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식과 도덕적 우월감

"열등감에는 보상이 필요한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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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말해지는 시민의식은 민족과 영토를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에 근거한 근대적 시민의식이다. 그러니 이러한 시민의식은 필연적으로 이 민족과 영토에 흐르는 특유한 집단무의식적 문법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시민의식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그 문법이란 바로 도덕주의다. 도덕적 순결성 및 무오성에 대한 강박이다. 도덕적 완벽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모든 강박은 오류없는 완벽에 대한 강박인 까닭이다.


이 완벽에 대한 강박을 다른 말로 열등감이라고 한다.


열등하다고 경험하기 때문에 완벽을 꿈꾸며, 그렇게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에 도달하지 못하는 열등감은 커져간다.


이처럼, 한국형 시민의식을 키워가면 갈수록 실상 한국인의 열등감은 강화된다. 그리고 그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더욱더 목숨을 걸고 시민의식을 고취하려고 한다. 끝나지 않는 역기능적 순환인 셈이다.


한국형 시민의식, 곧 도덕적 완벽주의란, 한마디로 관계구조에 대한 헌신이다.


관계 속에서 그 관계의 대상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곧 도덕의 실현이며 진정한 인간성의 발현으로 평가된다. 위인전은 다 이렇게 살았다고 말해지는 도덕주의적 표본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헌신하는 도덕주의적 인간상은 일견 도덕이라는 표현처럼 겉으로는 아래에 서있는 겸손함으로 위장되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형 시민의식이 표출되는 경우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시민의식의 방향성은 계몽하는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도덕주의의 방향성은 가르치는 것이다. 즉, 도덕주의적 인간상은 위에서 가르치려는 오만한 의도 속에 있다.


그래서 도덕주의적 인간상은 늘 기만적이며 분열적인 특성을 갖는다. 남 아래에 선 겸손을 위장하여 은밀하게 남 위에서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열등감으로 가득한 이가 도덕적 우월감으로 자기를 무장해 스승질을 하려는 그 모습이, 한국형 시민의식이 실현되는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세간에 죄다 선비들과 훈장들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언행이 자유로운 연예인들조차도 요즘에는 자기가 얼마나 도덕적인지를 드러내며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드는 습성이 만연하다. 그만큼 이 사회에 열등감이 산재해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인생스승이 되기를 꿈꾸는 이 모습은 사실 심리적으로 미발달된 아동의 모습이다.


이러한 아동은 이 우주를 절대선과 절대악이 있는 이분법의 구도로 본다. 동지 아니면 적의 구도다. 그 구도 속에서 자기는 절대선을 체화한 도덕적 완벽주의의 산증인이 되기를 바란다. 유치한 흑백논리에 갇혀버린 것과 같다. 다른 말로는, 정상적인 발달과정에서 이루게 되는 발달과업의 수행에 실패한 것이다. 여기에서 발달의 지표는 물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유연성이다.


이처럼 미발달되어 아동기의 상태에 머무르게 된 이들은, 역설적으로 바로 그 상태 때문에 열등감을 갖게 된다. 자기는 도덕적 완벽주의의 구현자여야 하는데, 이른바 시대와 역사의 큰어른이어야 하는데, 실제 자기의 심리적 상태는 그에 비교하여 턱없이 유치한 듯하니 열등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이들은 자기의 심리적 미발달의 상태를 근본적으로 수치스럽게 여기며, 그에 대한 보상을 시도하게 된다. 과잉되게 예의범절을 차리고, 형식적 도의를 선보이며, 관계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식으로, 어른 흉내를 내게 된다.


이를테면, 선비처럼, 유교주의 훈장처럼, 법도를 따르는 인격자처럼, 자신의 미숙한 발달상태를 숨기기 위해 시대의 뜻있는 지사인 척하게 된다. 남들에게 쓰는 호칭도 무슨무슨 군 등과 같은 형식으로 점잖게 웃어른이 타이르는 듯한 말투를 쓰거나, 조선선비들을 흉내낸 서간체를 쓰기도 하며, 서로간에 호를 만들어 놀거나, 붓펜을 자주 이용하기도 하는 것이 이들의 특성이다.


