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백신의 미접종자로 살아보자"
우리 존재의 온전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활동이 분명 실존상담입니다.
이것은 말로만 "그것도 괜찮아." 내지 "너는 온전해."라는 말을 정답처럼 반복하며 그 언어적 주술효과에 취하고자 하는 정신승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실존상담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하지 않게 경험한 현실 속에서도, 실은 우리 존재가 얼마나 온전했던가를 구체적으로 발견하는 활동입니다.
이처럼 정말로 온전함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온전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온전함과 제일 가까운 말, 나아가 온전함을 대체할 수도 있는 말, 그것은 바로 가벼움입니다.
온전함은 가벼움입니다.
온전함은 비장한 언어들로 우리 자신을 잔뜩 무장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인간의 사명과, 진실한 윤리적 태도와, 제대로 된 길을 가는 진중한 의지 따위를 어깨에 지고 다니는 일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온전함입니다.
특히나 거대한 거울을 무겁게 짊어지고 다니는 일은 온전함과는 가장 거리가 먼 일입니다.
거울은 자아상을 비추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자아상을 대단한 모습처럼 상정하고 있는 이들이 거대한 거울을 지고 다닙니다. 그리고는 그 거울에 비추어 자기가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올바르게 유지하고 있는지를 늘 점검합니다.
이것을 강박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강박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자아상에 대한 강박입니다.
오늘날 이 강박적 태도는 지구에 널리 만연해 있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태도가 바로 이 강박적 태도를 그대로 시사합니다.
강박적 태도에 의해 가장 먼저 소외되는 것은 마음입니다. 강박적 태도를 낳는 자아상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소외시켜 허구적으로 얻어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로나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면, 마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아주 고집스럽습니다.
강박의 가장 쉬운 이름은 바로 고집입니다.
이 고집은 자기는 오류가 없고 깨끗하며 선의로 가득찬 순수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합니다. 그러한 자아상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거주영역만은 끝없이 청소하려고 하는 경향성으로 이러한 고집은 발현됩니다.
그러나 말이 좋아 청소지, 실은 박멸입니다.
자기 자아상에 대한 강박을 가진 이는 실상 홀로코스트의 주체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타자는 박멸의 대상입니다. 혹여 타자가 자기보다 힘이 있는 것 같아 박멸이 어렵다면, 이러한 주체는 타자를 모독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타자를 모독함으로써 자기가 깨끗해지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집을 순수한 청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남의 집에 자기 집의 쓰레기를 투기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타자를 희생시킨 그 투기의 결과로 얻어진 거짓청결이 제공하는 거짓평화 속에서 거짓안식을 누리며, 우아하게 자아도취에 빠집니다. 자신이 이제 진정한 자기의 길을 걸어가고 있고, 사람들에게도 모범적인 모습으로 인정받고 칭찬받을 하나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자기의 이야기를 보급하려고 하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잘했고 또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해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식의, K-자아도취 시리즈는 이렇게 출현합니다.
타자박멸과 자아도취는 반드시 함께 존재하는 한쌍의 사건입니다.
자아도취의 제국주의는 반드시 타자박멸의 홀로코스트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백신 작용과도 같습니다.
한 개인이 자기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바이러스처럼 타자를 규정하고, 그 타자를 격퇴함으로써 자신의 자아상을 계속 유지하려고 할 때, 거기에서 작동하는 백신 작용이 바로 고집입니다. 무조건 자기의 선택과 판단이 틀리지 않다고 버텨내는 일입니다. 남의 말은 죽어도 듣지 않으며, 자기가 대단히 높은 차원의 지성을 가진 인생스승인 것처럼 다 자기 말을 따라야 한다고 우기는 일입니다.
이러한 K-고집의 주체들은 결코 타자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바이러스에게 잘못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는 까닭입니다.
