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을 해소하는 열쇠

"의미"

by 깨닫는마음씨




번아웃(burnout)은 오늘날의 시대적 증세다.


이유없이 짜증이 나고,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지 않아 무기력해지며, 온갖 생각으로 늘 머리가 무겁다면, 그러한 까닭에 그저 아무 생각없이 볼 수 있는 콘텐츠를 찾아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배회하며 자신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망각하는 일을 시도하고 있다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 자신의 문제가 아니다. 시대를 체험하고 있는 것뿐이다.


번아웃은 왜 생기는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한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하고 싶지 않은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해도 의미가 없으니 하고 싶지 않아진다. 당연한 것이다.


우리 때는 하고 싶지 않아도 참으며 다 했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탁월한 꼰대정신으로 세대갈등을 촉발하는 이들이다. 늘 열려있는 태도로 살아가며 깨어있는 영혼을 대표하는 영원한 제임스 딘이라도 되는 양 자기를 간주하는 베이비붐 세대는 그 착각 속에서 이 시대를 지배한다.


그러나 공이 자기에게 올 필연만을 기다리면서 상대 골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며 '참고' 있는 말년병장과, 내일은 비가 오지 않을 행운만을 기도하면서 TBS 교육방송에서 가르친 청년생존술에 따라 동굴과 움막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몸을 웅크리며 '참고' 있는 만년백수와는 아무래도 참다의 의미가 참 다른 것 같다.


또한 그만큼이나 다른 것은 가치와 의미의 차이다.


가치는 집단주의적인 보편재고, 의미는 실존적인 특수재다. 쉽게 말하면, 가치는 남들 다 좋다고 하는 것을 나도 좋다고 하는 것이고, 의미는 나에게만 특별한 것이다.


그리고 번아웃은 무가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해서 생긴다.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번아웃은 나라고 하는 것을 상실했기 때문에 야기된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없으니, 내가 귀할 길이 없다. 아무리 해도 이 세상에서 내가 귀한 현실을 찾을 수가 없다.


나에게만 특별한 의미라는 것은, 나를 특별하게 해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는 나를 귀하게 해주는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의미있다고 느낄 때는 곧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할 때와 같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정말로 좋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이유 그 자체가 바로 의미다.


의미가 없는데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의미가 없는데 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하고 싶지 않은데 하고 있고, 살고 싶지 않은데 살고 있으니, 번아웃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의미를 무시하며, 심지어는 가치로 의미를 추방하며, 의미없는 현실 속에서 가치있는 자기를 주장하여 남들도 그렇게 살기를 종용하는 시대정신을 체험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들이 도취되어 온 가치에 입각해 실은 스스로의 무의미성을 소외시키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대신 느끼고 있는 것일 뿐이다.


가치는 집단주의적 행위로 실현된다. 국가를 위해, 동지를 위해, 가족을 위해, 라는 신성한 기치하에 무가치함은 용서되지 않는다. 가장 무가치하게 비난받는 것은 조금도 행위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공회전일지라도 톱니바퀴를 돌려야 한다. 그렇게 박카스를 복용하는 건실하고 열정적인 청년역할에 몰입하여 메소드연기를 통해 노오력의 증거를 보여주면, 살려는 드린다. 밥은 먹여준단다.


이 경우 "사람이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요."라는 예수의 말은 오히려 악용된다. 그러니까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들어 한 푼 두 푼 따지지 말고, 역사와 민족을 위해 가치있는 삶을 살라는 훈장님의 말씀처럼 인용된다.


사람이 이미 반듯하게 역사와 민족을 위해 살면, 까짓것 뜻있는 이가 어련히 알아서 좋은 일에 쓰려고 천 푼 만 푼 해먹는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냐고 되려 역정이다. 가치있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우리 XX 하고 싶은 거 다해."라며 허용되어야 한다는 이 논리는 재벌을 수호하는 논리로서나 그 재벌을 비판하는 운동권의 논리로서나 동일하게 작동한다.


이처럼 무가치하면 죽음과 다름없는 인생이고, 가치있으면 신처럼 다 허용된다니, 어떻게든 가치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를 힘쓴다.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다. 소확행으로 살짝 도피해보지만, 와인과 망고버터와 동태탕국물로 얼룩진 린넨테이블보를 세탁하는 일에도 힘이 쓰인다. 킨포크를 뒤적이는 일도 결국 남의 인스타를 감상하는 일만큼이나 자괴감이 든다.


대체 왜 뭔가를 하면 할수록 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증세는 정직하나, 이해는 정확하지 않다.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것이다.


아무리 가치있다고 평가되는 일을 해보아도, 무의미한 것이다. 아무리 가치있는 사람이 되려 해보아도, 무의미한 것이다.


집단주의적 소산인 가치만을 쫓고 있을 때 개인은 무의미해진다. 집단주의에 함몰되기 때문이다.


역으로, 집단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승인할 때, 그때 비로소 의미는 발견될 수 있다.


무가치한 자신을 위해 사는 일, 그것이 의미인 까닭이다.


의미는 내가 자신을 위해 살 때만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서 자신이라는 표현을 마음이라고 이해하면 정확하다. 의미는 나와 마음 사이에,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가장 내밀한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


집단주의는 나를 부정한다. 그러나 내가 없으면 마음은 살 수가 없다. 불이 없으면 가장 추운 한겨울에 새끼고양이가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동시에 마음이 없으면 나는 살 수가 없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불을 쬘 자가 없으면 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애초에 살 수 없는 것을, 살아야만 한다고 하니, 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이 여기에 있다.


살 수도 없는데, 살고 싶지 않기까지 한 것이 여기에 있다.


집단주의가 주관하는 쇼의 무대를 빛내기 위한 배경의 전신주처럼만 우두커니 선 채, 얼어죽어가는 새끼고양이들의 사체를 멍하니 지켜보며 속절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하던, 때문에 그러한 자신을 그저 망각하고만 싶던,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운명이 여기에 있다.


빛은 착취되고, 열은 소외되었다.


정말로 이 빛과 열을 전하고 싶었던 그것에는 결코 닿지 못한 채.


이 사실을 알았다.


가장 살리고 싶었던 것을 살리지 못한 채, 공허한 재로만 남은 그 위에 눈물이 떨어진다.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이 재를 뭉친다.


그러쥔 두 손처럼 가득 뭉쳐진 흙은 말한다.


"이제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야."


머지않아 씨앗이 날아와 흙에 뿌리를 내릴 것이다.


큰 나무가 되어 따듯하게 비를 피하고 안전하게 잠을 청할 집이 생길 것이다.


새끼고양이들이, 영원히 그 품에서 노닐 것이다.


눈물 한 방울에서 시작되는 회복이다.


자신이 지금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이로부터 시작되어 모든 것을 돌이키는 회복의 역사다.


나에게 가장 특별하고 귀한, 내 마음만을 위해, 의미있게 살아갈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번아웃의 해소는 이처럼 의미의 발견으로만 가능하다. 내가 정말로 살리고 싶었던 것이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바로 내 마음이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내가 잃었던 내 마음을 회복하고, 내 마음이 잃었던 나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의미는 마음과의 만남 속에 있다.


가장 사랑하던 내 마음이다.


그것만을 위해 산다.


살아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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