즉, 미숙한 아동들이 자신의 열등감을 은폐하기 위해, 자기가 어른처럼 보고 있는 선비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발달심리학적 관점에서 말해보자면, 이상적 자아를 꿈꾸는 이들이 이러한 열등감을 형성하게 되는 경향성을 갖는다.


이상적 자아란 곧 유아적 전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자기가 울면서 똥을 싸면 그 앞에서 어른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자기를 위해 헌신하던 모습을 보며, 결국 자기를 신처럼 경험하게 된 그 자기감에 빠져 있는 것이 유아적 전능감이다.


그러나 유아적 전능감은 곧 자기를 위해 헌신해줄 대상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해지는 자괴감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열등감은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이 무력감에서 비롯한다. 때문에 유아적 전능감을 추구할 때 열등감이 형성되는 일은 필연이다.


이렇게 생겨난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그 유명한, 아들러가 말한, 병적 우월감이다. 이 병적 우월감의 대표적인 표현이 바로 도덕주의다. 상대로부터 열등감을 경험한 이가 그 상황 속에서의 자기의 선함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도덕을 무기로 씀으로써 오히려 상대보다 드높아지려고 획책한다는, 니체가 말한 원한감정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하나의 예로, 정신분석에서의 성공여부는 내담자의 이상적 자아를 얼마나 잘 해체하는가에 달려 있다. 내담자가 유아적 전능감의 상태를 지속하려는 일을 포기하고, 현실적인 유연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분명 정신분석의 한 목표다. 즉, 허공에 둥둥 떠있는 유사-신의 상태에서 인간이 되어 땅에 내려오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하자면, 한국형 시민의식이 지향하는 이상, 즉 도덕주의를 통해 인간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주의를 벗어날 때 인간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주의가 목표로 하는 것은 유사-신이지, 결코 인간이 아니다. 도덕주의적 인간상인 유사-신을 마치 진정한 인간인 것처럼 주장할 때, 그 목소리는 그대로 인간을 짓누르고 괴롭히는 폭력이 된다.


그래서 결국 유아적 전능감을 열등감으로 그리고 병적 우월감으로 뒤바꿔낸 이들이 매진하게 되는 활동은, 도덕주의적 잣대를 들이밀어 타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이다.


오늘날 정치가 종교화된 사회의 모습이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미발달상태의 아동들이 위정자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그러한 이들은 인품있게 정도를 걷는 선비어른을 연기함으로써 자기의 열등감을 도덕적 우월감으로 해소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선비어른을 흉내내는 아동을 따라서 또 다른 아동들이 그 모습을 모델링해 흉내내게 된다. 모방품을 복제해낸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한국형 시민의식이다.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라는 말처럼, 열등감을 도덕주의로 보상하려는 일은 위에서와 같이 아래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심리학적 발달의 지표란 곧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유연성이다.


이 말은, 개인은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발달해나간다는 것이다. 즉, 개인은 유아적 전능감에서 벗어남으로써 표현 그대로 발달해나가는 것이다.


자신이 신이 아니라는 것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않고 또 무오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은 절대선도 아니며, 자신이 도덕적이라고 자신이 더 인간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이 아동이라는 심리적 사실에 대해, 이득처럼 보이는 유아적 전능감은 유지하면서, 유아이기 때문에 경험되는 열등감은 회피하려는 일거양득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제가 바로, 도덕의 권력화다. 이 도덕의 권력화의 기제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또한 한국형 시민의식이다.


이러한 한국형 시민의식이 만연한 현실이란 곧 미발달된 아동들이 득세하는 현실이다. 네 앞에서 똥을 싸는 나를 신으로 섬기라며 우렁차게 울부짖는 현실이다. 참피[실장석] 같은 현실이다. 참 피하고 싶은 현실이다.


