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빙의기를 맞아"
춥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계절의 급변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통속적인 괴담들에서 얘기되듯이 영가(靈駕)가 가까이 있으면 추위가 경험된다고 할 때의 그 느낌에 가깝다.
그런 의미로 한국사회는 지금 빙하기가 아닌 빙의기를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은 것이 더 신성한 권위를 얻으며, 본격적으로 귀신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사실은 귀신을 위한 일인데 나를 위한 일처럼 치열하게 매진하는 데 아무런 의심이 없다. 귀신의 욕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나의 삶을 제물로 내어놓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희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오히려 미덕이기까지 한 주술사회의 모습이다.
여기에서 빙의취약성이라는 용어를 제안해볼 수 있다. 빙의되기 쉬운 개인의 특성을 가리키는 용어다. 세뇌취약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은 분명 이 빙의취약성 내지 세뇌취약성이 높은 이들의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남의 말을 신주단지 삼아 목숨을 걸고 수호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남이 말한 진리로 또 다른 남을 공격하기도 하며, 또는 남의 말을 자기의 말처럼 활용함으로써 이득을 취하기도 한다.
복제품들이, 아니 더 엄밀하게는 마릴린 맨슨이 노래한 것처럼, 모조품의 복제품(copy of imitation)들이 창궐하여 득세하는 현실이다. 자신을 복제하기를 바라는 링의 사다코나 주온의 가야코가 그 소망을 100%로 실현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귀신을 섬기는 사이비교주의 말을 염불처럼 똑같이 외우는 신도들이 나날이 복제되어 갈 때, 귀신의 웃음만 커져갈 뿐이다. 그리고 또 다시 통속적인 괴담들에서 말해지듯이, 웃는 귀신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귀신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컬트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무서운 전체주의에 대한 이야기다.
전체주의적 담론이 도덕적 진리화의 전략을 통해 너무나 쉽게 사람들에게 빙의되는 현실에 대한, 또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현실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다.
무서운 이야기가 무서운 현실이 되는 데는 분명 빙의에 취약한 현재의 상태가 작용한다. 이러한 빙의취약성을 드러내는 이들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1. 정서처리에 미숙하다.
2. 언행이 능숙한 알고리즘에 따르듯 연극적이다.
3. 전체에 합입되려는 열광과 도취의 욕구 내지 거대한 모태로 복귀하려는 퇴행의 욕구가 강하다.
4. 자신의 지성적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과잉의존한다.
5. 모델링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성공을 표면적으로 따라 하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6. 도덕적 강박이 강하다.
7. 문자주의적 원칙에 집착한다.
8. 자신은 깨끗하다는 결벽증이 있다.
9. 하나의 동일한 세계관만을 진리로 삼아 수호하며 나머지의 것을 배척한다.
10. 영웅주의를 동경한다.
11. 정의라는 이름에 기대어 자신의 불안을 회피하려 한다.
12. 삶을 이분법적으로 본다.
13. 버티며 인내하는 자기억압에 능하며 그것을 미덕으로 본다.
14. 밀키트를 데우며 자신이 마스터쉐프가 된 것처럼 뽐내고 싶어하는 유아적 자기현시욕이 강하다.
15. 모성을 신격화한다.
16. 자존감은 낮고 자존심은 세다.
17. 고집을 위한 고집을 부린다.
18. 훈장질 말고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법을 모른다.
19. 남들에게 똑바로 된 사람처럼 인정받기 위해서만 그 모든 것을 한다.
20. 정치를 신앙한다.
이 모든 특성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심리적 미발달이다. 빙의에 취약한 상태란 곧 심리적으로 미발달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개인이 빙의, 최면, 세뇌 등에 잘 노출되는 정도는 분명 그의 심리적 발달의 정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 발달의 핵심적인 의미는 개성화다. 곧, 나로 되는 것이다. 집단의 논리에서 벗어나 점점 더 오롯한 개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인본주의 심리학에서는 자기실현이라고 부른다. 틸리히는 이 개성화의 과정을, 개인이 몽롱한 원형질의 꿈에 취한 듯한 상태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라고도 묘사한다.
즉, 심리적 발달이란 집단주의의 강요와 압박에서 내가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른바 귀신으로부터의 자유다. 반면 집단주의에 종속될수록 빙의취약성은 높아진다. 귀신의 것을 나의 것인 줄 알고 살게 된다.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일인 줄만 알고, 귀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불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심리적 발달과 유사하게 들리지만, 실은 그 반대편의 것을 지시하는, 오히려 빙의취약성을 증대시키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신적 성숙이라는 표현이다. 인격수양이라고도 부른다.
"이제 철 좀 들어라. 어른스럽게 행동해라."
이러한 맥락으로 발화되는 이야기들이 다 이 정신적 성숙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 성숙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은 바로 의지다. 의지가 강한 이, 다시 말해 고집이 세서 잘 버티는 이가 정신적으로 성숙한 존재인 것처럼 가치롭게 회자된다.
