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일진에 대한 환상

"노예의 신화를 진정한 인간의 이야기로 보급하는 아동들"

by 깨닫는마음씨




우리가 전체주의 시절로 돌아가면 안된다고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 전체주의에 맞설 우리 시민 개개인의 힘을 보여주자고 윤리를 주장하는 이, 그가 바로 전체주의의 선동가다.


자신은 지금 나쁜 전체주의가 아니라 착한 전체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일진에는 나쁜 일진과 착한 일진이 있다는 이야기와 동일하게 질 나쁜 환상이며, 젤 나쁜 환상이다.


탱크로 밀어붙이는 일이든, 집단의 세로 밀어붙이는 일이든, 동일한 위력의 폭력인 까닭이다. 이 폭력의 집행자가 바로 일진이라는 이름으로 비유될 수 있는, 동일성의 확장을 꿈꾸는 자아다. 곧,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모습대로 세상을 통제하여 조종하고 싶어하는 독재적 자아다. 타노스나 아이언맨이나 똑같이 이 독재적 자아의 모습을 반영하는 캐릭터들이다. 모든 이를 자기 자아의 복사판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전체주의의 화신들이다.


이 자아팽창의 의도를 이루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바로 이야기다. 프로파간다는 이야기로 실현된다. 특히 영웅신화의 모습을 갖는다. 신성한 이야기다.


그래서 이러한 자아팽창의 의도를 가진 이들은 그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늘 이야기를 신성화한다. 이야기 자체에 인간을 변화시킬 신비한 힘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우상화한다. 주술적인 사유다. 언어에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그 언어를 유려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을 얻으면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 아이의 망상과도 같다. 시크릿과 같은 동종주술의 지루한 변주들일 뿐이다.


실존적 언어 이해에서, 언어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다. 혹여 언어가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그 언어를 지금 발화하는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힘찬 삶의 결과로서 그러한 언어가 힘차게 발화되는 것뿐이다. 즉, '말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누가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조직된 이야기는 세뇌와 최면, 그리고 선동을 위한 아주 효과적인 도구다. 이러한 목적에 봉사하는 순간이, 언어가 언어 자체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순간인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려는 순간이다.


집단망상을 구성하려는 순간이다.


우리가 언어를 절대화하여 이야기를 생산하는 거의 모든 방식이 이 기만의 목적에 쓰인다. 이로 인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발명품 중의 하나인 언어는 그 빛나는 위상을 잃고, 인간이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회피하기 위해 동원하는 미학적 합리화의 도구로 전락한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에 언어는 자기기만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그 순간 언어 자체만으로의 힘을 갖는다.


자기기만을 위해 인간은 삶을 버리고 언어에만 위탁해버리며, 또한 삶에서 등을 돌린 채 마법주문처럼 언어를 신앙하게 된다.


그러니 언어가 힘이 있는 것처럼 경험될 수밖에 없다. 아니, 힘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외시킨 그 처절한 보상으로 유일하게 얻어야 하는 것이 언어의 세계인 까닭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제 자신의 삶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이들의 귀에 잘 들리도록 언어는 말해지며,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신화가 탄생한다. 자신의 삶 대신에 소비할 수 있는 영웅은 거듭 창조되며, 자신의 현실 대신에 추구할 수 있는 가상현실로서의 영웅신화는 끝없이 복제된다.


'조금 더 변화된 내가 되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


이러한 의도를 담고 있는 모든 이야기는 신화다.


그리고 모든 신화는 이념[이데올로기]을 품고 있는 이야기다.


특정한 자아가 주창하는 이념의 전파가 곧 신화가 소비되는 목적이다. 보편적 이념은 신화를 통해 개인들에게 주입되어 개인들의 내면에 구체적 신념으로 자리잡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특정한 자아의 이념은 보편성의 외피를 뒤집어쓴 채, 그 보편성을 쐐기로 삼아 불특정다수에게 바이러스처럼 전염되어, 마치 원래 그 개인들의 것이었던 양 개인의 내면에서 신념체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신념화된 개인은 이제 자신의 신념을 신앙하게 된다. 자기숭배의 현상인 동시에, 자기 안에 내사된 그 특정한 자아에 대한 숭배의 현상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대중매체들을 통해 세간에 널리 퍼진 '나의 신화'의 출현이다. 모든 히어로물은 다 이 '나의 신화'를 주제로 한다.