'한국형 시민의식'이라는 표현에서, '한국형'이라는 단어를 거세해보자. 그러면 도덕주의가 함께 거세된다. 한국적인 것이라는 말은 언제나 도덕주의에 대한 뜻이기 때문이다.


도덕주의가 극복될 때 시민의식은 정말로 자각될 수 있다. 도덕적 완벽주의의 강박에서 벗어난 개인은 열등감에서도 함께 벗어나게 된다. 그러니 병적 우월감을 형성해야 할 필요가 사라진다. 누가 누구보다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는 식의 흑백논리가 붕괴된다.


그리고 개인들만이 그 자리에 남는다. 한 개인이 인간의 대표자로 서서 또 다른 개인을 마찬가지로 인간의 대표자로서 존중하는 현실, 이것이 시민의식이 정말로 출현해 작동하는 현실이다. 이처럼 굉장히 고급스러운 현실이, 아동의 유치한 도덕주의적 현실로 촌스럽게 환원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비극이다.


열등감은 보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열등감은 그 원인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도덕적이어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식의, 실은 유아적 전능감을 추구하기 위한 기만적 의도를 포기해야 열등감이 사라진다. 즉, 미달발된 아동의 모습을 고집하는 일을 그만 멈추어야 열등감이 사라진다.


미발달된 아동의 대표적인 특성이 도덕주의다. 도덕주의를 지속하는 한 아동은 그대로 열등한 미발달의 상태로 남는다. 도덕주의에 시민의식이라는 외연을 입혀 사회적으로 도덕주의를 계몽하는 일을 지속하는 한 그 사회는 그저 열등감만 넘쳐나는 미숙한 사회로 남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개인이 결코 열등하지 않다는 자기확인이다.


그 확인을 이루는 법은, 내 자신이 다른 이에 대해 갖는 도덕적 우월감이 실은 상대에 대해 그 어떤 우월한 요소도 실제적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내 자신이 그보다 도덕적이라고 해서, 내 자신의 삶이 더 충만해지는 것도 아니고, 그의 삶이 더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술적 사고다.


도덕주의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살게 되는 현실일 뿐이다. 왜냐하면 비교를 해야만 자신이 도덕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렇게 비교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니 열등감은 필연적으로 귀결된다. 그러한 현실은 오히려 자신이 늘 열등하도록 정해져있는 현실과 같다.


더 근본적으로는, 도덕적 우월감의 의도로 행해지는 도덕주의적 실천으로는 사실 말 그대로의 선함을 이룰 수도 없다. 선함이라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월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수단이 된 까닭이다. 그러니 이미 남보다 선함의 차원에서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자체가 사라진다.


이처럼 도덕적 우월감은 우월성을 획득하려는 그 목적에 있어서도 이미 무용하다. 무용한데다가 심지어는 역으로 자신을 더 열등하게 만드는 기제에 불과하다면, 더는 이것을 지속해야 할 이유란 없다.


그렇게 도덕적 우월감의 무용성을 이해하고 이를 그만두면, 자연스럽게 열등감이 사라진다.


한국형 시민의식을 그만두면, 개인의 시민의식이 개화된다.


미발달된 아동이기를 그만두면, 어른이 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이다.


당연하게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기에 그 기준에 따라 열등하지도 않은 것이다.


당연하게 인간은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않기에, 또 열등하지도 않기에, 인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 인간은 열등감을 보상받아야 할 도덕주의의 현실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탁월한 그 능력으로 자신의 이 현실을 살아간다.


심리학적 발달의 지표로서 말해질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유연성, 다른 말로는 바로 사랑이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의 놀라운 능력을 자각해가는 것을 곧 발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사랑이 있어서 보상이 필요없다. 보상될 것도 없다. 사랑이 인간에게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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