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양산하는 죄의 인격

"당신이 반드시 피해야 할 심리학적 인물상"

by 깨닫는마음씨




이것은 죄를 규탄하기 위한 도덕판단이 아니라,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한 기술판단입니다.


인생의 지도를 펼쳐본 뒤, 활화산의 화구 옆에 집을 짓고, 쓰나미가 들이닥치는 해변가에 아이들을 뛰어놀게 하는 일을 그만하자고 하는 말들입니다.


틸리히가 잘 변용했듯이, 죄는 소외입니다. 소외가 우리의 고통의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어떤 것이 소외된 이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고통을 유발합니다. 끝없이 고통을 양산해 고통의 총량을 증가시키면서도 자기가 그런 줄을 모릅니다. 소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의 전통에서 제안된 칠죄종(七罪宗: 7가지 근원적 죄)의 개념은 우리가 대체 어떠한 것을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칠죄종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만(pride), 인색(greed), 질투(envy), 분노(wrath), 음욕(lust), 탐욕(gluttony), 나태(sloth).


그리고 이 칠죄종에 각기 대응되는 반대 개념들은 또 다음과 같습니다.


겸손, 자선, 친절, 인내, 순결, 절제, 근면.


이 반대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죄를 극복하고 그 반대의 성질을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닙니다. 반대 개념 자체가 바로 우리 자신이 무엇을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이 질투를 소외시키고 있으나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친절한 면모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와, 이 분 되게 친절하다."라는 긍정적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긍정적 평가를 소재로 삼아, 질투를 소외시키고 있는 이는 가상의 소설을 쓰게 됩니다. 거짓된 자기정체성을 지어내, 그것을 자신이라고 믿게 됩니다. 믿는 정도가 아니라, 믿어 의심치 않게 됩니다. 조금은 수줍으면서도 뿌듯하게 웃으며 자기는 다른 건 몰라도 늘 사람들에게 친절한 존재라며, 거짓된 자기정체성을 자기가 가진 최고의 자원으로 꼽습니다.


이러면 이럴수록, 그로부터 질투는 더욱더 소외되어 갑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행을 결정짓는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바로 우리로부터 소외된 심리적 성분입니다. 프로이트가 천재인 이유입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말해진 말'이 아니라, '일어난 일'입니다.


무의식은 이미 그렇게 일어난 일로 드러납니다. 곧, 마음은 이미 그렇게 일어난 일로 가장 정확하게 드러납니다. 자신이 어떠한 자기정체성을 소설로 날조해내고 있든 간에, 마음은 정직합니다. 일어난 일 바로 그대로가 마음입니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이것이 자기정체성을 자신이라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이들의 단골대사입니다. 그러나 일어난 일 자체가 바로 마음의 의도입니다. 이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가 한 개인의 심리적 성숙도를 결정합니다.


친절이라는 가치에 입각한 자기정체성을 창조해내 그것을 맹목적인 자기우상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분명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이들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그래서 반드시 질투의 일을 펼쳐냅니다. 일어난 일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명백하게 질투라는 마음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질투라는 마음이 자각되지 않고 소외된 채 작용할 때, 이때는 질투 하나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소외된 것은 연쇄하여 작용합니다.


질투가 소외되어 있었으면 그것이 작용할 때는 칠죄종이 모두 함께 작용합니다.


이를테면, '질투'하기에 자신이 다 가져야 한다는 '탐욕'이 생기고, 상대에게 좋은 것은 더욱더 주고 싶지 않은 '인색'이 생기며, 그렇게 자아상은 더욱 높이 상승해 '교만'해지나 그러한 자아상이 충족될 만큼 쉽사리 다 갖지는 못하게 되는 현실 때문에, 자기방종의 '음욕'에 빠지거나, 자기방기의 '나태'의 상태를 지속하면서, 끊임없이 '분노'만을 누적시킵니다.


보통 우리가 우울이라고 부르는 이상심리학적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분노가 더 강조되면 공황이 되고, 교만이 더 강조되면 분열이 됩니다.


이 칠죄종은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貪瞋癡)와도 사실 같습니다. 7가지로 설명하는가, 3가지로 설명하는가의 기술적 차이입니다.