이러할 때, 개인에게 있어 자기와 타인이 서로 다른 방식을 취하지만 궁극적으로 진정한 방향에 있어 동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경험된다. 올바른 이념에 따라 진정한 길을 저마다 개성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동시에 함께 가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내가 나를 향해 가는 이 진정한 길을 남들도 같이 가고 있다니,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우리 모두가 함께 올바른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소속감 및 유대감이 생겨난다. 인류는 희망적이다. 미래는 낙관적이다. 내 삶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신화적 이야기로 만들어진 동일한 자아의 망상에 다 함께 취해 있는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다.


즉, 나의 신화를 신념으로 신앙하는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다.


그런데 이야기 안에서 이야기에 취해 있는 이에게는 그것은 전체주의가 아니라, 마치 강하고 따듯한 영웅의 면모처럼 경험될 것이다. 이제야 찾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처럼 경험될 것이다. 소위, 착한 전체주의와, 착한 일진과, 착한 조폭과, 착한 건달과, 착한 깡패의 개념은 이러한 방식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아무리 언어적으로 '착한'이라는 관형사를 넣어 수식한다고, 폭력이 폭력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착한 사기, 착한 공갈, 착한 착취, 착한 집단따돌림, 착한 겁탈, 착한 담배빵, 착한 갈굼, 착한 폭행, 착한 조롱, 착한 강도살인, 이 모든 언어의 창조 및 소비는 그저 분열된 정신증의 징후일 뿐이다.


더 구체적으로 탐구해볼 수 있다.


나의 신화를 만드는 신화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신화인 영웅신화란 곧 착한 일진의 신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착한 일진의 신화는 대체 왜 생기는 것일까?


아이의 분열된 욕망이 착한 일진을 꿈꾸어낸다고 할 수 있다.


1. 힘을 갖고 싶다.

2. 엄마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다.


이 두 방향성으로 드러나는 욕망은 아이에게 모순처럼 경험된다. 힘을 가지면 엄마가 이제는 귀엽게 예뻐해주지 않을 것 같고, 그렇다고 엄마에게 재롱둥이로 남으면 자신이 너무 무력한 존재가 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모순 속에서 분열된 아이는 머리를 굴려 통합책을 찾아낸다.


그것이 바로 힘을 가진 일진이면서도, 엄마가 좋아하는 '착함'의 가치를 충족시켜줄 '착한 일진'이다.


아이가 아이의 수준에서 생각해낸 이 조잡한 통합책은 그러나 거의 평생 동안 의지할 가장 교훈적인 인생방침처럼 작동한다.


왜냐하면 이 아이에게는 엄마에게서 독립한다는 발상 자체가 부재한 까닭이다. 물론 실제의 생물학적 모친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아이는 생물학적 모친 대신에 자신을 위탁할 모성적 대상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배우자, 스승, 친구, 동료, 팬, 지지자, 애독자 등, 다양한 대상들에게서 자신을 우호적으로 바라봐줄 엄마의 시선을 기대한다.


즉, 자신을 '착한 일진'으로 알아봐줄 시선을 기대한다.


"힘도 있으신데 친절하기까지 하시네요."

"불의를 용서하지 않으시지만, 내 사람에게는 한없이 따듯하실 것 같아요."

"이렇게 똑똑한 분이 정의감도 있고 또 약한 사람을 배려도 할 줄 아시는군요."


이러한 평가를 받는 인물상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대중매체에서 '아이를 지키는 선량한 눈을 가진 철갑옷의 남자'로 형상화된다. 강하고 단단한 껍질은 '일진'의 속성을 대변하며, 그 갑주 안에 있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눈빛은 '착함'의 속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무협지들에서 자주 묘사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싸움이나 일삼는 건달이지만 실은 그 가슴은 아주 상냥한, 마치 인간을 향해 드높은 진정성을 고귀하게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이처럼 착한 일진이란 곧, 도덕주의적 신념으로 무장한 깡패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깡패의 폭력성은 도덕주의적 신념에 의해 미화된다. 즉,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약한 서민들을 지키기 위해서인데, 돈많은 놈들이 가진 뉴욕 빌딩들은 좀 박살나면 어떠냐는 식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자면, 착한 일진이란 곧 도덕주의적 신념만 방패로 들고 있으면 무엇이든 자기 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아이의 유아적인 망상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말들을 하곤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야, 길동이는 싸움도 진짜 잘하면서 약한 애들 안 괴롭히지 않냐? 존나 착해."

