러한 시민 주체의 모습을 분명하게 근대의 노예성으로 묘사한다. 왕과 귀족을 추방한 후에 성립된 근대사회의 시민 주체는 더는 누구에게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주체가 아니다. 그 명령을 내사해서 스스로의 명령으로 생각하며, 즉 자발적인 자기 선택인 것처럼 간주하며 노예의 구조를 받아들인 주체다.


한병철 또한 그의 잘 알려진 책 『피로사회』에서 이와 유사한 주장을 전개한다. 더 건강하고 계몽적인 시민 주체로 서고자 하는 이는, 노예화의 명령을 내사함으로써 스스로를 계속 자기계발의 쳇바퀴 속으로 몰아간다.


이것을 근대의 저주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근대의 저주는 근대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의 완성이다. 헤겔적인, 그리고 마르크스적인 자기동일성의 완성이다.


모든 것을 자기와 같은 속성으로 만들고자 하는 운동이, 사회의 상부구조에서 전개되었든 하부구조에서 전개되었든 간에, 그것은 그저 똑같은 동일성에의 의지일 뿐이다. 계급투쟁보다 더 섬세하게 포착되어야 하는 것은 이러한 근대적 운동이 내포한 자기동일성의 속성이다. 곧, 근본적으로 자기의 안정을 위해 다른 것을 자기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바로 그 속성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근대의 끝은 2차대전과 홀로코스트다.


그 비극의 끝에 이르러서도 근대의 망령은 여전히 자신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통탄했다. 그리고 이제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되는 대중사회의 구조를 통해 그 완성에의 꿈을 기어이 이루어내고야 말았다.


근대의 계몽주의자들 그리고 그와 유사한 조선의 선비들이 무덤 속에서 흐뭇하게 웃을 일이다.


이러한 망령의 꿈을 이루어주고 있는 시민 주체를, 일본에서는 다음과 같은 용어로 묘사하기도 한다.


'프로시민'


한국에서의 깨시민과 거의 비슷한 용법으로 쓰이는 단어다.


사회적으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올바른 진리 내지 진정한 인간이 살아야 할 길 등과 같은 것이 있다고 믿으며, 또 특정한 정치적 선택으로 그러한 진리를 실현할 수 있다고 간주하며, 종교의 대리물로서 정치를 대신 신앙화해서 살아가는 개인의 양상을 일컫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프로시민의 행동원리는 더 밝고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동기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이들이 정치와 그 정치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합의기준을 중요시여긴다는 점에서, 전술한 것처럼 거의 신앙에 가까울 정도로 정치논리를 중요시여긴다는 점에서 그 동기는 오히려 명백하다.


프로시민은 무엇인가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부터 '쫓기고 있는 것'이다.


프로시민은 정확하게 불안으로부터 쫓기고 있다.


이것은 분명 역설적이다. 이들이 불안으로부터 쫓기는 이유는, 그 어떤 정치현실이라도 이들에게 안정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들이 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 말고는 달리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신이 이미 죽은 종교는 더는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과학은 중립적이며, 경제는 내 편이 아니다. 정치만이 불안을 완화시키기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소재다.


그래서 프로시민은 정치를 신앙한다. 열렬한 신도가 된다. 신앙의 프로인 셈이다.


탁월한 통찰을 보여준 영국의 문화비평가인 콜린 윌슨은 실존철학의 운명을 두 갈래로 묘사한다. 첫 번째는 정치고, 두 번째는 종교다. 전자로 경도된 실존철학은 몰락함으로써 실존철학이 마치 비극적이고 염세적인 사조인 것처럼 오해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고, 후자는 살아남았다. 특히 실존상담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존재성을 존귀하게 회복시키려는 일종의 종교적 기획을 성공시키게 되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실존은 정치의 반대편에 위치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은 결코 정치가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프로시민은 아직 개인이 되지 못한 것이다.


타인과 분리된 개별적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개인인 것은 아니다. 개인이 되는 일, 즉 개성화의 조건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부모 및 사회의 법으로부터 독립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독립 또한 역설적이다. 독립은 근대가 꿈꾸던 자유의지를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즉, 자신이 직접 투표권을 행사하는 식으로 현실에 힘을 행사할 모종의 선택을 이루는 권리를 전제함으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당위적인 권리와 의무에 대한 근대적 사유는, 실은 아동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내가 숙제를 했으니 나에게는 놀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정당해."