프로이트적인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로 말하자면, 결국 정신적 성숙이란 의지라고 하는 다분히 의식적인 작용 속에서도 또 그 일부만을 강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심리적 발달이란 무의식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전인적 역량과 용량을 갖추는 일이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의식적인 것은 무의식에 비하면 너무나도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때문에 정작 정신적으로 성숙하다고 평가되는 이들, 마치 선비나 시대의 큰어른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실은 심리적 발달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즉, 정신적 성숙은 하나의 사회에서 모범적인 가치로 삼는 특정한 집단주의적 이념과 개인이 동화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개인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존재가 되도록 할 수는 없다. 자신이라고 하는 더욱 거대한 존재의 면모는 더욱 작은 집단주의의 이념에 가로막혀 늘 소외된 채로 남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집단주의적 이상에 자신을 맞추는 정신적 성숙을 추구하는 한, 오히려 심리적 미발달은 가속되며, 그로 인해 귀신은 더욱 활동할 무대를 얻게 된다.
옛날이야기에서 선비가 귀신과 계속 엮이는 그 이유다. 표면적으로는 선비가 귀신의 한을 달래주는 해결사의 역할을 취하고 있지만, 실은 선비가 귀신을 끊임없이 호출하고 있는 것이다. 선비가 추구되기에 귀신이 계속 생성되는 것이다. 그 둘은 사실 파장이 맞는 동일한 현상이다.
반면, 심리적 발달이 잘 이루어진 이는 귀신과 관계없는 삶을 산다. 귀신에게 쫓기지도, 귀신을 쫓지도 않는다. 귀신을 불러들이는 집단주의적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까닭이다.
귀신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집단주의적 이상의 끝없는 자기동일적 반복의 결과인 전체주의가 다양한 마음현상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압활동을 펼치는 이들은 마음의 다원적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것을 악이라고도 또 적폐라고도 부르게 된다. 귀신의 출현이다.
전체주의는 자신의 폭력성을 귀신에게 투사한다. 이 귀신의 폭력에 대응해 설정되는 것이 정신적으로 성숙한 선비다. 귀신을 잘 다스려서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전체주의적 평화의 실천가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귀신은 그저 선비 자신의 투사물일 뿐이다.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편의적 발명품일 뿐이다.
이러한 선비가 자신의 투사물인 귀신과 평생 싸우다가 죽게 되었을 때 투사는 그 자신에게로 철회되며, 선비는 원래 그러했던 바 그 자신이 귀신으로 정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는 더욱 강한 이념으로 남아, 살아있는 이들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사람들에게 빙의되어 전체주의의 세력을 가열차게 확장시켜 나간다.
심리적으로 미발달된 이가 자신의 미발달된 면모는 은폐한 채 정신적 스승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결국에는 또 다른 심리적 미발달의 특성을 가진 이들에게 빙의되어 영원한 미발달의 놀이터에서 스승놀이를 지속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야 언젠가는 훌륭한 어른이 되었다면서 엄마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미발달되고자 하는 유일한 이유는 영원한 엄마의 아이로 남고 싶어서다.
집단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곧 집단을 만들어내는 생산력 그 자체인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엄마로부터 멀어지면 엄마에게서 더는 관심을 받지 못할 것 같은 무서움이 든다.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며, 세상의 끝이다. 너무나 무서운 현실이다.
그리하여, 개인은 자신이 정말로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가장 떠나지 못하는 것, 개인은 그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가장 원하면서 가장 무서워한다.
엄마를.
심리적 미발달을 의식적으로 견지하며 전체주의에 빙의되고자 하는 이, 그는 전체주의의 자기동일화의 의도에 동의하는 이다. 즉, 엄마의 얼굴을 닮고 싶어하는 이다. 엄마의 얼굴과 똑같아지고자 하는 이다. 그래야 그러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엄마가 웃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고, 그 얼굴과 똑같이 자신도 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와 자식이 똑같은 표정으로 융합되어, 세상 모든 것을 그 표정으로 만들고자 하는 일, 이것이 전체주의다. 자기 엄마의 얼굴을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보고 싶어하는 의도다. 그 엄마의 얼굴과 똑같은 자기의 얼굴을 세상 모든 곳에 입히려는 마마보이의 의도다. 또한 엄마가 좋아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무서운 표정으로, 자신이 정신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 때 엄마가 자신에게 짓던 바로 그 표정으로, 배척하려는 귀신의 의도다.
아주 단적인 예로, 자식이 엄마의 세계관을 벗어나는 모종의 행위를 했을 때, 나아가 엄마의 세계관에 도전하기까지 하는 언행을 보였을 때, 엄마는 곧잘 이렇게 말하곤 한다.
"너 귀신 들린 것 같아. 엄마가 낳아서 엄마가 제일 잘 아는 그 아이가 아닌 것 같아 엄마는 무섭다."
그렇게 자신의 자기동일성 속에 편입되지 않는 것을 귀신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의 주인이 바로 귀신이다.