1가지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어른아이'


이것은 자신이 어른인 줄 착각하는 아이를 뜻합니다. 즉, 자신의 미발달된 부분을 소외시키고, 사람들 앞에 자신이 성숙한 존재인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심지어는 인생에서 뭔가 중요한 것(보통은 마음입니다)을 아는 인생스승처럼 사람들을 가르치려고까지 하는 기만적 인격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어른아이의 핵심에는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칠죄종의 7가지와 탐진치의 3가지는 다시 1가지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수치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수치심에서 모든 죄가 나와, 7가지로 또는 3가지로 분화됩니다. 곧, 수치심을 근본적으로 소외시키기에 다른 소외들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소외된 죄는 악이 되어 이제 고통을 양산합니다. 다른 이들 또한 고통받게 만듭니다.


때문에 이러한 이들의 옆에 있으면 고통의 사건이 더 많이 들이닥칩니다. 나아가 이러한 이들에게 인생에 대한 뭔가를 배우고 있다면, 그걸 배우면 배울수록 실제의 인생은 더 힘들어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질투의 반대 개념이 친절이듯이, 그리고 질투를 소외하는 이들이 친절을 가장하듯이, 이 수치심에도 사실 반대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수치심'의 반대 개념, 그것은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은 씻는 일입니다. 자기 존재를 수치스럽게 경험한 이가 다른 존재가 되어 그 수치심을 씻으려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일종의 존재세탁입니다.


수치심을 소외시키는 이는 반드시 수행자의 면모를 취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수치심을 극복한 척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뭔가 높은 차원과 온전한 경지에 도달한 것 같은 모양새를 꾸립니다. 마치 자기를 인생이라는 수행스토리의 주인공처럼 삼아 소설을 씁니다.


어디 영성서적 등지에서 빈번하게 나올 법한 뻔하고 진부한 개념들과 원리들을 소개하며, 자신은 자기의 삶에서 직접 그것들을 적용해 이루었기 때문에 단지 말로만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처럼 스스로를 변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은 체험의 전문가인 것처럼, 그리고 그 체험이 사람들과 자신을 변별시켜주는 요소가 되는 것처럼, 자신을 어필합니다.


전형적인 수행자상입니다.


이 수행자상은 연역적 모델입니다. 곧, 모방의 모델입니다.


모범적인 본으로 보이는 남의 말과 행동을 따라해서, 그걸 통해 자신에게도 적용해보았더니 되었더라, 하는 식입니다. 보편을 구체에 적용하는 연역의 방식입니다.


어른을 따라 술담배도 해보고, 야동도 봐보니, 나도 이제 어른이더라, 하는 아이의 말과 같습니다.


수행자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귀납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원리를 따라해서 그 남과 같은 경지를 체험한 것 같지만, 거기에는 사실 아무런 깨달음이 없습니다. 그냥 남의 말이 맞구나, 라는 그 실증적 확인만 있을 뿐입니다.


깨달음은 과학이 아닙니다. 어떠한 원리를 보편화시켜, 그 보편을 구체에 적용해감으로써 동일한 결과를 재현하는 방식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고 무식하게 말하자면, 깨달음은 '내 앞에 그 누구도 없이 내가 이 우주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것'입니다. 모델링이 불가능합니다. 모델링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남이 하는 일을 모방해 온전함이라든가 여여함이라든가 하는 등의 좋은 상태를 체험했다고 그것이 깨달음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도 깨달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도 깨달아서 너랑 동급인데 왜 인정 안해!"라며 징징거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옛날 선사들 같으면 손가락이나 잘릴 일입니다.


모방해서 얻은 하나의 복사물과 같은 상태를 들고, 원본과 동격으로 대우받으려는, 나아가서는 원본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대접받으려는 이 상태가 바로 소외된 질투가 펼쳐내는 교만의 상태입니다.


다시 묘사하자면, 아빠 흉내를 내는 아이가, 아빠에게 내가 이제 아빠와 동격이니 그러한 나를 인정하라고 하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아이는 아빠가 당연한 결과로 자기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빠를 마치 독재자와 같은 것으로 규정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밑에서 열심히 헌신하여 인정받고자 하는 소설을 쓰다가, 결국에는 그러한 아빠를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가고자 하는 또 한 편의 소설을 씁니다.


어느 쪽의 소설이든 그 엔딩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아빠의 살해입니다. 인간의 살해입니다.