이들은 자기 정체성을 무오하고 완전한 천사와 같은 것으로 상정하고, 오직 타자만이 바이러스처럼 자기의 평화를 깨트리고 자기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사악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표현 그대로, 이 주체들은 타자를 근본적으로 바이러스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쁘거나, 또는 못나거나.
그리고 그 둘 다 계몽이 필요한 것이라고 이들에게는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보다 나쁜 악인들을 향해, 또 자기보다 못난 무지렁이들을 향해, 사람답게 사는 법도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즉, 자기처럼 진정하게 사는 법을 전파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들은 자기 자아상의 이야기를 신화로 만들어 보급하려고 합니다. 이 신격화된 정체성의 이야기, 바로 이것이 백신입니다. 결국 이 주체들은 자기 자아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은 정체성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무섭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자아상의 존속을 위협하는 불순물인 바이러스가 사라지고 전부 다 자기동일성으로만 가득한 세상이 되어야 이들은 안전하다고 여깁니다.
늘 똑같은 자기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대한 거울이 있는 다락방이 이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환경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강박적 고집은 늘 자폐의 현실을 부릅니다. 당연합니다. 자기에게 도취되기 위해 타자를 박멸하려 하는 의도는 필연적으로 자기를 불통과 폐쇄의 현실로 내몹니다. 언어로 아무리 자기를 치장해도 거기에는 강퍅한 눈빛만이 남습니다.
그 눈빛이 강렬한 의지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남을 변화시키려는 일입니다.
"내가 아니라 니가 바뀌어야 해."
이것이 이들의 인생표어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변화했는지를 신화적으로 언술하면서, 사람들이 그 변화의 기제를 채택해 자기들의 인생에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 자체가 이들에게는 이득입니다. 모두가 자기의 자아상과 똑같아져 얻는 안전감의 이득은 기본이고, 위대한 변화의 열쇠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인생스승 같은 것으로 입지화하는 이득까지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 자신은 그들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변화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변화를 촉구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같은 거울에 비친 같은 자아상만을 고수할 뿐입니다.
자신들이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착용하는 액세서리를 이들은 보통 변화라고 주장합니다. 자기를 포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가 조금 달라진 것을 가지고 이들은 자신이 변화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핵심적인 자아상은 단 한 줌도 포기되거나, 단 1mm도 이동된 적이 없습니다.
이들의 삶은 늘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자기들의 삶을 늘 똑같은 이야기로 만들어 반복합니다.
그 이야기는 착한 아이와 따듯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아이를 지키는 자상한 부모와, 아주 티없이 순수하고 선량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어느 때는 그러한 부모처럼 행위하고, 또 어느 때는 그러한 아이처럼 행위하며, 그 사이를 오가는 것을 변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력한 아이에서 벗어나 이제 진정한 영웅적 존재로 깨어났어요!' 또는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의 과업에서 벗어나 아무 것도 안해도 온전하다는 것을 알게 된 순수한 마음으로 깨어났어요!"라는 식으로, 이들은 그저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만을 교차소비하며 진정한 이야기로 반복할 뿐입니다.
이것은 거대한 나르시시즘의 이야기입니다.
거대한 거울과, 그 거울에 비친 거대한 자아상만을 고집하는 거대한 이야기(meta-narrative)입니다.
동시에 엄마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만을 고집하는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생물학적 나이를 많이 먹었다 할지라도, 또 아무리 사회적 경험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아직 엄마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이 아이는 그저 영원한 아이입니다. 즉, 아이의 상태로 영원하고자 하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피터팬의 후예들인 이 아이들은, 피터팬과 같은 이야기를 끝없이 만들어냅니다. 문예창작의 기술자들이 되어, 양치기 소년처럼 고집스럽게 언어적 쇼를 집행합니다.
전술한 것처럼, 이야기가 이들의 백신인 까닭입니다. 강박적인 이야기를 고집하는 일, 이것이 이들의 백신 작용입니다.