이렇게 사는 방식을 지속하는 한, 프로시민은 그저 아동일 뿐이다. 아동으로 지속될 뿐이다.


실존적 독립이라는 것은 '권리와 의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필요와 소통'에 대한 것이다.


당위가 아니라 자유다.


자유롭게 필요로 하며, 그 필요를 이루기 위해 자유롭게 소통하는 것이다.


현재 개인이 경험하는 목마름을 그 자신의 목마름으로 정직하게 자각하고 있는 실존적 개인은, 그 필요에 대해서도 정직하다. 당위적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물을 갖다바쳐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당위적으로 자신이 삽질을 세 시간 동안 했으니 그 노동이 물과 교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재의 사막에서 나와 물이 있는 곳으로 직접 이동하거나, 혹은 물을 가진 이에게 부탁을 한다.


목마른 자신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움직이는 일이, 그 자신을 가장 존귀하게 대하는 방식인 까닭이다.


당위를 요구하고 있는 한, 우리는 존귀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당위라는 것은 결국 기계적인 인풋과 아웃풋의 알고리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당위를 따르고 있는 것은, 인간이 그 자신을 사물화하고 있는 상황과 같다.


규칙을 지켜야만 하는 기계로 인간이 사물화된 현상, 이것이 바로 잘 알려진 소외라고 하는 현상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이처럼 개인이 개인임을 망각한 채,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소외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자신을 더 많이 소외시킬수록, 훌륭한 사회적 존재로 평가된다. 잘 참고 인내하는 인격자쯤으로 예찬된다. "저렇게 잘 자란 걸 보니 부모님 인품도 알만하네, 그려."라며 유교주의적 가치의 담지자처럼 칭송된다.


그렇게 실은, 죄책감을 자극하는 외부의 압력에 따라, 죄책감을 최대한 경험하지 않을 방향으로 살아가게끔 이 시대의 우리는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너의 이야기를 하라."라며 모든 것이 다 허용되어 있는 것처럼 폼을 잡지만, 실은 가야만 하는 길은 하나의 길로 정해져 있다. 도덕주의의 길이 그것이다. 도덕주의로 무장한 전체주의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심리상담의 관계론으로 묘사하자면, 소위 우리는 늘 이중메시지를 받고 있는 것과 같다. 마릴린 맨슨은 보수적인 부모가 아이에게 전하는 이중메시지를 기가 막히게 잘 묘사했다.


"넌 내가 하라는 것만 해. 그리고 내가 하는 건 하지 마."


이중메시지에 끊임없이 노출되는 심리적 개인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혼란이다.


혼란은 불안이 가중된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혼란스러워질 때, 이 이중메시지의 제공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질 정도로 이 세상이 혼란스러우니까, 내 말만 잘 따르면 돼."


이중메시지의 발화자는 이로 인해 타인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획득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게 되는 현실과 같다.


오늘날의 코로나라고 하는 소재는 이와 같이 활용되고 있다.


치사율과는 관계없이 전염병이 돈다고 하면 우리는 불안해진다. 그럴 때 어떤 경우는 과장하고 어떤 경우는 축소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사실과 멀어지게 함으로써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리고 혼란 속에서 우리가 갈팡질팡할 때 구원자는 이제 등장할 준비를 마친다. 반듯한 쇼와 함께, "우리가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를 통해 혼란스러운 집단에 구원을 제공한다.


히틀러와 괴벨스의 기획은 언제나 전체주의적 성공을 위해서는 모델링되고 반복되는 효과적인 동일성의 기제다.


프로시민과 프로시민이 위치한 정치적 현실의 위정자는 동일한 얼굴을 갖고 있다. 어디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적으로 함께 닮아간 얼굴이다.


그것은 전체주의가 드러내는 하나의 얼굴이다.


그 얼굴과 닮으면 닮을수록 쾌의 경험은 약속되며, 그 얼굴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불쾌의 경험은 예언된다.