칠죄종이든, 탐진치든, 수치심이든 간에, 이 죄의 개념들이 인격으로 구현된 그 결과는 반드시 살인입니다.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 주체가 살인을 의도하고 집행했는지를 너무나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은 선량한 수행자라고 간주하며, 그러한 소설로 자기를 치장한 이가 아무리 어리둥절하게 생각할지라도, 일어난 일은 살인입니다. 물리적으로 사람이 죽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것은 존재에 대한 살인입니다.


기독교에서의 카인과 아벨의 신화는 정확하게 소외된 질투가 이끌어간 그 결과를 잘 보여줍니다.


자기가 좋은 것을 다 갖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기가 좋은 것을 얻어 상대와 동격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에 대한 살해가 있어야 합니다.


복제품이 원본과 동격이 되기 위해서는, 나아가서는 원본을 능가하기 위해서는, 원본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본을 가만히 놓아두면, 원본은 복제품이 힘들게 모방해낸 현실에서 벗어나 또 다른 지평으로 달려가 버립니다. 복제품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복제품은 너무 힘들어집니다. 그동안 힘들게 마치 하드디스크에서 USB로 야동을 다운로딩하는 것 같은 시간을 인내해왔는데, 그리고 이제야 카피작업이 다 완료된 것 같은데, 원본이 다르게 이동해버리면 복제품은 다시 또 쫓아서 인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정도쯤이면 이제 '완성'되고 싶은데, 그만 애쓰고 싶은데, 원본을 그대로 놓아두면 복제품이 완성될 수 있는 때는 요원한 것만 같습니다. 더 애써야만 할 것 같습니다. 끔찍합니다.


그래서 복제품은 반드시 원본에 대한 살해의 의도를 품게 됩니다.


더는 힘들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쉬고 싶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복제품은 원본에게 계속 정품의 인가를 요구합니다. 무슨 무협지의 장면처럼 "그래 이만하면 이제 너도 깨달았구나. 그동안 고생많았다. 참 장하구나. 헛헛헛."이라는 인가를 받아야 복제품은 이제 고된 여정을 마치고 쉴 수 있는 안식의 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인가가 거짓일지라도, 그 거짓이나마 복제품은 간절히 얻고 싶습니다.


더 상세히 원본을 모방하고, 원본의 필적과, 어휘와, 형식과, 호흡과, 주제를 흉내내어, 기필코 원본인 척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인정받을 일은 더욱더 없어집니다.


대상을 철저히 모방하는 방식으로 그 대상에게 의존하여 자기를 세우고 있으면서, 그 대상에게 동격으로 인정해달라고 하는 요청은 어불성설인 까닭입니다.


하나의 비유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긴 시간을 들여 모방해낸 위작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피카소에게 그 그림을 들고 가 이제 내가 당신과 동격이라는 것을 인정해주소, 라고 한다고 피카소가 그 사람을 인정할 일은 없습니다. 그래, 당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내 길을 가겠어, 라며 그 사람이 피카소의 기법과 색채를 따라한 그림을 그려낸다고 해도 피카소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다른 많은 이들에게 그림을 인정받아 이 그림이 피카소보다 더 피카소 같구만, 이라는 평가를 듣게 된다 할지라도, 피카소는 그를 그저 화가가 아닌 모방쟁이 광대로 볼 뿐입니다. 그가 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말을 흉내내어 자신의 위세로 삼고 있는 한, 자기만의 길을 간다는 그의 인생스토리는 그저 망상의 싸이월드 일기일 뿐입니다.


그 싸이월드 일기에는 사실 이렇게 써있습니다.


"죽어! 날 인정하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버려!"


그러나 모방의 행위가 이처럼 원본에 대한 살해의 의지만을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복제품에게는 전혀 자각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수치심을 소외시키고, 수치심이 드러난 방식인 질투 또한 소외시키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 반대로 자기는 친절한 수행자로서 인식됩니다. 자신의 길을 사람답게 또 정직하게 걸어가는,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자신의 마음에 늘 친절한 태도로 미소짓는 소설주인공처럼 인식됩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자신이 전방위적인 고통유발자라는 사실이 소외됩니다.


자신이 현재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고통뿐이라는 사실이 아주 완벽하게 소외됩니다.


자신의 친절함이 독이라는 사실이, 자신의 수행자적 태도가 악이라는 사실이, 대단히 까마득하게 소외됩니다.