자기가 사랑받고 칭찬받는 아이의 모습으로 영원히 엄마와 같은 대상적 존재들의 눈에 비치기 위해 이들은 필사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신이 더 많이 보급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똑같은 모습이 되어 자기를 위협하지 않아야만, 그러한 아이로서의 행복한 자아상이 유지될 수 있다고 이들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자기가 엄마와 영원히 함께 행복한 퇴행의 현실을 만들기 위해, 모든 존재를 자기 자아상 아래 복속시키려고 합니다.
마음을 자기라고 하는 정체성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처럼 그 정체성 안에서 마음을 학살하려고 합니다.
자기는 무해하고 무오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피터팬과 같은 주체가 부드럽고 친절한 미소로 커피 한 모금의 풍미를 음미하며 그 가스실의 버튼을 누른다는 점에서도 이것은 공포영화이지만, 지금 이 이야기가 대학살극의 공포영화라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정말로 공포영화입니다.
그것은 '아이를 위해서'라는 표어를, 자신이 엄마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유지되기 위해 남의 아이를 죽이려는 목적에 활용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자기 아이만 소중하고, 남의 아이는 얼마든지 희생되어도 된다는 식의 전형적인 K-내로남불의 폭력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마음에 대한 이해는, 마음을 마치 아이와 같은 것으로 설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나쁘거나, 또는 못난' 마음을 훈육하려고 합니다. 모범적인 모델링과 같은 공식을 정해놓고, 그 공식대로 마음을 다루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효과적으로 훈육되지 않는 마음은 결국 박멸하게 됩니다.
한석봉네 엄마처럼 바이러스를 앉혀 놓고 진정한 인간의 법도로 바이러스를 교육하려다가, 그렇게 바이러스를 무식한 짐승에서 진정한 사람이 되게 하는 참다운 계몽의 빛을 전하려다가, 결국에는 떡을 반듯하게 썰던 칼의 위력을 바이러스에게 집행하게 되는 셈입니다.
현실에서도 아이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유기됩니다.
아이를 바이러스와 같은 입장으로 보고 있던 이들이 아이를 유기합니다.
즉, 자기의 힘으로 저 잘못된 바이러스를 똑바로 교정하여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치 자기가 신처럼 생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이들이 아이를 유기하게 됩니다.
이 또한 피터팬에 사로잡힌 이들이 하는 일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은 늘 깨끗하고 오점없이 순수한 요정처럼 사랑받는 모습으로만 늘 가상적인 엄마의 시선 속에서 유지되어야 하는데, 아이라는 불순물이 자기 인생에 끼어들어와 자기의 평화를 깨트리는 것만 같을 때, 이 훈육에서부터 박멸로 이어지는 프로세스는 작동합니다.
피터팬은 분명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가장 많은 이를 죽인 학살자의 이름입니다.
강박적 고집 안에는 반드시 피터팬이 숨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안에는 반드시 피터팬이 숨어 있습니다.
자기 자아상을 영원히 유지하고자 하는 피터팬은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존재입니다. 그러한 그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이유는, 화장터에서 타오르는 학살의 연기를 통해서입니다. 피터팬은 끝없이 타자를 희생시켜 피어나는 이득으로 자신을 연처럼 허공으로 띄웁니다. 그리고는 외칩니다.
"여러분도 저처럼 날 수 있습니다. 여기 새롭게 여러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이 아름다운 목욕탕으로 어서 들어오세요. 오래된 아픔의 때를 밀고 여러분의 쇄신된 자아상을 통해 이제 온전해지세요."
이러한 것이 정말로 온전함일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온전함은 가벼움입니다. 그러나 가벼움은 망상의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피터팬이 아우슈비츠의 하늘 위에서 둥둥 떠다니며 홀로 여여히 좋아하다가, 만의 하나 문득 정신을 차려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거기에서 산처럼 쌓여있는 시체더미를 발견한다면, 그 무고한 시신들이 불타며 만들어지는 연기의 상승기류로 자기가 떠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피터팬은 그 앞에서 더는 가벼울 수 없습니다.
