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옳은 쪽에 있다"
어떠한 사상에 대해 정치적 방향성을 가지면 왼쪽이라 칭하고, 종교적 방향성을 가지면 오른쪽이라 칭한다.
이를테면, 헤겔의 사상에 대해 입장을 형성한 세력들 중 마르크스나 포이어바흐는 헤겔 좌파라 불릴 수 있고, 키르케고르는 헤겔 우파라 불릴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존주의에도 양 방향성의 세력들이 있다.
아마도 실존주의 좌파로 분류될 수 있는 이들은 사르트르와 카뮈 등을 들 수 있을 것이고, 실존주의 우파로는 니체, 키르케고르, 마르셀, 하이데거, 야스퍼스, 베르자예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상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실존주의 좌파는 실존주의의 종말에 전폭적으로 기여하는 자멸적 행보를 보였다. 실존주의가 마르크스주의로 흐르게 되었을 때, 이는 자신의 대립항인 '구조' 앞에서의 '실존'의 몰락을 의미했다.
공교롭게도 사르트르와 카뮈의 문학적 작품들을 통해 실존주의가 널리 알려진 나머지, 우리는 실존주의가 정치적 지향으로 흐르는 과정을 지켜보며, 실존주의에 대해 마치 개개인이 건강한 주체로 선 다음에 공동체 속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참시민을 묘사하는 개념처럼 인식하게 되기도 하였다.
쉽게 말해, 부조리에 대한 저항의식과 인간에 대한 윤리적 자세로 투철한 무슨 운동권 투사처럼 사는 일이 실존적으로 사는 일인 것처럼 간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이것은 실존주의의 종말이었다.
이 좌파의 방향성으로 흐른 실존주의는 자기부정의 논리로 모조리 사멸하였다.
실존의 의미를 더욱 꽃피워 발전되고 지속된 것은 실존주의 우파다.
종교적 지향을 가진 실존적 사유들만이 살아남았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실존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키르케고르의 기획 자체가 종교적 방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방향성이란 애초 정치와 정확하게 선을 긋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경계는 엄격하다. 그 어떤 정치적 기획도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없다. 그 어떤 정치적 현실 속에서도 인간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정치는 결코 죽음의 문제에 응답할 수 없다.
이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이들은, 대표적인 세계종교의 시조들인 붓다와 예수였다. 그래서 그 둘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정치와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단 한 꼭지라도 자신이 정치적 지도자로 평가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아주 쉽게, 붓다는 민주주의의 선구자가 아니었고, 예수는 민주주의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다만 이 둘은 말한다.
"나는 왕이 아니다."
이 말은, 자신들은 왕권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들이 정치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오히려 이들은 정치를 벗어난 자리에 개인의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이들은 인간이 집단적 구조 속에서만 자신이 온전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비루한 현실로부터 해방되어, 그 어떤 집단논리에 복속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이미 온전한 현실을 개방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즉, 이들은 그 어떤 건강하고 아름다운 정치구조일지라도, 그 구조를 인간의 실존 위에 위치시키려는 일을 절대적으로 거부했다. 만약 붓다와 예수가 지금 이 시대에 활동한다면, 무슨 만능해법[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지극히 우상화되어 있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환상은 이들에게 가장 먼저 기각될 환상이다.
그래서 붓다와 예수는 결코 좌파가 아니다. 오히려 우파다.
그리고 실존주의 또한 이와 같다.
실존주의는 근본적으로 오른쪽을 향한다.
정치적으로 왼쪽을 향하는 진보경향적인 언행이 실존주의적인 것처럼 생각되는 오해는 말 그대로 오해다. 정치적인 왼쪽에는 애초 실존주의가 설 자리가 없다.
그렇다고 실존주의가 정치적으로 오른쪽을 향하는 것 또한 결코 아니다. 실존주의는 정치적 왼쪽보다 정치적 오른쪽을 더 싫어한다. 그쪽에는 실존주의가 설 자리가 더욱 없다.
정치적 왼쪽은 하부구조를 강조하고, 정치적 오른쪽은 상부구조를 강조한다. 각각 자기들이 강조하는 부분이 더 힘을 얻어야 사회가 안정되고 발전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렇게 그 둘은 똑같이 '구조'에 대한 강조일 뿐이다. 그리고 이 구조라고 하는 것은 실존을 부정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어느 쪽을 향하든 그것은 실존주의의 종말이 된다.
실존주의는 분명 아래로부터의 반역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진보경향성과 동일한 것처럼 자주 착각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왼쪽이 추구하듯이,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에 반역하는 것이 아니다.
유기체적 개인이 군집적 집단에 반역하는 것이다.
하나의 생명(life)이 통합적 계(system)에 반역하는 것이고, 주관적 사실이 객관적 허구에 반역하는 것이며, 곧 실존이 구조에 반역하는 것이다.
반역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구조에는 개인을 구원할 수 있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데도 답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우상화해 인간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절대적인 것을 흉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는 일찌감치 정치에는 답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어떤 정치도 개인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응답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붓다가 출가한 그 이유고, 예수가 광야로 나간 그 이유다.