악을 흩뿌리면서도 자신이 지금 악인 줄 모르는 상태, 흡사 살인과 고문의 전문가이면서도 본질적으로 자신이 선량한 소년소녀처럼 순수하다고 착각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수치심과 질투를 소외시키기 위해 친절한 수행자의 인격을 채택하고 있는 이의 상태입니다.


이 경우, 분명하게 모방은 악의 방법론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실제적으로 악을 집행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살인은 그 모방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인격화되어 있다는 것은 실체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은 분명하게 실체적입니다. 실체적 인물상으로서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친절한 표정과 언술 및 태도로 모방의 가치를 말하는 이들, 이러한 이들에게서 수치심과 질투의 소외를 우리는 눈치챌 필요가 있고, 이들이 본질적으로 고통을 유발하는 살인과 고문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눈치챌 필요가 있으며, 그렇기에 이들로부터 최대한 멀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투의 반대 개념인 친절을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다른 칠죄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 자선, 친절, 인내, 순결, 절제, 근면이, 모방의 가치와 결합되어 작동하고 있는 실체적 인물상이 있을 때, 그는 반드시 우리가 피해야 하는 인물입니다.


심리적 미발달 자체는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심리적 미발달을 소외시키는 일이, 생명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을 유발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로 사는 일은 늘 권장됩니다. 아이를 가장 소외시키는 이들이 어른아이가 되어, 자신의 수치심을 소외시키는 수행자의 인격을 갖게 됩니다.


죄의 인격의 출현입니다.


문자주의적으로 수행자가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죄의 인격의 소유자들은 자신은 수행자가 아닌 것처럼 스스로를 묘사합니다. 수행자의 삶을 헛된 것에 애쓰는 삶처럼 말하며, 자기는 애쓰지 않고 온전함을 체험한 존재인 것처럼 변별시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자기라고 하는 것을 세우기 위해 늘 가장 많은 에너지를 동원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사람이 되었든, 물질이 되었든, 관념이 되었든, 문화적 소비재가 되었든, 에너지를 투여할 여타의 의존할 대상물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흡사 AI 로보트처럼 사는 이들입니다.


무슨 게임의 알고리즘을 점검하듯이, 프로그램 오류를 잡아내듯이, 버그 테스팅을 하듯이, 이들은 마음을 AI처럼 다룹니다.


이 말은, 이들이 마음을 지성적으로만 다룬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감정, 정서, 감각, 의지, 느낌, 이러한 비이성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이들은 같은 일을 합니다.


이를테면, '내 마음이 대체 왜 이런지 느껴야 돼.'라고 하며, 이들은 잘 느끼려고 합니다. 느낌을 잘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이들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놓아둔 채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서 표현되게 하는 진정한 원리에 따라, 모범적으로 잘 느끼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경험되는 마음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수용면적이 더 넓어지도록 해서, 이제 마음이 안심하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려고 합니다.


그 결과로, 마음의 이야기가 들려오면, "아 이런 마음이었구나."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무언가를 알게 된 것처럼 감동합니다. 그리고는 더 넓어진 것 같은 자신의 가슴에, 더 성장한 것 같은 자신의 면모에, 미학적 쾌감을 경험합니다. 마음을 이렇게 알아가는 것이구나, 마음들이 참 놀랍고 아름답구나, 더욱 마음을 만나고 싶다, 이제는 자신이 한 경지에 이른 것처럼 모든 것을 평화롭고 온전하게 경험합니다.


바로 그러한 소설 속에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 소설 속에.


소설의 장르문법과,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은 똑같습니다.


기승전결 내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프로세스처럼, 이들은 자기 인생을 소설의 문법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실천해나갑니다.


마음이 문제가 되는 발단에서 출발해, 그 마음이 구체화되는 전개 과정을 거쳐, 끌어안기 어려운 마음과 싸우며 어떻게든 끌어안아보려 하는 위기를 통해, 결국에는 허용된 마음이 자기를 알리는 절정을 경험하고, 마음에 대한 감동적 앎을 얻게 되는 해피엔딩의 결말을 맞이하는 과정입니다.


소재가 감정, 정서, 감각, 의지, 느낌 등의 비이성적인 것들로 변주되었을 뿐, 인풋과 아웃풋이 상응하는 인과론적 모델에 따라 움직이는 AI 로보트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즉, 이성적인 소재보다 답이 빠르게 나오지 않을 뿐, 문제를 집어넣은 채 끌어안고 있으면 언젠가는 답이 나오게 된다는 자판기 모델입니다.