"그때 옆반 순신이 와서 깽판칠 때 길동이가 우리반 애들 보호해줬잖아. 존나 멋있어."

"길동이는 그냥 애들한테 장난치는 거 좋아하지 나쁜 짓 안 하잖아. 존나 인기많을 거 같아."


누군가는 분명 길동이의 셔틀이었고, 누군가는 길동이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했으며, 누군가는 길동이가 노려보는 눈빛 앞에서 실실 웃으며 아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모조리 은폐된 채, 길동이는 모든 영광을 다 누리는 연예인이 되어 있었다. 그와 같이 착한 일진의 신화만 소비되고 있었다.


길동이가 마치 자기만의 신념을, 이른바 도덕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일진을 일진으로 보지 못한 채 그 폭력성은 망각되어 있었다.


나아가 길동이가 가진 도덕주의적 신념의 정체, 즉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는다.'라는 그 신념의 정체 또한 실은 아주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길동이는 학급의 모두를 자기 밑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자기와는 결코 동격의 위상이 될 수 없는 존재로 보았기에, 소위 자기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인간 이하의 것으로 보고 있었기에, 길동이는 아이들을 굳이 괴롭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길동이는, 아이들을 못나고 약한 존재로 대상화하고, 동시에 그 아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강한 존재로 자기를 위치지음으로써, 자기 엄마에게 착한 일진으로 인정받고자 했던 것이다.


"아유, 우리 아들이 어느새 이렇게 다 커서 대견하게 착한 일진이 되었구나. 엄마는 자랑스러워."


"클라크, 엄마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강한 힘과 친절한 마음을 가진 네가 늘 자랑스럽단다."


"토니, 나는 알고 있어요. 퉁명스럽고 거친 당신의 갑옷 안에는 누구보다 부드럽고 따듯한 가슴이 있다는 걸."


"브루스, 당신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당신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간직한 진정한 영웅입니다."


다 같은 말이다. 영웅이라는 이름의 일진의 신화를 추구하는 아동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바로 그 말이다.


발달이 미숙한 아동의 상태일수록, 이 일진의 신화에 쉽게 빠져든다. 힘센 정의의 깡패들이 자기를 지켜주기를 꿈꾸게 되고, 나아가 자기가 그러한 정의의 깡패가 되어 자기 같은 약한 아이들을 지킬 수 있기를 꿈꾸게 된다.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아동일수록 이 일진의 신화에 더욱 잘 몰입한다. 왜냐하면, 물리적 힘이 약한 아동이 자신의 신체적 조건을 보상하기 위해 책을 읽고 정보를 모으며 지성적 능력을 얻고자 한 그 결과가, 자신의 똑똑함이 무기라고 간주하게 된 아동의 상태인 까닭이다.


즉, 이러한 아동은 힘에 대한 열등감을 크게 느끼며, 그만큼 힘에 대해 집착하게 된 아동이다.


그래서 힘센 깡패들이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바꿔가는 류의 이야기는 이 아동들이 열광해 마지않는 이야기다. 특히 아이언맨처럼 지성적 능력도 있으면서 물리적 위력도 겸비한 캐릭터는 이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깡패모델이 된다.


이처럼 정의의 일진들이 약한 이들을 도우며 신념 있는 협객 행세를 하는 삼류스토리는 늘 이 땅에서 사랑받아온 이야기다. 나아가 이러한 협객의 모습은 진정 인간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도덕주의적 선비의 외현으로 포장되기까지 함으로써, 선량하고 아름다운 일진의 신화는 의무교육과정의 교과서에도 쾌히 등재될 만큼의 고귀한 미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 어떤 언어적 수사로 포장한다 해도, 영웅신화의 본질이 폭력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신화구조 속에서 영웅을 영웅으로 만드는 핵심적인 기제는 단 하나다.


그것은 바로 갈등이다.


쉽게 말하면, 싸움이다. 그래서 영웅은 늘 싸움판을 만든다. 영웅 주위에는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갈등과 불화가 꽃을 피운다. 그래야만 영웅이 영웅일 수 있는 까닭이다.


갈등이 있어서 영웅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역으로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가 영웅이 되기 위해 갈등을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영웅은 그 자체로 영원한 싸움의 현실을 촉발하는 폭력성의 상징이다.


그래서 자연세계에는 영웅이 없다. 영웅이 필요없다.