"내 말을 따르는 착한 아이 같은 너에게는 쾌락이 보장되며, 내 말을 따르지 않는 반동분자인 너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있으리라."


코로나 전체주의는 이렇게 성립된다.


프로시민이 전체주의를 똑 닮은 '착한 아이'의 얼굴을 갖고 스스로를 감옥 속에 묶음으로써, 그리고 '착한 죄수'에게만 감옥에서 허락되는 작은 풍요와 복지의 자극에 만족해하며 미소지음으로써, 나아가서는 '나쁜 자유인'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형편없는지를 비웃고 혐오함으로써, 코로나 전체주의는 완성된다.


자발적 통제사회는, 인간의 선지자들이 그토록 목이 찢어져라 외쳐대며 경계하고자 했던 인간몰락의 현실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완성된다.


삶의 현상학자인 미셸 앙리는 이와 같은 현실을 야만으로 규정한다. 개인이 자신을 느끼고 자각하기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관념적 도구로 자신을 위치시키며, 스스로의 생생한 삶을 부정하게 된 현상이다.


과감하게 선언해볼 수 있다.


프로시민은 섬세하게 개화된 문화적 징후가 아니라, 오히려 문화가 사멸해가는 야만의 증거다.


그것은 오늘날의 전체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그 결산이다.


인간실존의 더없는 추락이며, 덧없는 표류다.


코로나라고 하는 바이러스가 펼쳐내는 자연현상은 전체주의에 봉사하는 소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자연현상은 언제 어떤 때라도 정치 위에 있는 것이다. 가장 실증적인 자연현상인 개인의 죽음이 그 존귀함을 잃고 정치를 위해 남용되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다.


또한 가랑비가 내리는 자연현상에 대해 우산을 준비한 아이는 칭찬을 받고, 비를 맞은 아이는 비난되는 식으로, 자연현상이 보상과 처벌의 기제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원시적인 주술사회의 모습이다. 멀쩡한데 비를 맞고 다니며 다른 이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악령에 들렸다고 말해지는 아이는, 실은 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악령을 퇴마하려는 엑소시스트에 의해 더 많이 죽는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퇴마하려, 즉 통제하려 하고 있는가?


이제 정직하게 직시해야 한다.


세상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안한 것이다.


자신의 불안은, 결코 통제될 수 없는 것이다.


통제가 자발적으로 체화되었다고, 불안 또한 자발적으로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체주의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불안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라고 하는 자연현상은, 다만 우리에게 불안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마중물이다.


불안에 대해 그 불안을 과장하지도 또 축소하지도 않는다면 질문은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안을 직면하여, 그 불안과 함께, 나아가서는 그 불안을 우리의 힘으로 활용해 살아갈 수 있는가?


대답되어야 하는 것은 이 질문이며, 그 대답은 아주 긍정적이다.


전체주의는 결코, 우리가 온전한 우리 자신일 자유의 가능성을 도무지 막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키르케고르는 분명하게 말한다.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이다."


우리가 스스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소외하고 그것을 불안으로 추방하려 할 때, 전체주의는 활성화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일 가능성은 결박되고 봉쇄된 채, 문화는 퇴행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제 정말로 자유로워도 된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끼며 실감할 때, 우리는 가장 존귀한 우리 자신이 된다. 우리의 손에서 새로운 문화가 창조된다.


그런 즉, 우리는 프로시민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의 프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프로아동이 아니다. 영원히 보상과 처벌의, 또 권리와 의무의 방학숙제와 같은 당위적 기제 속에서만 노예처럼 살아가는 전문적 아동이 아니다.


우리는 바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하고 증명하는, 그럼으로써 우리의 행복을 그 누구에게도 위탁하지 않는, 우리 자신일 자유의 전문가다.


자유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다.


코로나가 자유롭듯이, 우리도 자유롭다.


코로나가 그 어떤 정치적 방편으로도 통제될 수 없듯이, 우리 자신 또한 그 어떤 정치적 방편으로도 통제될 수 없다.


내 자신은, 그 어떤 정치논리보다 위에 있다.


정치가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 아니라, 자유가 나를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사는가, 모르고 사는가, 이것은 단 하나의 의미있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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