그 과정에서 늘 발생하는 것은 뜨거운 내적 갈등입니다. 화력발전소처럼 터빈이 회전하며 내는 불길입니다.


소설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갈등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과 지지고 볶으며 갈등을 만들어내고, 그 갈등과 계속 씨름하는 속에서의 심정을 눈물로 분노로 웃음으로 거듭 토해내다가, 결국에는 극적으로 화해해내는 과정을 묘사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마음을 만난 것 같으면, 마치 한 편의 소설을 탈고한 것처럼 그 여유를 즐기며 과업에 대한 자신의 성취를 우아하게 자축합니다. 한국형 블럭버스터처럼 희노애락이 재미와 감동으로 다 담겨 있는 마당놀이극을 성공적으로 집필한 명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축이기도 하고, 자신의 시나리오에 따라 성공적으로 연기해낸 명배우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축이기도 합니다.


공통적으로 연극적 특성을 보이는 B군의 인격장애들이 온전함에 대한 신비체험 내지 종교체험을 자주 하는 일은 이러한 극적 구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갈등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갈등을 자신이 해결하는 자가 되어, 그 끝에 경험하게 된 상태를 온전함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물양동이를 들고 한 시간 동안 긴장 상태로 서 있다가, 온갖 희노애락의 끝에 그 양동이를 끌어 안고 펑펑 울며 경험하는 이완 상태 속에서, 자기 자신이 또 한 걸음 성장했다고, 드디어 온전함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 소설입니다.


+1-1=0의 상태를 언어적으로 성장과 발달 내지, 심지어는 깨달음이라고 묘사하려고 드는 판타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수행자 소설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은 그저 고문입니다. 가피학적인 자극의 중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자신을 때리는 방식으로 자극에 중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교묘합니다. 자신을 때리던 모습을 깨닫고서, 왜 내가 그동안 이렇게 자신에게 가혹하고 모질었던가를 자비와 사랑 속에서 다시 보게 되는 바로 그 자극에 중독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제는 마음을 수용하게 된 온전한 존재로 깨어난 것 같은 그 자극이 가장 큰 자극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이는 깨달은 척하는 자극에 중독된다는 것입니다. 사이비-깨달음(pseudo-awakening)의 자극 중독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자신이 쓴 소설 속에서 이 자극만을 반복해서 경험하고자, 인생을 이야기처럼 집필하고, 연출하고, 연기하는 것이 이 수행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수행자들은 자기의 주변을 다 자신이 쓴 이 통속적 3류 소설 속에 휘말리게 합니다. 자신은 시나리오에 따라 결국에는 깨어나게 될 진정한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다 주인공이 깨닫는 일을 어떻게든 도와주게 되는 등장인물들과 같은 일회성 도구들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저를 인가해주시지 않고 오히려 저를 미워하신 덕분에, 제가 이제야 제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아버지, 아버지가 저를 인정해주시지 않아서 오히려 제가 더 열심히 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여전히 저를 못미더워하시겠지만, 그래도 저는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너무 행복합니다."


"니가 나를 억압해준 덕분에, 오히려 내가 너를 넘어서서 이제 나만의 연주를 하게 되었어. 고마워. 이제 내가 내 노래를 들려줄게. 빠밤."


이 오글오글한 3류 대사들이 근거하는 것은 결국 3류 소설의 작법입니다.


3류 소설의 작법은 또한 3류 인과론에 근거하며, 3류 인과론은 3류 변증법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3류 변증법은 정반합의 논리를 문자주의적으로 받아들인 그 귀결입니다.


아주 쉽게, 진정한 적이 새로운 자신을 낳는다는 논리입니다.


적과 겨루면서 적을 존중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적을 겸손하게 모델링해서 그 장점을 흡수하게 되며, 이를 통해 한 단계 높은 자신을 이루어가게 된다는 3류 판타지의 논리입니다.


이 3류 판타지는 당연히 심리적으로 미발달된 아동의 판타지입니다.