귀신의 시선은 차갑다. 존재를 심판하는 의도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선 앞에 노출된 이도 추워진다. 한기가 돈다. 섬뜩하다. 심판받는 이는 몸서리가 쳐진다.
그 심판이 웃으면서 이루어지기에 더욱 무섭다. 진실로, 웃는 귀신이 가장 무섭다.
폭력의 비극성은 폭력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피해자를 이내 가해자로 뒤바꾸는 폭력의 연쇄적 성질에 있다.
줄곧 유교적 가부장제의 피해자였던 엄마가 어느새 전체주의적 주체로 탈바꿈된 이것은 분명 비극 중의 비극이다.
전체주의가 전체주의를 연쇄하고, 귀신이 귀신을 연쇄한다.
죽은 자들은 득세하고, 산 자들은 갈수록 숨쉬기가 힘겨워진다.
추운 빙의기를 맞이하고 있다.
엄마에게,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아이처럼 보며 포용적으로 통합하려는 듯한 몸짓을 취하던 엄마와 같은 이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빙의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집단주의적 압박을 받으며, 개인들은 몹시도 추운 영혼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심판함으로써 무섭게 만들고, '너를 위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시킨 협박으로 사람을 통제하며, 정신적 성숙이란 기치하에 실은 더 많은 미발달 아동들이 조폭처럼 활개칠 수 있는 무대를 창조한, 바로 이것이 전체주의적 모귀(母鬼)가 현실의 겨울왕국에서 하는 일이다.
이 모귀에게 빙의된 이들은 똑같은 말을 한다.
"다 내 잘못이야. 다 내가 똑바로 못살아서 그래. 내가 잘못이다."
코로나가 퍼지는 것도 내 잘못이고, 집을 못사는 것도 내 잘못이고, 갈수록 사회적으로 무능력해지는 것도 내 잘못이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는 말이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이라는 말은 모든 것이 내 언행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잘못이라고 경험하는 자, 그는 누구인가?
바로 신이다.
귀신 중에 가장 높은 신이 되고자 하는 귀신은 그래서 "내 잘못이야."라는 영구히 반복되는 말 속에서 살아간다. 그 말을 포기하지를 못한다.
더 많은 이들에게 빙의되어 동일한 얼굴로 온 세상을 뒤덮으면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전체주의는 원래 신이 되고자 하는 기획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바벨탑과 같다.
다 함께 뭉쳐서, 더불어 결집하여, 엄마로 대동단결하고자 하는 이 의지는 사람들에게 쉽게 도전받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엄마'라는 단어 앞에서 사람들이 쉽게 약해진다. 엄마라는 말은 그 자체로 빙의작용을 너무나 간단히 허용한다. 빙의취약성을 강화시키는 최고의 기제라고 할 수 있다.
엄마를 신처럼 잘 모시는 일, 이것은 정신적으로 성숙한 이의 자격으로 권장되는 일이다. 존경스럽다. 존경스러운 아동이다. 그리고 이 아동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는 일이 바로 심리적 발달이라고 부르는 일이다.
그래서 심리적 발달은 존경의 일이 아니다. 존엄의 일이다. 남에게 존경받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를 존엄하게 세우는 길이다.
심리적 발달과 관련하여 아주 일상적으로 언급되는 개념이 바로 자존감이다.
자존감은 엄마를 신처럼 모시며 남에게 존경받을 잘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함으로써 세워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세워지는 것이다. 어떤 조건 속에서도 나의 온전함을 실감하는 그 감각이 바로 자존감이다. 때문에 자존감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잘못이 아니다."
이것은 "나는 신이 아니다."라는 말과 정확하게 동일한 말이다.
자존감은 자신의 능력을 키워 탑을 더 높이 오르면 언젠가는 신이 될 수 있다는 기획을 시작부터 거부한다. 자신의 언행에 따라 남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오만과 편견을 애초부터 기각한다.
그 대신에 자존감이 싹튼 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을 본다.
추운 날이 더욱 서럽도록, 아무 잘못도 없이 두들겨 맞고 있는 내 자신을 본다.
엄마를 신으로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돌팔매의 세례를 맞고 있는 가장 무고한 존재를 본다.
죽은 자들의 권위에 눌려 죄인이 되어 있는 산 자를 본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귀해야 할 것이 가장 비루한 것이 되어 있는 현실을 보게 될 때, 자존감은 스스로를 더욱 세우기 시작한다. 아스팔트처럼 갑갑한 빙의의 현실을 뚫고 내 자신을 바로 증명하기 시작한다.
"이 존재로 대지에 우뚝 서있는 내가 감히 누구인지를, 정신만 허공에 높이 떠있는 너희 귀신들의 종자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겨울왕국에서도 피어난 한 송이 꽃이라, 더 존귀하다.
포유류의 온기가 빙하기를 넘어섰듯이, 스스로를 귀신하지 않고 귀하게 하는 인간의 온기가 빙의기를 넘어설 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