이들은 제일 먼저 정치에 씌워진 우상의 가면을 벗겨내고, 정치를 다만 정치로 두었다. 나쁜 우상을 좋은 우상으로 바꾼 뒤, 그렇게 좋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 민주주의라고 외치는, 오늘날 정치판에서 자주 벌어지는 일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붓다와 예수는 정치와 종교의 자리를 서로 분명히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정치가 가장 문제가 될 때는 정치가 종교의 자리에 대신 앉아 있을 때다. 정치적 이념이 신앙이 되고, 정치적 방법론이 율법이 되어, 사람들에게 종교와 같은 권위를 행사할 때다.
소위, 정치병이라는 것은 종교화된 정치가 야기하는 증상이다. 정치병자란 곧 종교화된 정치의 광적인 신도를 일컫는 표현이다.
현대에서 가장 대표적인 우상화의 현상이 바로 이 정치의 종교화다.
우상이 비판되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판단이 아니라 기술판단이다.
정치는 절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또는 이 모든 것은 대체 왜 이렇게 일어났는지,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어디인지, 그리고 인간이란 존재가 대체 무엇인지, 이 모든 종교적 물음들에 대해 정치는 절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는 인간의 속성이 바로 종교성이다. 틸리히는 종교성을 곧 궁극적 관심이라고 부른다. 정치는 그 자체로도 우리의 궁극적 관심이 될 수 없을 뿐더러, 궁극적 관심에 대한 입장 또한 한없이 무력하기만 하다.
정치적 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의무교육의 교과서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아무리 교과서들을 뒤져도 거기에는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
정치에는 진실로 답이 없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에 대한 답이 없다.
이처럼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향한 궁극적 관심 속에서 질문하는 일이 바로, 전술한 것처럼 '아래로부터의 반역'이라고 부르는 일이다. 그것은 구조가 임의적으로 만들어내 세뇌시키려고 하는 가짜 답을 기각하고, 진짜 답을 향해 스스로 물으며 배워가는 그 과정이다.
이것이 곧 종교적 길이며, 또한 실존적 길이다.
이 길은 오른쪽으로 나있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다시 한 번 오른쪽을 향한다.
정치적 왼쪽과 정치적 오른쪽을 합쳐 '왼쪽'이라고 칭할 때, 실존주의는 왼쪽을 벗어나 오른쪽을 향한다.
진짜 답을 찾으러 간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오른쪽의 방향성이 제도종교의 그것이 아님은 또한 분명하다. 제도종교 또한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오른쪽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왼쪽이다.
종교성은 제도종교와는 변별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개인의 심층적 체험, 즉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영성이라고 부르곤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실존주의적 영성이라는 표현은 가능한 표현이며, 또한 기능하는 표현이다.
이 실존주의적 영성의 특징은 사실적이라는 것이다. 사실을 중시한다. 영성이라는 표현이 통상을 넘어 통속으로 흐를 때, 그것은 온갖 환상적인 작용들을 그 단어 속에 함의시킨다. 초자연과 초현실에 대한 유아적 망상에 가까운 요소들이 그 안에서 넘실거리게 된다.
이를테면, 심령현상, 초능력, UFO, 사이비역사, 황홀경, 전생체험, 방언, 빙의, 환각, 유체이탈, 자각몽, 지복체험, 최면 등과 같은 것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정치에 가까운 것들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정치의 목적은 결국 특정한 구조를 통해 힘을 획득하려는 일이다. 이 환상적 요소들은 바로 그러한 정치의 목적과 동일하게 기능한다. 환상적 구조를 통해 마법적인 힘을 얻으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힘에 대한 추구를 목적으로 펼쳐지는 환상적 영성의 실제는 사실 대단히 정치적인 것이다. 이것 또한 오른쪽에 있는 것 같지만 엄밀히는 왼쪽에 속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른쪽이 아니라 사실은 왼쪽에 있는 것들, 곧 제도종교와 환상적 영성을, 임의적으로 종교적 왼쪽이라고도 칭할 수 있다.
실존주의적 영성은 이러한 환상적 요소들이 위치한 종교적 왼쪽을 떠나, 다만 궁극적 관심의 물음을 들고 계속 오른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계속 오른쪽으로만 가면 된다.
정치적 왼쪽을 지나, 정치적 오른쪽을 건너, 종교적 왼쪽을 뒤로 한 채, 그저 오른쪽으로만 향하는 것(right turn)이다.
그러면 늘 맞는 방향(right turn)으로 가게 된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언제나 오른쪽이다.
다시 말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언제나 옳은 쪽이다.
실존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 옳은 길로만 가게 되는 그 여정이다.
그렇게 실존주의는 그 여정 자체가 이미 우리 자신이 찾던 그 궁극적 물음의 답이다.
나는 옳은 존재라는 사실이 이 우주에 찬연하게 알려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