이것이 3류인 이유는, 여기에서는 고작해야 적이 자신을 성장시킬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중2병 및 이고깽 3류 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3류 판타지에서 주인공은 늘 미발달 아동 자신입니다. 세상은 자기라고 하는 주체가 성장해가는 무대고 배경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다 NPC입니다.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대상물들입니다. 얼마든지 모방해서 재미 다 보고 버려도 좋은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이 미발달 아동들은 친절함 등과 같은 칠죄종의 반대 개념으로 자신을 포장해, 그냥 주인공인 것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승리하는 주인공 역할을 연기하려고 합니다. 궁극의 주인공인 셈입니다.


부당한 NPC들의 폭력에 노출되어 고생하는 숭고한 희생양이 되어 있다가, 결국에는 그러한 NPC들조차도 자비와 사랑으로 품어내어 마치 우주와 같은 넓은 품의 인격적 풍모를 드러내는 절대적 주인공이 되고자 합니다. 즉, 신이 되고자 합니다.


칠죄종에는 각각의 요소들에 상징되는 악마들이 있습니다. 칠죄종이 수치심으로 수렴될 때, 이 악마들 또한 하나의 악마의 형상으로 수렴됩니다. 보통 기독교에서 루시퍼라고 말하는 타천사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루시퍼의 죄는 단 하나입니다.


신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되지 못한 수치심을 느낀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수치심이라는 것이, 신이 되고자 하는 미발달 아동의 판타지에서 비롯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판타지를 견지하며 어른아이로서 끊임없이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자신을 이끌어가는 것이 곧 수행자의 인격이라는 사실 역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발달 아동은 자신이 신이라는 유아적 전능감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유한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곧 수치심의 이유가 됩니다. 이들은 자신이 인간이어서 쪽팔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머리를 굴려 절대로 쪽팔리게 보이지 않으려는 데 거의 모든 에너지를 다 씁니다. 쪽팔리지 않고 그럴 듯한 주인공의 모습으로 자기를 위장하는 소설을 쓰는 데 거의 모든 에너지를 다 씁니다. 즉, 이들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일에 열중합니다. 신적인 존재로 보이기 위해 다양한 원본들을 모방합니다. 통합이라는 이름하에 모방한 것들을 적당히 뒤섞어 자기만의 길이라고 칭합니다.


바로 그렇게 뒤섞인 잡탕비빔밥과 같은 결과가 사실은 이들을 정말로 쪽팔리게 만든다는 점을 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양한 모방의 결과들이 소화되지 못한 채로 촌스럽게 드러나 있는 것은 그의 위장 안에서나, 그의 원고지 위에서나 똑같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지속할수록 자충수를 두는 것과 같습니다. 모르는데 더욱 정교하게 아는 척해야 하는 상황들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결국 사이비-깨달음의 자극에 중독되는 최종국면을 맞이합니다. 그러한 자극을 맛보는 동안에는, 물론 힘들지만 그래도 복잡하지는 않은 단순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우주만큼 넓고 평화로운 존재인 양, 마치 신인 것처럼 자기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들은 결국 깨달음의 정반대편으로 향하는 이들입니다.


붓다라면 깨달음의 정반대편이 무엇인지 아주 명료하게 말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입니다.


이들은 사이비-깨달음 속에서 실제로는 고통을 예찬하고 그 고통을 더욱 양산하려고 하는 이들입니다. 더 많은 이들에게 고통의 현실을 보급하려고 하는 이들입니다. 자기의 소설 속에 더 많은 이들을 유입시켜, 민족대잔치 고통 한마당을 크게 펼치려고 하는 이들입니다.


프로이트는 늘 이유있는 1승을 거둡니다.


아빠에게 귓방망이 한 대라도 호되게 맞아본 아이는 이러한 인격을 형성하지 않습니다.


활화산의 화구 옆에 집을 짓고, 쓰나미가 들이닥치는 해변가에서 뛰어놀며 자기가 영원한 주인공인 것처럼 고집하다가, 또 남들에게도 주인공이 되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니들도 나를 모델링해서 살라고 사기치다가, 아빠한테 매타작을 당해본 이는 이제 아빠 무서운 줄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아빠를 통해, 사람 무서운 줄을 알게 됩니다.


이 심리적으로 미발달된 아동들은, 생물학적 나이를 얼마나 먹었든 간에, 아직까지도 사람 무서운 줄을 몰라서 사람을 도구로 삼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러한 미발달 아동은 늘 자신의 인생에서 동일한 3류 소설을 반복합니다.