자연세계는 자연스러워서, 유체가 성체가 되는 일은 표현 그대로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독립적 힘은 갖고 싶으면서 엄마에게는 계속 사랑받으려 하는 아동 상태를 지속하고자 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늘 엄마와 같은 대상에게 위탁하여, 존재에 대한 책임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존재를 통한 이득만을 자기가 얻어내고자 한다. 이러한 전략적 게임을 지속해야 두렵지 않다.


여기에는 분명하게 두려움을 거세하고 안정을 제공하는 소재로서의 아버지의 부재가 놓여 있다.


상실한 부성을 대신하고자 소비되는 것이 또한 신화다.


신화가 내포하는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곧 로고스의 반영이다. 전통적으로 부성으로 상징되는, 질서를 제공하는 힘이다. 그래서 이념은 부성의 대리물이라고 할 수 있다. 든든한 아버지가 없어서 두려움을 느끼는 아동은 마찬가지로 자기의 안에 부성의 원리로 내사된 신념이 없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도덕주의적 신념을 가진 착한 일진이라는 것은, 자기를 두려움에서 구원해줄 부성과 같은 내적 성분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동시에 그 모습은 마찬가지의 원리로 자기의 엄마를 두려움에서 구원할 수도 있는 바로 그 모습이다.


그렇게 착한 일진으로 비유되는, 힘을 가지면서도 엄마에게 사랑받는 인간상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엄마가 좋아할 이상적인 남편상이며, 그래서 자기에게도 이상적으로 보이는 남성상인 셈이다. 착한 일진에 대한 추구는 곧 자기 엄마를 만족시켜줄 힘있고 자상한 남성상에 대한 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도덕주의적 언어로 반듯해보이게 만들어낸 진정한 신념을 품으면 품을수록, 그 남성상에 가까워진다고 아동은 생각한다. 그 과정을 진정한 자신이 되는 길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엄마가 정좌해있다. 진정한 그 무엇이든, 그저 다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고 있는 종속의 행위일 뿐이다.


이러한 아동들은 전형적으로, 이 세상에서 끝없이 부모와 같은 대상들을 찾아다닌다. 그 대상들의 언행을 작위적으로 이념화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부에 정착시킬 신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언제라도 자기를 지켜볼 것 같은 가상의 엄마의 시선 속에서, 그 신념의 수호를 지상과제로 삼아 자신의 영웅성을 증명해내고자 한다. 엄마에게 이제는 착한 일진이 되었다는 그 절대적 평가를 얻어내기 위해 전력으로 매진한다.


혹여 '나의 신화'를 이루는 그 과정 속에 자신의 신념이 깨지면, 즉 엄마가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된 임의적인 부성이 깨지면, 마치 영웅적 방황과 절망이라도 경험하는 것처럼 통속적 연극을 하다가, 다시 엄마가 만족할 만한 새로운 신념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궁극적으로 찾아올 엄마의 긍정적인 평가를 기대하며, 자기 안에서 이상적인 부성을 창조해내는 일을 '나의 신화'를 이룬다는 미명하에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아주 쉽게는, 엄마의 마음에 쏙 들 아빠의 모습을, 자기의 삶으로서 조형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상적인 아빠로 살려고 시도하는 종속의 삶을 또한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라고 신화를 창작하여 보급한다.


착한 일진의 신화를 보급한다.


노예의 삶을 보급한다.


이 모든 것이, 힘있고 싶으면서 동시에 엄마에게 계속 예쁨받고 싶은 아동들이 그 욕망의 모순 속에서 만들어낸 조잡한 통합책의 전모다.


영웅신화를 소비할수록 우리 자신이 영웅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것처럼 언어를 우상화함으로써, 자신과 세상 사람들을 모두 기만해 다 같이 힘들게 노예로 살게 하고자 하는 바로 그 의도의 전모다.


착한 일진이 만들어가는 착한 전체주의의 결과는 이처럼 언제나 다 같이 힘들고, 더욱 힘든 현실이다.


왜 그런가?


착한 일진을 꿈꾸어낸 그 아동 자신이 힘들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노예의 삶이 힘들기에, 그것을 신화로 바꾸어, 언어적으로 기만해, 마치 좋은 이야기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급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신화를 소비하게 함으로써, 자기의 인생이 잘못되지 않은 것처럼 경험하고 싶은 까닭이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전체주의의 이득은 죄책감의 희석이며, 나아가서는 망각이다.