가볍다는 것은 내가 가볍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모든 그림이 가볍다는 것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내가 온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모든 그림이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아상의 거울만 보고 있는 이는, 지금 이 모든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이 모든 그림을 만드는 핵심적인 성분, 바로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역으로 이처럼 마음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 정체성의 신화로 세상을 뒤덮는 것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자아상의 이야기라는 백신을 모두에게 맞게 하면, 더는 바이러스에게 위협받지 않는 청정한 다락방이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망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신이 어른이 되는 자연스러운 변화를 한사코 거부하고자 하는 피터팬의 노골적인 망상입니다.
바이러스는 변화의 상징입니다.
타자로서의 생명현상이 우리에게 들어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이 바이러스의 핵심작용이 곧 마음의 작용과 같습니다.
마음은 바이러스입니다.
마음의 흐름인 삶 자체가 애초 바이러스의 작용과 동일합니다.
진정한 이야기로 마음을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거대한 이야기[거대담론]로 삶을 통제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어리석은 망상입니다.
통제하려 하니 그 이야기들의 무게로 우리의 존재가 무거워집니다.
진정한 자기 정체성의 이야기라고 하는 마음백신을 맞으니 우리의 몸이 무거워집니다.
온전함은 요원해집니다.
"마음에도 백신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을 굳게 세워줄 튼튼한 자기의 이야기를 확보해서 마음바이러스로부터 여러분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세요. 언제라도 마음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여러분이 되어 평화를 누리세요."
많은 대중심리학 내지 사이비심리학에서 자주 들려지는 이 말은 사실 이러한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횡경막을 지배하세요. '살아있는 숨아, 멈춰라!'라는 여러분의 놀라운 언어 앞에 폐도 알아서 멈추게 되는 마법의 현실을 만들어보세요. 횡경막이 멋대로 만드는 요동에 흔들리지 않고, 여러분의 폐를 지배할 수 있는 전능한 신이 되어 모든 제멋대로인 생명을 박멸시키고 홀로 지구에 남아 아무도 여러분을 위협하지 않는 그 평화를 누리세요."
마음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마음백신이 작용하고자 하는 그 방향성은 사실 죽음일 뿐입니다.
마음이 죽으면, 삶이 죽고, 우리 존재가 죽습니다.
물론 마음 대신에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 이야기가 창조해내는 감정들에 자신을 위탁해 연명할 수는 있습니다. SF물에서 곧잘 묘사되듯이, 평생 기계에 연결되어 양분을 공급받으며 거동이 부자유하게 사는 일은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질문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게 온전함입니까?
심리상담을 정확한 자기의 필요로 찾는 내담자들은 온전함을 얻고 싶어서 찾아옵니다. 이들은 분명하게 이야기에 지쳐서 찾아옵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얻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방증으로, 상담자가 내담자에 대한 이야기를 부여하면 이러한 내담자들은 바로 상담자에게 도전합니다. 아주 불쾌해합니다.
내 고유한 이야기를 멋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전적 소설은 나만 쓸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적인 온전함을 얻고 싶어서 왔는데, 왜 허구의 소설을 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상담자가 내담자를 등장인물로 보고 자기는 전지적인 작가로 가정할 때, 이러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이미 상담자가 아닙니다. 작가의 입장일 뿐입니다. 하물며 좋은 작가도 아닙니다. 좋은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자기의 통제 아래 밀어넣지 않습니다. 좋은 작가는 자기가 스토리텔링을 하지 않고, 그냥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습니다. 그럼으로써 작가인 자기가 죽고 등장인물들이 살아나게 합니다.