자신이 모방할 대상을 찾아 마치 그를 스승처럼 섬기다가, 이제 충분히 언어적으로 모방이 이루어진 것 같으면 그 스승적 존재에게 자기도 동격이 된 양 저항을 시작하고, 저항이 반발되면 슬그머니 억압받는 희생자의 포지션으로 자기를 위치시키며, 결국에는 자신은 그를 좋아했지만 그의 아집으로 함께하지 못하게 된 비련의 주인공처럼 스승적 존재의 곁을 떠나는 그림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스승적 존재를 안쓰럽게 여기며, 자신은 한층 높고 여유로운 자리에서 이제 진정한 자기만의 길을 가는 건강하고 유능한 존재인 것처럼 자전적 소설의 대단원을 집필하게 됩니다. 여전히 남의 말을 읊고, 남의 행동을 따라하면서도, 그것이 마치 모방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의 노력으로 얻어낸 자기의 것인 것처럼, 즉 도둑이 고생해서 훔쳐간 물건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바로 그 모습처럼.


그러다가 미발달 아동이 탐을 내며 모방할 만한 가치로운 대상을 또 만나게 되면, 이 모든 것은 다시 처음부터 반복됩니다.


모방하고, 저항하고, 조종하고, 수동공격하고, 내치거나 내쳐지고, 그렇게 재미를 다 보면 종이컵처럼 버리는 방식으로.


지금 이 묘사들은 다 '경계선성 인격장애'에 대한 묘사들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고통을 양산하는 죄의 인격'이라고 이 글의 제목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 '경계선성 인격'을 지칭합니다.


무수한 심리상담자들이 상담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바로 경계선성 인격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 중의 많은 수가 깨달음, 마음만나기, 영성, NLP, 최면, 멘탈리스트, 판타지, 신화, 스토리텔링 등의 키워드들과 연결되고, 또 그것들을 주된 활동으로 전개합니다. 이러한 소재를 통해, 자기의 인생을 소설처럼 조직해나가고, 또 주변인들도 그 소설 속에 강제적으로 유입시키려 합니다.


칠죄종의 반대 개념인, 겸손, 자선, 친절, 인내, 순결, 절제, 근면의 이 미덕들은, 경계선성 인격장애를 가진 이들이 표면적으로 사람들에게 아주 잘 어필되는 특성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에 호감을 느껴 사람들은 경계선성 인격과 관계를 맺게 되고, 이내 지옥에 빠지게 됩니다.


통속적으로 사이코패스, 즉 반사회성 인격장애가 마치 이상심리학의 정점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이상심리학의 영원한 꽃은 경계선성 인격장애입니다.


반사회성 인격은 자신을 위장하지만, 경계선성 인격은 위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런 척의 달인들입니다. 그런 척하다 보니, 정말 그런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쓴 소설을 정말 자기의 이야기라고 믿는 것과 유사합니다. 셀프 가스라이팅에 능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들이 최면을 위시하여, 타인에게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제공하는 활동에 곧잘 매진합니다. 최면이라는 것 자체도 애초 피험자에게 시험자가 유도한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주입하는 일입니다. 자신들이 셀프 가스라이팅에 능하다 보니, 타인을 가스라이팅하는 일도 익숙한 것입니다.


더 중립적인 용어를 써서 표현하자면, 이들은 가상현실을 진짜처럼 자기 자신에게 믿게 하는 일에 능합니다. 그러니 자신과 비슷한 성질의 타인에게도 이러한 일을 곧잘 하곤 합니다.


즉, 이들은 상대에게 가상의 이야기를 주입시켜 그 이야기로 상대를 조종하기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선의의 목적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또 이들이 주입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선량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것은 게임 속에서 자기만 플레이어인 캐릭터가 NPC들을 임의대로 통제하고 조작하려는 일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자기 혼자 GTA 같은 게임을 하듯이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관점입니다.


애초에 이러한 활동이 성립될 수 있는 그 근본전제 자체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유능한 작가로서 내가 만든 이야기를 통해 너희를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어."


그리고 이 또한 경계선성 인격장애의 아주 핵심적인 특징입니다.


경계선성 인격장애는 탁월한 소설가들이며, 동시에 유능한 연기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만든 연극의 시나리오대로 사람들이 움직일 때 큰 감동을 느낍니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합니다. 존재감이 충만해졌다고 경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연극 안에서 체험되는 가상의 감정이자 감각일 뿐입니다.