실존심리학에서 죄책감이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다.


자기가 노예로 살고 있을 때, 자신의 존재감이 스스로에게 위탁되어 있지 않을 때, 그래서 무엇인가 잘못 살고 있다고 느껴지는 그 감각이 죄책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노예는 이념의 노예다.


내면의 아버지를 붙잡음으로써, 어머니에게 붙잡히고 싶은 그 노예의 상태다.


이념을 내사해 자신만의 고유한 신념을 만들어 그 신념으로 살아가는 상태란, 바로 이처럼 자기가 자기를 노예화하고 있는 상태다.


이것이 가장 절망적인 이유는, 자기가 자기를 노예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웅이란 자기가 자기를 노예로 대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묘사다. 영웅신화란 자기가 자기를 노예화하는 현실에 대한 언어적 미화의 이야기다. 그렇게 미학적으로 미화하지 않고서는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 없는 성질의 이야기다.


왜 힘든가?


답이 당연하다.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의 신화'를 신앙하는 자기의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힘든 노예의 삶을 신화로 만들어 보급한다고 자기의 삶이 힘들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즉, 남들에게 힘겨움을 전가한다고 자기의 힘겨움이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힘겨움이 단지 배가 될 뿐이다.


"그래도 좋아. 나만 힘든 건 싫으니 다 같이 힘들었으면 좋겠어."


영웅신화를 보급하는 아동들의 진실된 목소리는 차라리 이렇게 흘러나오는 편이 낫다.


청소년상담에서 소위 폭력을 행사하다가 상담에 의뢰된 일진들에게서 이 목소리가 토해지면, 상담은 성공적이다.


그는 지금 자기가 정말로 힘들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중인 까닭이다.


그럴듯한 언어로, 아름다운 이야기로, 놀라운 신화로, 진정한 신념으로, 성실한 신앙으로, 그 모든 행적들로 철저하게 망각하고자 했던 고통이 이제야 더는 망각될 수 없는 차원으로 드러나고 있는 중인 까닭이다.


독립적인 힘을 갖고자 하면서 엄마를 만족시켜주는 예쁜 아이로 남고자 하는, 곧 엄마[여성]에게 진정한 남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그 욕망이, 바로 자신의 모든 힘겨움의 이유라는 것을 이제 눈치채고 있는 중인 까닭이다.


나는 신화가 아니다.


나는 내외적으로 약한 대상을 설정함으로써만 그 앞에서 구현될 수 있는 영웅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외적으로 약한 대상에게 친절하게 웃어주는 상대의 미소를 대상화해 설정함으로써만 그 앞에서 존립될 수 있는 아동이 아니다.


자기라고 하는 내적 대상 그리고 상대라고 하는 외적 대상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얻으려고 하는 이 길이 영웅신화의 길이며, 착한 일진의 길이다. 비유하자면, 계속 아이이고자 계속 부모이기 위해, 영영 아이를 부모에게 붙들어매고 부모를 아이에게 붙들어매는 노예의 길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를 자기에게 붙들어매는 자기구속의 길이다.


나의 길은 아니다.


나는 길이 아닌 까닭이다.


그 모든 진정한 신화적 이야기에서, 그 모든 진정한 노예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나는 자유다.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신화가 보급하고자 하는 신념이 없는 상태가 바로 자유다.


착한 일진을 꿈꾸는 아동들은 자신이 이미 자유로운 이 상태를 오히려 두려움으로 경험함으로써, 두려움을 봉쇄할 진정한 신념을 창작해내, 스스로 그 신념의 족쇄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처럼 자유가 두려움으로 경험되는 이유는, 엄마에게 혼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엄마가 좋아할 이상적인 아빠의 모습이 아니면 엄마가 비난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엄마가 좋아할 법한 모습이 되려고 하는 이 '나의 신화'가 만들어낸 신념이 창출하는 것은, 착한 일진이라는 표현만큼이나 판타지적인 개념인 자유로운 노예일 뿐, 자유는 아니다.


그러니 착한 일진이라고 하는 노예의 신화를 나라고, 자유라고, 진정한 인간이라고, 거짓을 말하며 보급하는 대신에, 그러한 전체주의의 야망을 갖는 대신에, 그저 아빠를 대신해 영원히 엄마에게 사랑받을 착한 아이가 되자고 말하는 것이 낫다.


나에게는 그러할 자유도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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