3류 작가들이 자기가 상담자인 척, 인생스승인 척하며, 마음의 의사 놀이를 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 마음의 의사 놀이도 3류입니다. 무조건 마음백신의 주사만 맞으면 다 해결된다고 하는 아이의 소꿉놀이와 같습니다. 혹시라도 해결이 안 된다면 이 소꿉놀이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 때문이라고 하는 마녀사냥도 이어집니다. 화형대에 불은 꺼질 날이 없고, 아우슈비츠는 언제나 가장 3류입니다.
아우슈비츠로부터 초록색 가운을 입은 피터팬이 잿빛 환상처럼 날아와, 마음백신을 만병통치약처럼 처방하며 마음바이러스가 함부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봉쇄합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제하고 봉쇄합니다.
이야기의 소꿉놀이가 실제의 삶을 통제하고 봉쇄합니다.
다시 한 번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게 온전함입니까?
우리가 온전함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허구의 문학적 효과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모든 것은 원래 변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로 사는 존재의 방식이 바로 실존입니다.
그래서 실존은 개방하는 삶입니다. 마음바이러스에 열려 사실적인 변화를 허용하는 삶입니다.
곧, 실존은 마음백신의 미접종자로 사는 일입니다.
'거울에 비친 영원한 엄마의 아이로 남자.'라고, 자기와 똑같은 모습이 되도록 만드는 피터팬의 주사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그 고집스러운 나르시시즘의 폐쇄적 지옥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우아하고 친절한 미소 속에서, 마음을 말살시키려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탈출하는 일입니다.
그 첫 걸음은 이에 대한 인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온전한 척을 하고 있다."
마음백신을 맞아 마치 마음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척, 자신은 청정구역인 척하고 있는 이 무오한 순수성을 가장하는 피터팬의 상태를 인정하는 일에서부터 온전함으로의 길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제 온전함으로의 길은 다음과 같이 안내됩니다.
1. 인간은 마음으로 사는 존재다.
2. 인간, 절대로 약하지 않다.
3. 자신이 온전한지 아닌지를 계속 거울만 보며 강박적으로 확인하려는 상태는, 자신이 엄마의 눈에 비친 착한 아이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는 상태와 같다. 온전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상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이야기에 빠트려 스스로 허약하게 만들고 있는 상태다.
4.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마음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살면 된다.
5. 자신이 마음감염자가 아닌 것처럼, 마치 마음바이러스의 청정구역인 것처럼 하며 더는 세상을 속이지 않는다.
6. 그러면 자신의 온전함을 가장하기 위해 이런저런 대상과 도구들을 봇짐처럼 싸들고 다니며 의존해왔던 무거운 심각성이 날아간다.
7. 특히나 매일 들고 다니던 나르시시즘의 거대한 거울이 버려지게 되어 아주 가벼워진다.
8. 그리고 이제 막 생겨난 가벼움이라는 손거울도 버린다.
9. 8번까지 자신이 하던 모든 일이 전부 다 아우슈비츠 다락방에서 피터팬이 어떻게든 자기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지불하던 꼴값이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다 보면 거울 보며 그 혼잣말 하는 모습이 얼마나 웃길지를 같이 알고 웃는다.
실제로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뒤 실존상담의 한 지류인 로고테라피를 창안한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인간의 온전함은 그의 자기초월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자기초월의 능력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는 힘입니다.
자조가 아니고, 조소가 아닙니다. 정말로 코미디처럼 웃겨서 웃는 것입니다.
실존한다는 것, 곧 마음백신의 미접종자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웃음에 개방되는 일입니다.
고집스럽게 온전한 척을 하고 있던 그 고집스러운 표정이 웃겨서 터져나오는 웃음이 가벼움입니다. 그것이 온전함입니다. K-웃음이고 K-온전함이 아닌, 그냥 웃음이고 그냥 온전함입니다.
마음백신패스를 가진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조건없이 허용되어 있는 웃음이고 온전함입니다.
사실은, 결코 비밀이 아니지만, 마음바이러스가 퍼트리고자 하는 그 현실입니다.
웃음으로 가득한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향해 끝없이 자기초월하는 웃음이 바로 실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