전술한 것처럼, 가상의 수행자 소설 속에서 지루하게 반복되어 온 언어적 특수효과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경계가 흐려져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이 곧 경계선성 인격 장애이기 때문입니다.


경계선성 인격장애들이, 론머맨, 공각기동대, 매트릭스 등의 SF를 좋아하는 이유 또한 이러한 작품들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흐린다는 그 이유에 기인합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더 모호해질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이들이 행사하고자 하는 작가적 지배력이 실제의 현실에서도 발휘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과 같이 경계선성 인격장애의 인물로 쉬이 판정되곤 하는 융과 같은 이를 또한 좋아합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져야 이들은 자신들이 신처럼 활개칠 수 있는 무대를 얻게 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는 잘 알려진 표현을 살짝 비틀어 이들의 소망은 분명 이러합니다.


"언젠가 세상은 판타지소설이 될 것이다. 단 내가 쓴."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이들의 판타지소설 속에서 꼭두각시 같은 등장인물들이 되어, 이들이 주인공과 같은 정서적 만족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구로서 봉사해야 하는 신성한 사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더 유능한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모방의 대상물이 되어 단물을 쪽쪽 빨아먹힌 뒤에는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거름통 속에서 그래도 3류 악당으로나마 재활용될 수 있는 간택의 순간을 유일한 영광의 기회로 기다려야 하는 신세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디스토피아의 예언으로부터 우리는 최대한 멀어져야 합니다.


경계선성 인격장애로부터 최대한 멀어져야 합니다.


신과 인간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가장 근본적인 경계를 소외하고 있습니다. 그 소외로부터 수치심이 생겨나, 다시 소외의 세부적 요소들로 분화됩니다. 자잘한 것들이 다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도 고통이 유발됩니다. 관계하면 관계할수록 고통만이 증대됩니다.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지점에서 경계선성 인격장애가 자주 의태하는 모습을 알아두면 좋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기된 표정의 불쌍한 어린아이입니다.


이것은 100% 우리를 속이기 위한 의태입니다.


그 표정을 통해, 우리를 자기의 옆에 붙잡아두거나 또는 자기를 떠나게 하는 방식으로, 결국에는 어떠한 쪽으로든 자기가 쓴 소설의 시나리오를 충족시키는 방식으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하면, 그 불쌍한 어린아이는 뒤돌아서서 만족스럽게 씨익 웃고 있습니다.


얘네, 실체하는 공포영화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이들입니다.


이들과 엮여 이들의 3류 소설 속에서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이들이 친절한 표정으로 뜯어 먹을 이들의 먹이감이 되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만약 피할 수 없다면, 그때는 그냥 즐기십시오.


이들의 아빠 대신에, 사람 무서운 줄을 알게 하는 그 일을 즐기십시오.


이들이,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 대개 한 트럭입니다.


이들의 소설 속에서는 자신이 배신당했다고 시나리오를 써왔지만, 실제로는 전부 다 자기가 배신한 현실뿐입니다. 그 현실 속에는 실제의 사람이 존재했고, 이들이 한 일은 NPC와의 연극이 아니라 실제의 사람을 배신한 일입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혼자 온전한 소설 속으로 아무리 도망가도, 이 현실은 어디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계선성 인격장애인 당신이 반드시 피해야 할 인물상은, 이 현실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당신에게는 이 사람을 통해 반드시 찾아올 한 트럭의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한 기술판단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무섭지 않은 것처럼, 사실은 다른 어떤 아름다운 마음인 것처럼 소설을 쓰지 말고, 정직하게 사람을 무서워하는 편이 낫습니다.


사람을 죽이려 했으니 사람이 무서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경계선성 인격장애인 당신이 한평생 해온 일이 늘 사람을 배신해서 죽이는 일이었으니, 당신이 사람을 무서워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죄에서, 그 무서움에서 도망가 혼자 여여하게 온전한 척할 시간에, 시체를 토막내느라 늘 고생하며 산 자신의 노고를 위로할 시간에, 트럭에 실린 시체의 숫자를 정확하게 세며, 그 피냄새를 분명하게 맡으며, 다시는 모방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살인하지 않겠다고, 사람 제대로 무서워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이 세상에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있다는 사실을 배우는 일이 당신에게는 필요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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